열하일기의 길을 가다(2003년 봄)
2003년 5월부터 6월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혀둔다. 군데군데 내용을 약간씩 추가 수정하였다.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
길을 나서기도 전에 여행은 시작되었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열하일기』에 대한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동서고금 어떤 테마의 세미나에서건 『열하일기』로 시작해 『열하일기』로 마무리했고, 밥상머리에서 농담따먹기를 할 때, 산에 오를 때, 심지어 월드컵축구를 볼 때조차 『열하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나의 원시적(!) 수다에 견디다 못한 후배들이 한때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하는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맞섰다. “내가 『열하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하일기』가 나를 통해 자꾸 흘러나오는 걸 대체 어쩌란 말이냐?”라고.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말하면 나와 『열하일기』는 강도 높은 ‘기계적 접속’을 시도한 셈인데, 그 접속이 하나의 문턱을 넘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이 되어 나오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개전일이었다. ‘아(我)’와 ‘비아(非我)’, 선과 악의 적대적 이분법, ‘우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복음주의적 이성이 화려한 진군을 개시한 것이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내 충혈된 시야를 어지럽힌 건 단지 미영제국의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라크 민중만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이성과 휴머니즘의 명분 아래 북미대평원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간 아메리칸 인디언과 버팔로떼였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죽음의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야생동물들의 비명소리였다. 서구 혹은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이 ‘더러운 전쟁’은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 이젠 정말 나로부터 떠나야겠다. 존재 자체가 ‘반생명’일 수밖에 없는 ‘나’로부터, 자본의 하수인이자 제국의 신민인 그 ‘나’로부터. ‘열하로 가는 먼 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출발이 다가오면서 여행은 또 한 번 예기치 않은 문턱과 마주하게 된다. 느닷없이 ‘괴질에 대한 괴담’이 거리를 휩쓸고 다녔기 때문이다. 괴질이라는 ‘전설의 고향’식 이름은 곧 사스라는 ‘몹시 과학적인’ 버전으로 바뀌더니 급기야 이라크 침공에 맞먹는 공포와 충격의 스펙터클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렸다. 여행을 떠나지 말라고, 떨고 있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나는 연암처럼 ‘유머’로 대응했다. “여행 취소했다가, 국내에서 걸리면 ‘가문의 망신’ 이다”, “내가 이참에 사스를 싹 쓸어버리고 오겠다”, “사스에 걸리면 천운으로 알고 로또복권을 살 테다” 등등, 너무 ‘썰렁’했나? 하지만 과도하게 ‘뜬’ 분위기 ‘다운’시키는 데는 ‘냉각전법’이 최고다. 덕분에 이제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참.
1780년 여름, 연암은 압록강을 넘어 생애 처음 중원땅을 밟는다. 강을 건너면서 그는 말한다.
“자네, 길[道]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도강록(渡江錄)」
曰 “君知道乎” 洪拱曰 “惡是何言也” 余曰 “道不難知 惟在彼岸” 洪曰 “所謂誕先登岸耶”
余曰 “非此之謂也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사이[際]’란 무엇인가? 그것은 가운데가 아니다. 평균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혀 낯설고 새로운 길, 시작도 끝도 없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고원이다.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
그로부터 약 2세기 뒤, 요동벌판, 천지를 뒤덮는 모래바람 속을 가로지르며 나는 묻는다. 『열하일기』와 나, 그리고 2003년 봄 중국, 이 세 개의 흐름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진정 ‘나’로부터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잡초는 범람한다!
2003년 4월 14일 오후, 여행의 첫 기착지 심양에 도착했다. 애초엔 배를 타고 단동으로 갈 작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심양이 출발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행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셋, 연암이 장복이와 창대를 동반했듯, 나 또한 Y와 J, 두 명의 후배와 함께 했다. 연암이 유머의 천재라면, 장복이와 창대는 연암조차 얼어붙게 할 정도의 ‘덤앤더머’였다. 그럼 우리 팀은? ‘갈갈이 패밀리’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Y, 중국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하고, 여성들만 보면 일단 말을 걸고본다. J, 중국어는 물론 모국어인 한국어도 약간 더듬거린다. 여성들 앞에선 더더욱 얼어붙는다. 공항에는 밤열차를 타고 달려온 L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선 그를 ‘인민의 입’ 혹은 ‘통역기계’라고 부른다. 단지 입만 산 게 아니라, 중국의 흐름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눈’에다 폭넓은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발’까지 두루 갖춘 탁월한 ‘중국통’이다.
