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전기사상과 후기사상
공자의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것처럼 14년 유랑을 전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사상의 틀의 대부분은 망명생활이 끝난 후, 대강 68세부터 73세까지 4ㆍ5년에 걸친 말년의 생각이 그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에는 천(天)과 명(命), 인간의 종교적 심성, 그리고 감관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나 포용이 깃들어 있다. 그 모든 것은 『논어』 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공자는 죽을 때, 자신이 은나라 후예의 사람임을 확인하고 죽었다.
관을 안치할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은나라 사람들은 양쪽 기둥 사이에 안치한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 나는 양쪽기둥에 앉아 사람들이 분향을 하고 제삿밥을 올리는 것을 받았다. 나는 역시 은나라 사람이다. 이제 곧 나는 죽을 것이다(의역).
夏后氏殯於東階之上, 則猶在阼也; 殷人殯於兩楹之間, 則與賓主夾之也; 周人殯於西階之上, 則猶賓之也. 而丘也殷人也. 予疇昔之夜, 夢坐奠於兩楹之閒. 夫明王不興, 而天下其孰能宗予. 予殆将死也. 『禮記』 「檀弓上」
귀로(歸魯) 후 얼마 안 있어 아들 백어(伯魚)가 죽었다. 그리고 또 가장 총애하던 수제자 안회(顔回)가 죽었다. 그리고 평생의 반려 자로(子路)가 죽었다. 공자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현묘한 세계로 떠나보냈다. 안회는 초기 제자 안로(顏路, 옌 루, Yan Lu)의 아들이었다. 안로는 자로보다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안로는 바로 곡부성내 공자 모친이 살았던 동네의 사람이었다. 공자의 집에서 엎드리면 코닿을 곳에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안회는 어린 시절부터 공자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안회는 공자의 그늘 속에서 태어났고, 공자의 훈도 속에서 성장했고, 어린 나이에 공자슬하에 입문하여 삼천제자 중에서 학덕(學德)으로는 비견할 자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안회의 아버지 안로는 매우 무능하고 지더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안회는 빈천한 환경 속에서 컸다. 안회는 체질적으로 빈천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안회는 평생을 빈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장기가 빈천했고, 문하생(門下生)이 된 후로는 고난의 장정을 줄곧 같이 했고, 그리고는 곧 죽었기 때문이다. 안회가 요절한 것도【공자의 관념 속에서 요절한 것이지 실제로는 40세경까지 살았으니 그다지 요절도 아니다】, 14년의 유랑기간 동안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자로가 한 사발을 먹을 때, 안회는 주먹밥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진ㆍ채에 갇혀 모두 굶주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陳蔡之厄]. 매우 구슬픈 정경이 하나 『논형(論衡)』 「지실(知實)」 4편에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공자를 위하여 밥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 먼지가 한웅큼 푹 떨어졌다. 밥을 다시 지을 수도 없는 일, 안회는 안절부절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지은 귀한 밥을 내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안회는 생각타 못해 먼지 떨어진 부분의 밥을 떠서 자신이 먹어버렸다. 이때 공자는 멀리서 바라보고는 내심 안회가 배가 고파서 남몰래 밥을 먼저 훔쳐먹는 것으로 생각했다[孔子望見以爲竊食]. 안연이 밥을 다 지어 공자에게 정성스럽게 들고 왔을 때, 공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먹는 것은 청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공자가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자기가 먼지떨어진 부분을 먹어치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공자는 오해임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얼마나 인간적인 정경인가? 공자도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사랑하는 제자가 밥을 훔쳐 먹는다고 고깝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안회는 영양실조에, 요즈음 말로는 암(癌) 같은 것으로 죽었을 것이다. 자로는 공자말을 뒤받기가 일쑤였다. 안회는 단 한 번도 공자의 말씀대로 실천 안한 바가 없고, 공자에게 단 한 번도 거역의 언행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리고 공자도 안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러니 안회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암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를 편애했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총애의 도수는 지나치다. 그리고 안회가 죽은 후 공자가 몇 년을 못 살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논어』 전편을 통해 죽은 안회에 대한 공자의 회상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논어』가 공자의 지긋한 말년의 언행의 모음집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공자의 안회에 대한 편애의 그림자에는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니산의 꽃동산에서 공자를 키웠던 엄마 안씨녀의 잔상이 겹쳐있을지도 모른다. 공자 17세 때 상여가마를 어깨에 메어야만 했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안회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고 고요한 인품 속에 잔잔히 비쳐있었을 것이다. 안회는 두말 할 나위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안회의 죽음은 곧 공자의 인(仁)의 사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의 적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학문은 안회와 더불어 죽고, 공자라는 인간은 자로와 더불어 죽은 것이다. 결국 공자는 현세(現世)에 세속적으로 남긴 바가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변신되는 그러한 과정이 일체 없다. 공자와 더불어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다. 향후의 모든 출발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그것이 곧 공자의 축복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논어』를 보다 잡하고 보다 생생하고 보다 여백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공자의 삶은 미완성교향곡이었다.
