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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아신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아신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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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세출의 정복군주

 

 

비록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일찍 왕위를 승계하긴 했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 ~384)은 이미 16년 동안의 태자 시절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후각을 체득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용맹했으나 경솔했고 투지만큼 지혜가 따라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연나라의 힘을 얕보았고 백제는 더욱 무시했다. 그러나 직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전연, 백제, 고구려의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였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약해진 위상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전연이 전진에게 몰락한 것은 고구려에게 일단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새로운 사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게 위기인지 기회인지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판이 엄청난 화를 부른다는 사실은 이미 비운의 아버지가 온몸으로 입증한 바 있다. 화북의 어지러운 정세는 바야흐로 소수림왕에게 정확한 노선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즉위하고 나서 6개월 동안 심사숙고한 결과 그는 정답을 찾아낸다. 우선 전연(前燕)에게 패한 고구려와 전연을 물리친 전진(前秦)의 힘을 비교하는 건 지극히 쉽다. 다만 화북의 여러 나라들은 워낙 신진대사가 빨라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전진과는 친교를 맺어두는 편이 훨씬 낫다. 마침 공동의 적인 전연이 사라졌으니 두 나라가 화친할 만한 분위기도 좋다. 이때 태도를 분명히 결정하지 않으면 전진은 고구려의 태도를 오해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전연은 명패를 내렸어도 아직 모용씨의 잔당은 랴오시와 랴오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꺼진 불씨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수림왕(小獸林王)372년 전진에서 파견한 승려 순도(順道)를 환영하고 그가 가져온 불상과 불경을 널리 보급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순간이다. 나아가 소수림왕은 전진의 제도를 본받아 대학(大學)이라는 국립학교를 세우는데, 이것은 한반도 최초의 공식 교육기관이 된다. 이 두 가지 혁신으로 고구려와 한반도의 문명은 중국 문명과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것만 해도 불과 14년에 그친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을 빛나게 만든 큰 변화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이 또 한 가지 있다. 소수림왕의 북방 외교는 장차 고구려와 한반도 역사를 결정지을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다. 대중국 관계가 정비되었으니 이제 고구려는 전력을 기울여 백제 정벌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장수왕(長壽王)이 추진하는 남진정책(南進政策)의 기본 골조가 형성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외교가 마무리되자마자 곧바로 백제에 대한 공략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백제 정벌의 토대를 놓은 데 만족하고 실제의 성과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소수림왕 시절에 고구려는 전진에게 랴오둥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했던 듯하고 전진은 아마 그것을 양해하기로 했던 듯하다(전진은 중국의 대권을 노리는 후보였으므로 후방의 문제는 친교를 맺은 고구려에게 일임하는 게 마음이 편했을 터이다),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죽은 탓에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1)은 즉위하자마자 즉각 대군을 조직하여 랴오둥의 모용씨 잔당에 대한 토벌 작전에 나섰다. 비록 전연은 사라지고 없지만 어쨌든 고구려는 랴오둥의 선비족에게 단단히 화풀이를 한 것으로 전연에 진 빚을 다소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첨단의 불교 지금은 불교라고 하면 누구나 오랜 역사와 유구한 전통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시절에 불교는 첨단의 종교이자 문화였다. 사진은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도입된 지 10년 뒤인 381년에 지어진 강화도의 전등사다. 아도라는 고구려 승려가 지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이후 신라에 불교를 전하는 묵호자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북방의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자 이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행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 이후 70여 년 만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남쪽이다. 여유가 생겼으니 전과 달리 전

투에 급급하지 않고 큰 전략부터 구상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먼저 신라를 백제에게서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일에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사신을 보내 핍박하는 것으로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백제와의 인연을 끊겠다고 서약한 것이다사실 백제 비류왕(比流王)이 신라와 화친을 맺을 때도 신라의 힘에 의지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다. 고이왕(古爾王) 때도 백제는 혼자 힘으로 대방과 낙랑 남부를 장악했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역시 신라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고구려를 무찔렀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 지속적인 동맹을 맺으려 했다기보다는 고구려 공격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의 사소한 분쟁을 중단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두 나라가 정식으로 동맹을 맺게 되는 때는 장수왕(長壽王)이 남진 드라이브를 거는 433년이다). 이렇듯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아직 신라는 거의 실질적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할 만큼 힘이 약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외교적 수단으로 신라를 복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품었다면 사신 대신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백제 공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복속시킨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그 해(391)에 죽는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치적이 효력을 발휘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5년 전에 그가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 담덕(談德)이 열일곱 살로 자라나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담덕, 그가 바로 불세출의 정복군주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이다.