세계적인 오염도시답게 심양의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스모그려니 하고 공항을 나서는데, 차고 거센 황토바람이 몸을 덮쳐온다. 어린 시절, 태풍 사라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 강원도 시골 산자락 밑에서 엄마품에 얼굴을 묻었던 기억이 흑백필름처럼 휙 스쳐지나간다. 아뿔사! 우리는 4월 황사가 용트림을 하는 계절에 그 진원지에 들어선 것이다. 겁대가리 없이.
‘영웅들의 싸움터’라고 했던 연암의 말 때문일까. 나는 바람의 회오리 속에서 전사들의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그들이 이 땅에 도래했을 때도 이런 흙먼지가 천지에 요동쳤으리라.
17세기 초 만주벌판에 누르하치라는 위대한 추장이 출현했다. 잡초처럼 떠돌던 ‘와호장룡’들이 그의 카리스마 앞에서 하나로 결집된다. 후금(後金;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후예라는 의미)에서 ‘청(淸)’으로 이어지는 건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 유목민의 국가라니? 형용모순! 하기야 그건 국가라기보다 일종의 ‘전쟁기계’였다. 요양, 무순, 심양 등지에는 수천 명의 청군이 십만 이상의 명나라 정예부대를 순식간에 박살 낸 ‘전쟁서사’가 수두룩하다.
그래서인지 ‘심양고궁’은 궁이라기보다 차라리 야전부대의 막사처럼 보인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황제라는 초월적 기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배치를 갖추고 있다면, 이곳은 넓은 뜰에 팔기군의 전각들이 사방에 포진하면서 한결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낱 오랑캐들이 어떻게 중화제국의 거대한 뿌리를 단숨에 전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연암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탄식하게 했던 물음이다. 고궁을 거닐며 L과 나는 연암의 물음을 슬쩍 비튼다.
“이라크전이 끝나면, 세계는 바야흐로 미국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겠지?”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한다면, 저항 또한 본격화되겠죠. 반전시위가 그랬듯이, 앞으로 저항의 전지구화는 점차 가속화될 거예요.”
“맞아. 제국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탈영토화하는 운동들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필요해, 국가, 민족, 자본의 경계를 넘는 강렬하고 유연한 제국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제국을 구축하는 투쟁방식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봐.”
“노마디즘의 정치를 꿈꾸는 건가요?”
“물론, 실제로 능동적인 접속과 변이가 가능한 ‘꼬뮤니티’들이 다양하게 구성되는 조짐들이 보여. 그것들은 조직적 중심이나 위계가 아니라, 오직 네트워크와 활동성, 다시 말해 강렬도(intensity)만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아주 새로운 실험이 될거야.”
공허하다고? 맞다. 하지만, 인간만사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던가. 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터. 모든 고정된 것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저주로서의 무상성! 그 무상함에 기꺼이 몸을 던질 수만 있다면, 노마디즘은 제국에 대한 치명적 전략이 될 수 있으리라. 누르하치의 ‘전쟁기계’들이 그러했듯이.
고궁을 나서며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흥얼거린다. “꽃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유용하며,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범람한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산해관을 지나서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차창 밖에서는 한겨울의 칼바람 같은 굉음이 들려오고, 고속도로 위의 나무들은 날아갈 듯 휘청댄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 밖으로 나설라치면 머리가 사방으로 곤두서고 다리가 꺾일 정도다. 맑은 하늘을 본 게 언제더라? 그래, 거기에 가면 좀 쉴 수 있겠지, 숲도 있고, 물도 있을 테니, 수양산 ‘이제묘’를 찾아갈 때의 심정은 대략 이랬던 것 같다.
아득한 고대,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아버지인 왕이 세상을 떠나자 ‘형님 먼저, 아우 먼저’하며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흠, 훌륭한 덕을 갖춘 군자들이로군’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말고삐를 잡고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 은의 주왕(紂王)은 만민이 치를 떨었던 ‘폭군 중 폭군’이다. 근데, 왜 말려? 힘을 합쳐 싸우지는 못할망정.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건 인이 아니란다. 치열한 비폭력주의일까? 아니면 인텔리의 고지식한 결벽증일까? 사마천(司馬遷)이 『사기』 「열전」에서 이 ‘고사리 형제’를 일순위로 올리면서 한껏 띄워주는 바람에 동아시아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끌어안고 오랜 세월 골머리를 앓는다. 하긴 성삼문은 한술 더 떠 ‘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먹었냐고’ 따졌으니, 조선의 선비들이 그 방면에 있어서는 한수 위인 셈.
물론 연암의 ‘수양산 스케치’에는 그런 비장감보다는 특유의 위트가 넘친다. 관습에 따라 고사리 넣은 닭찜을 얻어먹었는데, 일행 가운데 한 말몰이꾼이 배탈이 나, 숙제를 숙채(熟菜, 삶은 나물)로 잘못 알아듣고 “백이, 숙채가 사람 죽인다[伯夷熟菜殺人]”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나. 어떤 엄숙한 테마도 경쾌한 놀이로 변환하는 ‘호모 루덴스’, 연암!
