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편을 만든 사람들
나는 오늘날의 『논어』의 틀이 「미자(微子)」편을 만든 사람들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의 학설을 깊게 공감한다(『孔子傳』, 東京: 中公叢書, p. 273).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자(微子)」편은 분명 『논어』의 상층대에 속하는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장자학풍에 노출된 공문의 사람들에 의하여 꾸며진 이야기들일 것이다. 공자와 자로가 장자가 구현하는 어떤 은자들의 모습 앞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들은 분명 후대의 날조일 것이지만, 그 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삶의 전환, 사상적 대오(大悟)의 계기들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었다. ‘무지의 자각’을 외친 소크라테스가 과연 얼마나 자신의 무지로부터 벗어났는지는 형량키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변증법적 종국이 그의 제자 플라톤의 기술 때문일지는 몰라도 너무 이데아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죽을 때까지 일순간도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려는 호학(好學)의 노력을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었고 과정적이었다. 종국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끊임없는 사상적 비상(飛翔)의 한 차원을 「미자(微子)」는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자의 편집자들은 장자(莊子)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공자상을 극복할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장자류의 은자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고양된 성자 공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비상의 계기를 통해 『논어』는 자유롭게 편집된 것이다. 그래서 보다 생생하고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적인 공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만약 『논어』가 적통임을 주장하는 아성(亞聖) 맹자(孟子) 계열에서 편집되었더라면 훨씬 더 경직되고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서물이 되었을 것이다. 『논어』 속에는 제자백가의 모든 원형이 숨어 있다. 『논어』는 결코 유교만의 성전이 아닌 것이다.
장자(莊子)가 희화하고 있는 공자의 모습은 공자의 본래모습이 아니라 바로 맹자계열에 의하여 도덕주의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공자에 대한 모멸감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장자가 말하는 모든 논리는 노자를 원형으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살아있는 공자의 원래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본시 유(儒)ㆍ도(道)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장자(莊子)』의 자유분방한 설화문학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공자의 살아있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 젊은 시절에 주(周)나라의 수도 낙양(洛陽, 루어양, Luo-yang)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다하는 이야기도, 그 노자(老子)가 오늘날의 『도덕경』의 저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자사상에는 이미 도가적(道家的) 본질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仁)이나 노자의 수(水)나 유(柔)가 모두 유교 이전의 유(儒)의 내면적 특질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이야기나 『장자(莊子)』의 이야기를 우리는 같은 평면에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이해의 한 지평이다. 공구(孔丘, 콩 치우, Kong Qiu)가 말하는 인(仁)의 궁극적 경지나 장주(莊周, 주앙 저우, Zhuang Zhou)가 말하는 좌망(坐忘)이나 현해(縣解, 懸解)를 모두 그 깊은 내면에서 상통하는 가치로서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곽점(郭店, 꾸어띠엔, Guo-dian) 초묘죽간(楚墓竹簡)의 출현은 『노자(老子)』라는 텍스트에 관한 BC 300년 이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외로, 14편에 달하는 방대한 유교전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어 우리에게 연구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 14편 중의 한 편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예기』의 「치의(緇衣)」라는 사실이 우선 눈에 띈다. 장수(章數), 장서(章序), 문자(文字) 상에 출입이 있지만 현존하는 「치의」의 고본형태가 확실하다. 오늘날 이 14편의 성격이 대강 『예기』의 저본이 된 고문(古文) 『기(記)』 131편【『한서』 「예문지」에 공자의 70제자의 후학들이 기록한 것으로 책 제목이 실려있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그 일부는 자사(子思)학파 계열의 저작이 분명하다고 주장되고 있다. 하여튼 곽점초간의 출현으로, 『예기』가 한대에 성립한 것이라는 의고풍적 통념은 통용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것들이 『예기』의 원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예기』를 구성하는 담론들이 이미 BC 4세기에 문헌으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 사후 공자학단에서 전파되어 나간 사상이 매우 활발하게 토론되고 기술되고 있었던 전국시대의 발랄한 사상풍토가 매우 생생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곽점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어총3』에 현행 『논어』의 두 구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논어』의 편집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논어』를 구성하는 공자의 말씀자료【복음서로 말하자면 ‘로기온자료’】들이 BC 4세기에는 이미 기록되어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할 수도 있다. 『논어』의 ‘어(語)’는 살아있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의 로기온이다. ‘논(論)’이란 「예문지」의 표현대로 ‘로기온들을 수집하여 논란을 거처 편찬한 것[輯而論纂]’이다. 그러니까 불교경전에 비추어 말하자면 ‘논’은 ‘결집’을 뜻하는 것이다. 일부 성급한 주장처럼 ‘논(결집)’의 시기를 함부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로기온자료)’는 상당히 오랜 시간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73년에는 하남성 정주(定州, 띵저우, Ding-zhou)에 있는 서한(西漢) 중산회왕(中山懷王) 유수(劉脩, 리우 시우, Liu Xiu)의 무덤에서 『논어』 죽간이 발견되었다. BC 54년 이전의 초본(抄本)이며 『장후론』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문헌이다. 이 정주한묘죽간본 『논어』는 『장후론』과는 또 다른 노론 계열의 판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單承彬, “定州漢墓竹簡本論語爲魯論考,” 『韓民族語文學』 제36집】.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공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인 대답을 제공하는 전기문학서로서 우리는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논구하였다. 그러나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속에도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총체적 상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질 않다. 공자의 삶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 공자가 노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장면. 한(漢)대의 무량사(武梁祠) 석각(石刻)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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