 

1880년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 부근에서 한 거대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우리는 광개토왕이 왜 그렇게 거창한 묘호(廟號)묘호란 왕이 죽은 다음에 붙이는 시호(諡號)를 가리킨다(시호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필요하므로 왕만이 아니라 귀족이나 관료들도 죽은 뒤에는 시호가 정해진다). 역사에서는 편의상 고대의 왕들을 시호로 부르지만, 실상 그것은 왕이 죽은 뒤에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그 왕들이 재위하던 시대에는 왕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를테면 광개토왕은 아마 담덕왕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참고로, ()이나 조()로 끝나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도 모두 묘호이므로 재위하던 때에 불렸던 이름이 아니다를 받았는지(‘광개토란 영토를 크게 개척했다는 뜻이다), 또 영락(永樂)이라는 호방한 연호를 제정했는지(그 전에도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 역사상 알려진 최초의 연호는 영락이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존재를 몰랐던 아울러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던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한 기사가 불과 한 쪽에 그칠 만큼 대단히 약소하다. 사실 그 비석은 높이 6미터가 넘는 것이었으니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만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어느 왕조도 압록강 바로 북쪽에 있는 지안까지 영토로 삼지 못했기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다(조선의 세종 때 오늘날의 국경에 해당하는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으나 그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17세기부터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가 자신들의 고향을 성지로 만들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는 바람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더욱더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오래 전부터 그 비석에 관해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조사가 없었으므로 한동안은 심지어 그것을 청나라 시조의 비석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덕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무려 1500년이나 지나서야 마땅한 평가를 받게 되지만, 어쨌든 묘호에 가장 어울리는 정복군주임에는 틀림없다. ‘광개토를 향한 그의 첫번째 사업은 단연 백제를 정벌하는 일이다. 광개토왕의 어깨에 걸린 아버지(고국양왕)와 큰아버지(소수림왕)의 야망, 할아버지(고국원왕)의 복수는 모두 백제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약관의 젊은 나이인 광개토왕에게 그 어깨 위의 짐은 부담이 아니라 추동력이다. 즉위 이듬해에 그는 백제의 북변을 공략해서 황해도 일대를 수복한다. 특히 강화도의 관미성을 함락시킨 것은 후속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가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예성강 전선에서 도전해봤지만 해안 일대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건 전략상의 미스를 넘어 자살 행위였다. 여기서 백제는 무려 8천 명이나 전사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백제의 반격을 손쉽게 제압한 광개토왕(廣開土王)396년에 2차 정벌을 계획하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수군이 동원된다.

 

수군을 이용한다는 발상은 그 전까지 서쪽의 중국과도, 남쪽의 백제와도 늘 육군으로만 싸워왔던 고구려로서도 처음 구사하는 전술이었으니 당하는 백제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비록 함선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력 수송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하는 정도였긴 하지만, 광개토왕은 강화도에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의 전략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이른 인천 상륙작전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낭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인 위례성을 유린당하고 광개토왕 앞에서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을 서약하는 치욕까지 겪는다.

 

비록 아신왕을 백제판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까지 만들지는 못했지만 광개토왕(廣開土王)으로서는 3대째 묵은 빚을 후련하게 갚았다. 항복한 적장을 죽일 수는 없는 일, 그는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가는 선에서 백제 정벌을 마무리짓는다. 신라를 복속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았다면, 이것으로 고구려는 사실상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오늘날 우리는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 때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만약 광개토왕이 삼국통일을 이루었더라면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의 역사도 달라졌을 테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토도 더욱 넓어졌으리라는 것이다(신채호나 함석헌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오늘의 관점일 뿐이다. 굳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말하자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사실 삼국통일을 이룬 셈이다. 백제와 신라는 모두 고구려를 상국으로 받드는 처지가 되었으니 굳이 더 이상 정벌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의 관점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것을 과제로 설정할 이유가 없었다. 광개토왕은 두 나라를 제후국쯤으로 여기고 제압하는 선에서 만족했을 것이며, 당시의 정황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만주에서 한반도 남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단일한 정치 체제로 아우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점에서도 고구려는 한반도형 왕국이라기보다 중국형 제국에 가까웠다?

 

 

광개토왕과 주몽에 관한 오해 정복군주라는 위명 때문인지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해서는 흔히 중국을 위협한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가 영웅이라는 데는 토를 달 필요가 없겠지만, 사실 그는 대중국 전선에 대해서는 랴오둥의 소유를 승인받는 정도로 만족했을 뿐이고 한반도 남쪽 경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진은 광개토왕릉비 첫 부분의 탁본인데, 오른쪽 상단에 고구려의 건국자를 주몽(朱蒙)이 아니라 추모(鄒牟)’라고 새긴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비운의 왕

불세출의 정복군주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믿을 건 외교뿐

뭉쳐야 산다

백제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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