헌데, 고속도로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황토길을 꽤나 갔는데도 도무지 수양산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교길인지 황토바람을 뚫고 청소년들이 무리지어 지나간다. 답답한 심정에 저만치 홀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을 붙들어 세웠다. 해맑은 표정이 마치 황무지에 핀 야생초 같다. 학생이 아니라 그곳 고등학교 역사선생이란다. 아, 이렇게 반가울 데가!
그는 한참 설명을 듣더니 바로 지척을 가리킨다. 거기에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없는 황토더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맙소사! 저게 수양산이라고?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먹다 죽은 게 아니라, 고사리도 못 먹어서 굶어 죽은 게 아닐까요?” 누군가 유머랍시고 구사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는다. 청년의 자상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이제묘는 사라졌고, 그 위에 강철공장이 들어섰다는.
휑한 가슴을 추스르며 좀더 들어갔더니, 건너편 기슭에서 시뻘건 불을 내뿜는 강철공장이 몰골을 드러낸다. 마치 애니매이션 공포물에 나오는 악마의 소굴같다. 그 아래, 연암이 ‘맑은 빛이 거울’ 같다고 했던 ‘난하(灤河)’는 말라 비틀어져 형체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황토바람에 공장의 매연이 뒤섞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한참을 허둥대고 있는데, 한 농민이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태연하게 지나간다. 순간, 시야가 뿌예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아,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여기에 사는 사람들도 이 황량한 산하를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추억할까? 또 정치적 이유로 실향민이 된다면, 일평생 이곳을 그리워하며 돌아오기 위해 몸부림칠까? 탄광촌 막장에서도 마주치기 어려운, 숨쉬기조차 힘든 이 지옥 같은 풍경들을, ‘이미지의 몰락’, ‘역사의 덧없음’ 따위를 떠올리는 것조차 유치한 감상이 되어버리는 ‘표상의 외부지대’! 고향이라는 의미로 결코 담을 수 없는 아, 모진 목숨들의 거처. 수양산은 없다! 백이, 숙제도 없다! 다만, 거기엔 사람이 살고 있을 뿐.
돌아 나오는 길, 차창 밖엔 어둠이 짙게 깔렸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전거를 타고가는 ‘야생초 청년’의 뒷모습이 눈동자에 오롯이 박힌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사상체질 총출동!
나는 ‘용가리 통뼈’다. 너무 놀라지들 마시라. 마흔이 넘도록 뼈를 다치거나 삔 적이 거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이번 여행중에도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첫관문이 있다는 발해만(渤海灣)엘 갔다가 택시기사의 실수로 바퀴에 발목을 밟히는 ‘참사’를 당했건만, 5분 만에 멀쩡해졌다. 강원도 산골 출신이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신장이 튼튼해서 그렇단다. 사상의학적으로 보면 신장이 튼튼한 사람은 소음인에 해당된다. 소음인, 차분하고 내성적이다. 내가? 그럴 리가! 하긴, 어린 시절엔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그랬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아니나 다를까, 신장 못잖게 폐가 강하다. 날카로운 인상에 목소리가 높고 성질이 좀 급한 편이다. 에둘러가기보다 직선적으로 돌파하는 걸 좋아한다. 이건 태양인의 특질이다. 어설프게 종합해 보면 ‘소음성 태양인’에 해당한다. 연암이 ‘순양의 기품을 타고난 태양인’이라면 나는 서로 상반되는 특징이 뒤섞인 ‘음양파탄지인’인 것. 한마디로 좀 질이 떨어지는 셈이다.
장기여행을 하다보면 교양이나 지식보다 기질적 차이가 원초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우리 일행 또한 그랬다.
Y, 소음인, 별명 개미허리, 여성들 앞에서 말이 많아지는 허점(혹은 강점)이 있긴 하나, 매사에 치밀하고 성실하다. 검소한 생활이 몸에 냈다.
J, 태음인, 속이 깊고 무던해서, 갈등이 불거질 때 완충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곰과 관련된 별명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이번 여행 중 얻은 것으론 ‘베어 사피엔스’, ‘호모 베어스’ 등이다.
우리들의 ‘눈과 입’, ‘발’이 되어준 L, 소양인, 음악, 차, 컴퓨터 등 다방면에 프로다. 그러니만큼 언제나 멋진 형식을 중시한다. ‘폼생폼사’! —— 그의 신념이자 행동강령이다.
결국 우리 넷은 사상체질이 총망라된 집합체였던 것. 서로 다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하지만 한번 부딪히면 아무도 못말리게 된다. 전장터는 주로 밥상이었다.
