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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흠정헌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흠정헌법)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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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자체에 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 직후부터 곧바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 노선은 일본 사회 전체가 동의한 게 아니었다. 저항의 가능성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메이지 유신의 기본적인 성격에 내재해 있었다. ‘위로부터였으므로 민중의 권익을 위한 게 아니었다. 또한 근대화였으므로 전통적인 기득권층이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민중의 거센 저항과 상인, 지주층의 반발을 샀으며, 때로는 그 두 가지가 결합된 도전을 받았다.

 

민중 세력의 성장에 힘입어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인층과 정치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근대화의 이념에 동의했으나 방향은 정부와 반대로 아래로터의 근대화를 지향했다. 1870년대부터 자유주의자들은 신문을 창간해 근대적인 언론을 선도했으며, 정부가 근대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열어놓은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이용해 각종 결사를 이루고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다. 1875년에 그들은 오사카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열고 아이고쿠샤(愛國社)라는 정치 단체를 결성했다. 5년 뒤인 1880년에는 대규모 대중 집회를 통해 천황에게 국회 창설을 청원했다.

 

국회라면 반드시 필요한 게 정당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당(自由黨)을 설립하고 강령도 확정했다. 뒤이어 오사카에서는 입헌정당(立憲政黨), 규슈에서는 개진당(改進黨)이 창당되었다. 이 무렵 일본 서부 지역에서 자유주의 운동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정부도 자유주의 운동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정부는 근대화에 일로매진해야 할 시기에 예기치 않게 뒷덜미를 잡혔다고 판단했지만, 거센 압력에 한 걸음 물러나 국회 창설을 약속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정부는 10년 뒤인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겠다면서 그때까지 국가의 안녕을 저해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국회 개설에 필요한 헌법을 천황이 제정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국회 개설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의 약속에 흥분한 자유주의자들이 그 점을 소홀히 한 것은 이후 일본의 정치사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모네의 일본풍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일본은 동양의 떠오르는 별로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덕분에 중국 문화와 아울러 일본 문화도 동양을 대표하는 문화로 소개되었다. 그림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모네가 1876년에 그린 일본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자기 아내를 모델로 했지만 일본 화가가 그렸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 일본풍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일찍부터 일본의 제국주의화를 경계했다. 이들은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처럼) 서구 열강에는 군말 없이 복종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이웃 나라들에는 침략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유신 정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했다. 그들은 오히려 동북아시아의 이웃들과 연대해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동양 연대는 이후 군국주의 정부에 차용되어 이른바 대동아공영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정부는 헌법 제정을 약속하면서도 자유주의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직 토대가 취약한 자유주의 세력은 정부가 응징으로 돌아서자 불과 몇 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일부 급진적인 세력은 자신들의 궁극적 기반인 민중 속으로 들어가 각지에서 민중 봉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일본의 정치 무대에서 두 번 다시 조연으로도 복귀하지 못했다.

 

그래도 유신 정부는 국회를 열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사실 헌법 제정권을 확보한 정부로서는 굳이 그 약속을 어길 필요도 없었다. 더구나 당시 유럽에는 헌법이 왕권을 강화해준 좋은 선례도 있었다. 1852년의 프랑스 헌법은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를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1867년 독일의 제국헌법은 의회를 프로이센 황제의 거수기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헌법 같지 않은 헌법에도 이름이 있어 흠정헌법(欽定憲法)이라고 하지 않는가흠정헌법이란 독일어의 Oktroyierte Verfassung을 일본에서 번역한 용어인데, 번역 과정에서 어감이 사뭇 달라졌다. 독일어의 원래 뜻은 부과된 헌법혹은 강요된 헌법이다. 그에 비해 흠정헌법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한 헌법이라는 뜻이다. 용어의 번역에서도 유신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신 초기부터 참여해 핵심의 위치에까지 오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주도로 헌법 초안을 작성한 지 몇 년 만에 드디어 1889년에 공표된 대일본제국헌법은 바로 서구식 흠정헌법의 완벽한 모방이었다.

 

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1),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 받지 않는다.”(3)와 같은 조항들에서 알 수 있듯이, 새 헌법은 민주주의는커녕 오히려 천황 독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헌법에 따라 내각(행정부), 제국의회(입법부), 재판소(사법부)가 신설되었지만, 형식적인 의미에 불과할 뿐 모든 것은 사실상 천황(유신 정부)의 통치를 돕는 일종의 분업적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헌법 제정과 더불어 일본 특유의 천황제는 근대적 법 개념으로 장식되고 법적 근거까지 가지게 되었다. 천황이 절대적이고 신성한 존재라는 것은 서구의 절대왕정과도 크게 다른 관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적 제정일치와도 유사하다. 헌법이란 민주주의의 법제화인데, 천황 독재를 정당화한다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이것도 일본식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원칙일까? 하기는, 20세기 대한민국의 유신 정권은 독재를 민주주의의 토착화로 미화했다.

 

 

헌법 반포식 메이지 천황이 대일본 제국헌법을 반포하고 있다. ‘헌법이라는 이름이 일본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7세기 쇼토쿠 태자의 헌법 17조인데, 당시에는 중국의 율령을 모방했으나 이번에는 서구의 흠정헌법을 모방했으니 더욱 개악된 셈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300년 만의 재도전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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