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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건방진방랑자 2021. 5. 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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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케리그마, 공자의 케리그마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이미 그것이 세가(世家)로 편입되었다는 사태가 이미 명백한 어떤 케리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공자가 지성(至聖)’이심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것을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료가 된 많은 공자에 관한 기술의 파편들(fragments)이 모두 일정한 목적을 지니고 공자제자의 집단들에 의하여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것도 역시 공자 사후의 초기 교단(敎團, 가르침을 신봉하는 집단)의 케리그마적 성격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관한 기술은 신화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초자연적 사태를 개입시킨다는 것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화적 기술의 유무의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매우 평범한, 가능한 사실적 기술이 오히려 신화적일 수도 있다. 공자의 삶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상식의 전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환경의 문화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말대로 삶의 형식(Lebensform)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선진중국인(先秦中國人)들의 삶의 형식은 격렬한 사막의 유대인들처럼 어떤 초자연적 사태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자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케리그마처럼 괴력난신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기술도 예수의 기술과 똑같이 비신화되어야 할 신화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명실공히 공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최초로 쓰인 가장 포괄적인 전기문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전에는 공자 그 인간에 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가? 선진(先秦)문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라는 인간에 관한 언급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그 이전의 공자에 관한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묵자(墨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열자(列子), 예기(禮記), 한비자(韓非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초사(楚辭), 윤문자(尹文子), 공총자(孔叢子)등 거의 모든 주요문헌에 공자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이것은 곧 공자는 일가를 이룬 제자백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떠날 수 없는 어떤 심상을 제공한 강력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춘추말(春秋末)에서 진한지제(秦漢之際)에 이르는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의 최고의 스타였다. 공자는 결코 은학(隱學)이 아닌 현학(顯學)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학단(學團) 조직의 실제적 지구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문헌에 나오고 있는 공자얘기를 다 살펴볼 적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모든 문헌에 공자에 관한 기사가 지금 현존하는 논어(論語)라는 텍스트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예기』 「방기편(坊記篇)중에 논어왈(論語曰)’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공자가 논어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문맥상 가당치 않고, 따라서 후대의 찬입이 확실하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방기편은 한대에 성립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논어는 서한말(西漢末) 원제(元帝, 위앤띠, Yuan Di, BC 49~33) 때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 장 위, Zhang Yu)노론(魯論)을 주()로 하고 제론(齊論)을 참조하여 오늘날의 20장 체제로 확정한 장후론(張侯論)텍스트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논어고주의 정본을 남긴 정현(鄭玄, 정 쉬앤, Zheng Xuan, AD 127~200)노론의 편장을 주로 하여 제론고론을 참작하면서 교정을 가하여 주석을 했다고 하안(何晏)이 말했는데[漢末, 大司農鄭玄, 就魯論篇章, 考之齊古, 以爲之注. 集解敍] 이때 정현이 저본으로 삼았다고 하는 노론이란 바로 장후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안(何晏, 허 옌, He Yan, BC c.193~249)의 집해(集解)나 황간(皇侃, 후앙 칸, Huang Kan, 488-545)과 형병(邢昺, 싱 삥, Xing Bing, 932~1010)의 이소(二疏)가 모두 이 장후론에서 발전한 정현주본에 의거한 것이다. 장후론이전의 전국시대 상황을 말하자면 논어텍스트의 부분적 파편들이 전승되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오늘 보듯이 볼 수 있는 논어라는 서물은 전국시대 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최근 BC 300년경의 유물로 추정되는 곽점죽간(郭店竹簡) 중에 어총3(語叢三)이라고 분류된 문헌이 나왔고 그 문헌 속에 논어』 「술이자한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어가 이미 자사子思 때 성립하였다고 하는 일부 중국학자들의 논의가 있으나 그것은 엄밀한 논리를 결한 성급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그 두 구절의 발설의 주체가 공자라는 것이 명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한4毋意, 毋必, 毋固, 毋我로 추정되는 죽간의 자의와 맥락적 해석 그 자체가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과연 논어의 구문인지 확정짓기 어렵다. 이러한 죽간 구문의 존재가 오히려 공자와 무관하게 떠돌아다니던 정형구를 공자의 말로서 나중에 편집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다. 어총3논어유사구는 전혀 논어라는 서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논어라는 텍스트가 없이도 이미 공자와 그의 집단의 행적과 언론은 전국시대 때 제자백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사후에 크게 역사의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역사를 움직여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의 배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였다. 제자백가의 흥기는 기실 이 공자집단이라는 이 에너지에 제동을 걸든가 혹은 철저히 옹호하든가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피어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논어라는 텍스트를 정확히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논어의 많은 사상적 주제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자백가들은 제멋대로 그 주제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매우 진솔하다. 묵맹(墨孟)으로부터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이르는 모든 공자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픽션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놓고 정밀한 역사적 사실을 논구한다는 것 자체가 연구방법에 인식론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소설(小說)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설(大說)아닌 소설(小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세계에는 체계적 대설이 별로 없다.그 모두가 삶의 정황 그 구비구비에서 피어난 소설인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본시 픽션(fiction)과 넌픽션(nonfiction)의 구분이 어렵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차피 소설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의 필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는 공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소설의 집대성이다. 그 이전의 모든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가 가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집대성이며 최초의 대하 드라마였다. 물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 드라마 속에 역사적 근거로서의 공자 그 사람은 엄존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내용을 축자적(逐字的)으로 신봉할 수는 없다. 사마천은 분명 공자의 삶의 터전이었던 곡부까지 두 발로 답사하여 공자세가(孔子世家)를 썼으므로 상당부분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공자에 관한 신빙성 있는 유일절대의 기록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공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할 때 일단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의 논의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는 없다. 공자세가(孔子世家)라는 언어의 벽을 뚫고 어떠한 공자의 모습을 심상에 남기는가 하는 것이 결국 공자세가(孔子世家)이후의 모든 논의의 과제가 되었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정확한 실상(實相)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지만, 그 노력에 절대적 정론(定論)이 확정되기는 어렵다.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의 규명보다는 공자라는 역사적 실체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가 궁극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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