L: 멋진 여행을 즐기려면 돈이 좀 들더라도 각지역 최고 요리를 맛봐야죠.
Y: 1원짜리 쿤둔(만두)도 괜찮은데.
J: 전 아무거나 좋아요. 많이 먹을 수만 있다면.
그럼 나는? “싸고 간단하게 먹어!”하다가, 실랑이가 길어지면, “아, 뭘 먹든 그게 뭐가 중요해. 남기지나 마!” 한다. 결국 전선은 L과 나 사이에 그어지고, 우리는 거의 매 끼니마다 처절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뭐, 그깟걸 갖고 그러냐고? 모르는 말씀! 시쳇말로 다 먹자고 하는 일 아닌가. 시인 백무산도 말한 적이 있다. “밥상 위에는 모든 것이 있다”고, 권력, 자본, 그리고 혁명까지도.
중국 사람들은 정말(!) 많이 먹는다. 1인분이 보통 우리들 3.4인분이 넘을 정도다. 놀라운 건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을 버린다는 거다. 우리나라 음식쓰레기가 연간 10조원에 달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던 나는 중국인들의 그런 ‘엽기적 풍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중국의 대지는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부해(腐海)를 연상시킬 정도다. 문명의 오염으로 유독성의 기운을 내뿜는 균류들이 번성하는 불모의 생태계, 부해. 근데 그토록 병든 대지에 그 엄청난 음식쓰레기를 퍼부어 대다니! 이거야말로 ‘죽음을 향한 질주’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연암은 “청문명의 핵심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瓦礫糞壤 都是壯觀]”고 했다. ‘깨진 기와’와 ‘버려진 말똥’조차 소중하게 다루어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데 대한 경이의 표현이었다. 연암을 흉내내어 말해 보면, 21세기 중국 문명의 미래는 음식쓰레기에 달려있다. 음식쓰레기야말로 인간의 탐욕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리즘이기 때문이다. 이런 습속을 전복하지 않는 한, 중국에, 아니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 단연코!
여성들이여, 제기를 차라
베이징에서 합류하기로 한 후발대 중 세 명이 낙오했다. 사스 때문이란다. 뭔 사스? 아, 그러고보니 우리는 그동안 사스를 잊고 있었다! 요동벌판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황사의 괴력에다, 고속도로 위의 질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뺨치는 수준이었다. 추월 과속은 기본이고, 중앙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현란한 액션에는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원시적 공포에 시달리는 동안, 도시에선 사스가 한층 기세를 떨치고 있었던가보다. 폭우로 범람한 강을 건널 때, 누군가 연암에게 물었다.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야말로 위태로움[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의 최고가 아니겠느냐고,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조금도 위험함을 모르지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 뿐이라고, ‘이목(耳目)의 누(累)’! 정작 베이징보다 서울에서 더욱 공포가 증폭된 것도 이런 격인 셈인가. 아무튼 ‘사선(사스의 선)’을 뚫고 입성한 두 명은 의기양양해서, “이제 우리를 책임져!” 한다. 그러면 우리 선발대는 눈을 내리깔고 말한다. “니들이 황사의 참맛을 아냐?”
힘겹게 도착한 만큼 우리는 베이징 거리를 유쾌하게 싸돌아다녔다. 틈틈이 ‘제기차기’로 팀웍을 다지며, 웬 제기? 연구실이 ‘발견한’ 운동 가운데 하나다. 우연히 시작했다가, 한의학적으로 수승화강(水升火降)하는 효과가 있다는 ‘썰’을 들은 다음부턴 무시로 제기를 차댔다. 어, 근데 이게 웬일인가? 베이징에선 곳곳에서 제기를 차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주로 아줌마들이! 테크닉도 장난이 아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한마디로 ‘소림제기’ 수준이다. “인해전술이 아니라 다이다이로 붙어도 지겠는걸요?” 일행들은 중국 아줌마들한테 떨고 있었다.
연암은 한족 여인네들이 전족 때문에 뒤뚱거리며 땅을 디디고 가는 꼴에 못내 안타까워했다. 전족이란 발을 작게 보이려고 어릴 때부터 꽁꽁 싸매는 여성억압의 대표적 습속이다. 만주족들은 수없이 법으로 금지했건만, 한족들이 오히려 완강하게 고수했다고 한다. 종족적 정체성의 표지를 여성의 신체에 새겨넣었던 것. 전족에서 제기를 차는 발로! 이 하나만으로도 문명사적 변환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정말 운동을 하지 않는다. 헬스나 에어로빅처럼 ‘몸매가꾸기’에만 주력할 뿐, 일상에 뿌리내린 운동에는 거의 무관심한 형편이다. 전족이 말해주듯, 권력은 언제나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자기의 신체를 능동적으로 조절하고 변이하는 능력, 이것이 없이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 제도나 법은 부수적인 방편일 뿐, 감기의 변종에 불과한 사스에 놀라 위생당국의 명령에 낮은 포복으로 설설 기는 광경을 보라, 몸으로부터의 소외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기도 어려울터, ‘사스소동’은 임상의학이 신체를 훈육하는 억압적 기제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거꾸로 말하면, 몸에 대한 자율권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는 길이라는 뜻도 된다.