나는 『논어』를 선(禪)이라고 생각한다. 유생들은 또 이게 뭔 망발이냐고 다그칠지 모르겠으나 선(禪)이란 본시 언어가 단절되는 곳에서 피어나는 모든 깨달음의 통칭이다. 인과적 고리가 단절되는 절대적 경지에로의 도약인 것이다. 아사노류의 모든 공자이해가 공자를 고정된 실체로 규정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공자의 삶은 끊임없이 유동적인 호학(好學)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일체의 규정성을 거부한다. 그 거부야말로 인류의 가장 지혜로운 인문학의 출발인 것이다. 대승불학이 당초로부터 중국언어의 외투를 빌렸기 때문에, 격의(格義) 불교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격의의 종국이 선이었다고 한다면, 그 선의 원형, 그 조형은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문명에 내재하는 것이다. 중국언어에 심재(深在)하는 것이요, 중국마음(Chinese Mind)에 고유한 것이다.
그 중국마음의 조형이 곧 『논어』라는 서물이다. 『논어』는 『맹자』와 같이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논어』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경구일 뿐이다. 그것은 계발의 단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노년의 공자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현실에 대한 긴박한 기대감이 없이, 긴박한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환상이 없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타인의 계발(Enlightenment)을 위하여 툭 툭 던졌다. 『논어』는 논쟁이 아니요, 계발이다. 그것은 무한한 논리의 시작이요 끝이다. 『논어』는 선사들의 말장난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더 일상적으로 인간을 대각으로 인도하는 선어(禪語)인 것이다. 나는 말한다. 논어는 선이다. 정자(程子, 츠엉쯔, Cheng Zi)의 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요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을 모른다. 『논어』을 읽으매, 읽기 전에 ‘이런 놈’이었는데, 읽은 후에도 ‘이런 놈’일 뿐이라면, 그 놈은 전혀 『논어』를 읽은 자가 아니다.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논어』는 선이다. 『논어』는 그냥 읽으면 아니 된다. 바울이 말한 바대로, 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로마서」 12:2) 변화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논어』는 트랜스포메이션인 것이다. 읽기 전에도 이놈이고 읽은 후에도 이놈이라면 전혀 트랜스포메이션이 없는 것이다. 『논어』는 재즈요, 선이요, 대각이다.
정자의 말에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논어를 읽으매, 어떤 자는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과도 같다. 어떤 자는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또 어떤 자는 읽고 나서 참으로 배움을 즐기는 경지에 오르는 자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기뻐 발을 구르는 자도 있다.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수지무지족지도지(手之舞之足之蹈之, 출전은 『예기』 「악기」)’, 이것은 선의 엑스타시(ecstacy, 황홀감)요, 깨달음의 환희다. 이제 지적 희열에로의 기나긴 여행을 시작해보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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