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우열장(孝優劣章) 제십이(第十二)
가까운 데서부터 실천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기의 친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일컬어 패덕(悖德: 덕에 어긋남)이라고 한다. 자기의 친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일컬어 패례(悖禮: 예에 어긋남)라고 한다. 子曰: “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 이러한 어긋난 도리로써 백성들을 가르치면 그들은 어둡게 되고, 그들은 본받을 수 있는 준칙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선(善)에 거할 바를 모르게 되며, 모두 흉덕(凶德)에 거하게 된다. 以訓則昏, 民亡則焉. 不宅於善, 而皆在於凶德. 이러한 어긋난 도리로써 설사 출세의 길이 열린다 하더라도 군자라면 모름지기 그것에 따르지 아니 한다. 군자는 그렇게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아니 하며, 말할 때는 오직 말할 만한 것만을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오직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한다. 雖得志, 君子弗從也. 君子則不然, 言思可道, 行思可樂. 군자의 덕과 의로움은 백성들이 존경할 만하며, 그가 짓는 일들은 본받을 만하며, 그의 모습과 행동은 백성들이 우러러볼 만하며, 그의 삶의 진퇴(進退)는 백성들이 척도로 삼을 만하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써 백성들을 대하니, 자연히 백성들은 그를 경외하며 사랑하고, 기준을 삼아 본뜬다. 그러므로 능히 그 덕교(德敎: 문화적 교화)를 이룰 수 있고, 그 정령(政令: 정치와 법령)을 부드럽게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德誼可尊, 作事可法, 容止可觀, 進退可度, 以臨其民. 是以其民畏而愛之, 則而象之. 故能成其德敎, 而行其政令. 『시경』 조풍(曹風) 「시구」 노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 의젓한 군자여, 그 반듯한 위의(威儀)가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다.’” 『詩』云: ‘淑人君子, 其儀不忒’” |
‘효우열(孝優劣)’이란 효에도 우수한 효가 있는가 하면 열등한 효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수한 효라는 것은 반드시 가깝고 비근한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친(親)에서 소(疎)로 나아가야 되며, 근(近)에서 원(遠)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에 출세를 잘 하는 사람 중에 친부모를 홀대하고 남의 부모에 알랑거려 출세가도를 여는 사람도 있고, 가정에서는 개판이면서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본장의 논지는 보다 개념적인 논쟁에서 도출된 것이며, 묵가(墨家)의 겸애(兼愛)설을 집중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효경』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유가비판을 의식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묵가의 겸애의 주장이 반드시 ‘나의 부모를 사랑하지 아니 하고 남의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병이 왜 일어났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 한다[如醫之攻人之疾者然, 必知疾之所自起]. 그 근원을 모르면 병을 공략할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천하의 어지러움이 왜 생겨났는지, 그 근원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의 진단의 핵심이 천하의 어지러움이 모두 ‘불상애(不相愛)’, 즉 ‘서로를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사(自私)의 이익만을 도모하여 편애하게 되면 그 관계가 원활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타부모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차등의 원리를 적용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관계가 편협한 가족주의에 빠지게 되고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친근한 사람부터 봐주기(favoritism, 편애)에 빠지게 되며, 국가 간의 군사적 사태에 있어서도 아주 편협한 정벌이론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가가 묵가를 비판하는 논조로, 묵가를 정당하게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아가페(αγαπητοις, Agape, agápē,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를 생각해도 하나님의 무차별적 보편애를 인간이 실천해야 된다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 무분별적 보편주의를 실현하는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될까? 테레사 수녀도 수없는 회의 속에서 일생을 보냈다는데, 묵자의 겸애든지, 기독교의 아가페든지, 현실적 인간의 현실태로써 실현하기에는 너무 허점이 많다고 유가는 주장하는 것이다. 유가의 친애(親愛)는 단지 패밀리즘의 오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그 보편적 덕성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찌 타인(他人)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가까운 데서부터 보편적 덕성을 실천하자! 이것이 유교의 테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에게 가정내의 효윤리의 실천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본 장은 ‘군자(君子)’의 모범적 행동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주희식으로 전(傳)을 말한다면, 사(士)에 대한 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주자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의 『시경』도 최초로 국풍(國風)을 인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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