여성들이여, 성과 권력의 배치를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국가와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몸을 조절하고 관리하라. 등산을 하든 요가를 하든, 혹은 제기를 차든. 바로 그 순간,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펼쳐질 터이니.
‘앉아서 유목하기’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三更)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夜三更, 朝鮮朴趾源過此].” 이름이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연암이 이름을 남긴 곳. 그것도 남은 술을 쏟아 먹을 갈고, 별빛을 등불삼아 이슬에 붓을 적셔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은 곳, 고북구,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험준하기로 이름난 동북부의 요충지다. 연암이 ‘무박나흘’의 고된 여정 속에서 통과했던 이곳을 우리는 베이징을 나선 지불과 반나절만에 도착했다. 백 개가 넘는다고 하는 입구 중 우리가 오른 곳은 반룡산(蟠龍山)에 있는 관문,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천연의 요새 위로 장성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마치 용의 비늘인 양 꿈틀거린다. 오, 놀라워라!
하지만 어쩐 일인가. 이 기념비적 축조물에서 제국의 위엄보다는 유목민에 대한 제국의 공포가 느껴지는 건, 대체 얼마나 오랑캐가 무서웠으면 이토록 엄청난 장성을 쌓았단 말인가? 실제로 이 장성이 완성된 뒤에도 오랑캐들은 중원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았다. 거란, 여진, 몽고 등 초원의 ‘노마드’들은 수시로 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유린했다. 들뢰즈는 말한다. 요새는 유목민의 절대적인 소용돌이 운동에 상대성을 부여하는 장애물일 뿐이라고.
물론 제국의 역사는 반대로 기록한다. 오랑캐들에겐 문자도, 문명도 없다, 그래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제국을 침범하긴 했으되, 언제나 제국의 문명적 위엄 앞에 굴복했고, 흡수되었으며, 마침내 역사에서 사라져 갔노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 오히려 그들에겐 문자도, 그 ‘잘난 역사’도 불필요했던 게 아닐까? 초원의 목초지를 따라 구름처럼 떠도는 ‘와호장룡’들에게 귀환해야 할 중심이나 위계 같은 건 필요없다. 어떤 기억을 시간의 장벽 속에 가두어버리는 역사 따위는 더더욱. 사건에 대한 기억이란 문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신체적 감응을 통해 곧바로 표현되는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오랑캐의 패배를 힘주어 강조하는 건 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제국의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연암이 이곳에서 본 것도 제국의 위용이나 영광이 아니었다. 승리에 대한 회상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슬프다, 여기는 옛날부터 백 번이나 싸운 전쟁터이다[噫! 此古百戰之地也].” 그의 가슴에 사무친 것은 다만 형용할 길 없는 전쟁의 비애, 그것이었다.
고개에 걸린 초승달은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세운 칼날 같고,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놓은 듯, 큰 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나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時月上弦矣, 垂嶺欲墜, 其光淬削, 如刀發硎; 少焉月益下嶺, 猶露雙尖, 忽變火赤, 如兩炬出山. 北斗半揷關中, 而蟲聲四起, 長風肅然, 林谷俱鳴. 其獸嶂鬼巘, 如列戟摠干而立, 河瀉兩山間鬪狠, 如鐵駟金鼓也.
5천 년 이래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이렇듯 전쟁의 메타포와 음산한 귀곡성으로 그득하다.
이제 가공할 힘과 속도로 제국을 위협했던 오랑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유목은 이제 불가능해졌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제 모든 종류의 국가장치 내부에 잠입해 전혀 다른 전쟁의 배치를 작동시킨다. 낯설고 이질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한 탈영토화운동으로, 도시의 ‘홈 파인 공간’을 가로지르며 ‘매끄러운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탈주선으로, 이 전쟁에선 더 이상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지지 않는다. 니체의 말처럼 “좋은 전쟁에선 화약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건 초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바로 그 자리를 초원으로 만드는 일이다. ‘앉아서 유목하기’, ‘도시에서 유목하기’, 장성을 벗어나 벚꽃이 눈부신 산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과연 네가 발딛고 서 있는 곳은 초원인가? 아니면 제국의 영토인가?”라고,
열하, 그 열광의 도가니
“노새의 족보는?”
“엄마는 말, 아빠는 당나귀.”
“맞았어. 말의 힘과 당나귀의 지구력을 겸비한 셈이지. 그럼, 엄마가 당나귀, 아빠가 말인 건?”
“그런 놈도 있나? 글쎄다~.”
“버새!”
“그럼 힘도 없고 지구력도 딸리겠네? 그걸 워디에 써?”
“아니지, 그러니까 되려 상팔자지. 우리도 그렇잖아. 푸하하.”
L과 N, 그리고 그의 연인 Z의 ‘개콘’식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고북구를 나와 열하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노새와 당나귀들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 어드벤처를 겪었건만, 지금 그 강들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연암이 경탄해 마지않았던,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던 말들은 그 화려한 속도를 거세당한 채 노새로 전락해 있었다. 근대문명이 제공하는 편의는 이렇듯 산문적 무료함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장엄하게 뻗은 산들의 행렬이 끝나자 문득, 넓고 툭 트인 평원이 펼쳐진다. 아, 마침내 열하에 도착한 것이다. 열하(熱河), 장성 밖 요해의 땅, 베이징에서 동북방 700리, 지금의 명칭은 승덕(承德)이다. 연암 일행이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면서 이 낯선 곳에 이르렀던 연유는 무엇인가? 건륭제가 만수절(70세 생일) 행사를 위해 이곳에 행차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 네번째 황제다. 할아버지가 ‘왕중왕’으로 꼽히는 강희제고, 아버지 옹정제(雍正帝) 역시 저 머나먼 변방 관리들까지 손금 읽듯 체크했다는 성군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 이 트리오의 치세는 청왕조의 절정기이자 중국이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웅비(雄飛)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면, 건륭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동북부 변방까지 행차를 했던가? 표면적인 이유는 피서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잡은 무열하(武列河)와 사방에 절묘하게 솟아 있는 산들의 형세는 피서지로서 과연 손색이 없다. 하지만, 연암은 말한다. 피서란 명목이었을 뿐이고, 실상은 북쪽 오랑캐들, 특히 몽고의 준동을 제압하기 위함이었다고. 거대한 스펙터클을 과시함으로써 이민족들의 사기를 꺾을 심산이었던 것.
과연 그러했다. 황제가 여름 한철을 보내기 위해 세운 피서산장(避暑山莊)은 베이징의 이화원보다도 더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배를 타고 도는 데만도 한 시간 이상 걸린다는 호수 곳곳에 전각들이 빼어나다. 재미있는 건, 호수 한쪽 귀퉁이에 진짜(?) 열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밑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솟아올라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데, 세계에서 가장 짧은 강이란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지니 수레ㆍ말ㆍ낙타 등이 밤낮으로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연암에게 있어 열하는 이렇듯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몽고, 위구르, 이슬람, 서양 등 청을 둘러싼 낯설고 이질적인 문명들이 용광로처럼 뒤섞이는 열광의 도가니! 이 우발적인 역동성으로 가득찬 ‘매트릭스’ 안을 연암은 종횡무진 질주한다. 때론 ‘심연을 항해하고 돌아온 고래의 충혈된 눈’으로, 때론 ‘찰리 채플린의 경쾌한 스텝’으로, ‘무용지물’이어서 자유로운 ‘버새’같은 처지였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 와중에 조선조 역사상 가장 특이한 사건, 티베트 불교와의 마주침이 일어난다. 연암,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대체 무슨 일이?
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
ARS 퀴즈 하나. 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Marx가 아님)의 공통점은?
① 유머로 승부한다.
② 권력이 없다.
③ 지도자다.
힌트 —— 한 사람은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수장이고, 또 한 사람은 멕시코 라칸도나 정글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지휘하는 부사령관이다. 한 사람의 얼굴은 사방에 알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검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답은? ①, ②, ③번, 요약하면 둘 다 권력이 없는 유머러스한 지도자.
근데 이게 말이 되나? 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정치적 상상력의 배치를 바꿀 것, 자발적 추대에 의해 구성되는 카리스마, 이데올로기가 아닌 직관의 정치, 적대가 아니라 생성에 기초하는 조직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사람에게는 영토가 없다. 달라이라마는 1년의 반을 세계를 떠돌며 지내고, 마르코스 역시 정글 속 인디언들의 옥수수집을 옮겨 다닌다. ‘언제나 길 위에 있다’는 것, 이거야말로 내가 지구 양끝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오버랩시키는 진정한 이유이다.
사실 연암이 만난 건 달라이라마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이라마 다음인 2인자에 해당하는 판첸라마 6세였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아주 오랫동안 환생을 거듭하면서 티베트고원을 통치해왔다. 환생은 스스로 다음생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윤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신비로운 제도에 대해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건륭제 당시에는 판첸라마 6세가 대보법왕(大寶法王)의 역할을 하던 때였고, 그의 행차는 중국 역사에서도 굉장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열하에는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무렷이 남아 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사원형 궁전 및 판첸라마가 거주했던 찰십륜포(札什倫布), 또 티베트 전통 사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무녕사 등등. 가장 인상적인 건 찰십륜포의 황금전각 위에 새겨진 용의형상. 그것만으로도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스승으로 떠받들었다는 걸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환생이라는 제도도 그렇지만, 수행방식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우리나라에선 삼천배가 통과의례지만, 티베트에서는 기본이 10만배다. 그것도 온몸을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로, 말하자면, 티베트 민족은 일종의 ‘수행기계’인 셈.
따라서 황제가 조선 사신단으로 하여금 판첸라마에게 경배를 드리게 한 것은 일종의 시혜였다. 그러나 사신단에게 그건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만주족도 노린내 난다고 고개를 돌리는 판에 저 변방 야만족의 승려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라니. 가진 거라곤 ‘소중화(小中華) 프라이드’ 밖에 없는 조선인들은 정사(正使)에서 말구종배에 이르기까지 울고 불고 심지어 황제에게 팔뚝질을 해대는 등 갖은 난리부르스를 다 떤다. 하긴, 지금도 한국은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다. 이것도 전통의 면면한 계승인가?!
하지만 연암은 달랐다. 그에게 판첸라마의 존재는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연암은 마치 ‘봉인된 비의’를 찾아헤매듯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내막을 추적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그리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열하일기』에는 조선조에 산출된 문서 중 티베트 불교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새겨진다. 낯설고 경이로운 매트릭스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구도자, 연암!
기묘한 인연의 마주침인가. 그로부터 150년 뒤, 나 또한 달라이라마가 던지는 화두를 끌어안고 불면의 밤을 통과한다. 과연 자비라는 우주적 지혜가 국가의 통치시스템이 될 수 있는가? 구도와 정치가 일치될 수 있는가? 내 신체는 이 물음들을 감당하기에 버겁다. 그러면 내 충혈된 눈을 향해 달라이라마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되묻는다. “대체 적에게가 아니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마르코스의 입을 통해 사파티스타의 슬로건이 그 위에 겹쳐진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낙타여! 낙타여!
“찾았다!”
열하에서 돌아오는 길, 승합차 뒷좌석에서 L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러고는 『열하일기』의 한 페이지를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연암이 수천 마리의 낙타떼를 목격하는 장면이 또렷이 서술되어 있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초판에서 연암이 낙타를 번번이 놓쳤다고 썼기 때문이다. 그간 『열하일기』를 수도 없이 읽어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텍스트 좀 제대로 읽으세요.”
L은 의기양양, 기고만장이다. 윽, 안 그래도 여행 내내 건건사사 신경전을 벌이는 도중이었는데. 이 결정타 앞에서 나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이건 또 어인 곡절인가. 가슴 저 밑바닥이 뭉클해진다. 전공도 다르고, 이번 여행 안내를 위해 처음 『열하일기』를 봤을 뿐인데도 저토록 세심하게 짚어내다니, 상처는 상처고, 그와는 별개로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열하일기』를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에는 그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쓰라린 감동’이라고 하는 건가. 적과 동지는 한끗 차이라더니, 허참.
동물에 대한 연암의 관찰력과 애정은 각별하다. 그는 이국의 벗들과 중화문명의 정수를 접할 때와 똑같은 열정으로 동물들과 접속한다. 낙타와 코끼리를 비롯하여 사슴의 몸에 가는 꼬리가 있는 반양(盤羊), 사람의 말을 능히 알아듣는 납최조(蠟嘴鳥) 등 『열하일기』에는 웬만한 동물 다큐멘터리 뺨칠 정도로 이색적 동물들이 출몰한다. 연암에게 동물이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물을 통해 사유의 깊은 심해를 탐사한다.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손꼽히는 「상기(象記)」는 코끼리의 형상을 주역에 빗대어 서술한 것이고, 그 유명한 「호질(虎叱)」 역시 호랑이의 눈을 통해 인간세계의 비루함을 갈파한 텍스트다. 들뢰즈/가타리는 말한다. ‘동물-되기’란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횡단하면서 변용시키는 실재적 과정이라고. 그렇다면 연암은 가장 드높은 차원에서 ‘동물-되기’를 시도한 셈이다. 단순한 횡단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우주적 비전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 베이징에 입성하자마자 동물원을 찾았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베이징 동물원에 ‘간판스타’인 팬더에서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누우, 인디언과 함께 아메리카 평원에서 사라진 버팔로 등 진기한 야생동물들로 그득했다. 특히 연암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던 코끼리의 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이상 연암이 접속했던 그 동물들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특이성으로 인간을 변용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인간화된 변종’들일 뿐이다. 야생동물에 대한 인간의 완벽한 승리! 하지만 이 승리는 너무나 많은 걸 앗아갔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과 감응하지도, 동물의 신체적 에너지와 분포를 확보하지도 못한다. 동물을 가두는 순간, 인간 역시 스스로의 감옥 안에 갇혀버린 것.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 철옹성을 부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사유는 결코 새로운 경계를 확보할 수 없으리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노새와 양떼들을 보며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일행들이 저녁요리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순간, 내 눈꼬리가 올라간다. “아무거나 먹어! 사소한 일에 집착하기는.” 그러자 L이 즉각 “그러니까 낙타를 놓쳤죠. 입 다물고 계세요.”하며 상처에 왕소금을 뿌려댄다. 나는 곧 침묵한다. 아, 낙타여! 낙타여!
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도무지 갈 데가 없었다. 로사(老舍)에서 보기로 한 경극도 취소되었고, 재래시장, 영화관 등 열린 광장들은 모조리 폐쇄되었다. 물어물어 연암이 다녀간 사찰들을 찾아갔건만, 거기조차 스산한 공고문과 함께 문이 닫혔다. 엄마가 깨를 사오라고 했다는 J와 여름나기 알뜰쇼핑을 계획했던 Y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L은 심각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고, 우리들은 이름없는 공원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하에 다녀오는 동안 베이징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관망하던 중국공산당이 인터넷 여론에 밀려 마침내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마스크의 행렬, 경계하는 눈빛들 귀국러시. 마치 외계인의 침입을 다룬 SF에서처럼 정체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육중한 공포가 베이징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루쉰박물관에 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소치였다.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 문득 마주친 곳이기 때문이다. L은 너무 많이 다녀간 곳이라 지겹다고 했고, 나 또한 이미 와봤던 곳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팀의 막내들이 열광적인 루쉰 팬인 데다 첫방문이라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물론 거기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공안 두 명이 감시인지 보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무심하게, 정말 무심하게 박물관을 돌고 있는데 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박물관을 반쯤 돌 즈음, 불현듯 루쉰의 초상 뒤에서 연암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광인일기」 「아Q정전」을 통해 중국사회의 낡은 관습에 통렬한 풍자를 감행했던 초기 루쉰과 「양반전(兩班傳)」, 「마장전(馬駔傳)」을 통해 양반사대부의 부조리를 여지없이 까발린 청년 연암. 잡문(雜文)이라는 특이한 스타일로 문학과 사상의 경계를 종횡했던 후기 루쉰과 촌철살인의 아포리즘(aphorizm)으로 고문(古文)의 견고한 지반을 뒤흔들었던 중년 연암, 웃음과 역설이 연암의 무기였다면 풍자와 파토스는 루쉰의 투창과 비수였다.
하긴, 이런 식의 유사성은 사소한 것일 터, 시공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조우할 수 있다면, 그건 두 사람 모두 걸으면서 질문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던졌다. 걸으면서 묻고, 묻기 위해서 걸었다. 어떤 해답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연암이 중세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며 중세적인 것에도, 근대적인 것에도 결박당하지 않았던 것처럼 루쉰 역시 근대의 광풍이 밀려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근대의 심연을 투시해버렸다. 이 난만한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물음으로, 아주 낯선 길로 유도한다는 것, 그거야말로 내가 두 사람을 헷갈린(!) 진정한 원천이었다.
연암은 말한다. “길은 강과 언덕, 그 사이에 있다”고. 그러면 루쉰은 이렇게 응답한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지나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루쉰을 만나고, 또 루쉰을 통해 연암을 다시 보게 된 건 실로 운명적 마주침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맹’이다. 남들은 눈감고도 가는 길을 두눈 멀쩡히 뜨고도 늘 잘못 들어선다. 하지만 박물관을 나오며 이제부턴 다르게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따지고 보면 내가 연암을 만난 것도, 중국 여행을 하게 된 것도, 또 이 설익은 여행기를 쓰게 된 것도 모두 ‘길을 잘못 들어선’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또 어쩌겠는가. 그 잘못 들어선 길들이 이미 내 ‘생의 한 가운데’를 점령해버린 것을.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도 길은 계속될 것이다. 길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고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길! 그러므로 나는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감히 이렇게 기원하면서, 나 또한 걸으면서 질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다른 이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 갈 수 있는 낯설고 경이로운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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