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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2부 화려한 분열, 3장 뒤얽히는 삼국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2부 화려한 분열, 3장 뒤얽히는 삼국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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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뒤얽히는 삼국

 

 

비운의 왕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백제의 최전성기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시대였다. 이 무렵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와의 해묵은 불화를 해소했고, 북쪽으로는 강국 고구려와의 실력 대결에서 승리했다. 게다가 서쪽 바다 건너로는, 비록 통일제국의 지위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중국의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동진과 수교했고, 남쪽 바다 건너로는 일본과도 친교를 맺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강대국의 면모다. 형세가 유리할 때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건 바둑만이 아니다.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것은 판을 닦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였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한반도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는 말은 일찌감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애초부터 고구려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로서는 고이왕(古爾王) 시절에 손에 넣은 옛 대방의 땅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3세기 후반에 고이왕은 대방과 낙랑을 공략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313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은 고구려만의 힘으로 이룬 성과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낙랑이 무너진 뒤 무주공산이 된 이 지역을 백제가 고구려와 반분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처사며 정당한 권리 행사였다. 적어도 근초고왕의 생각은 그랬다.

 

물론 고구려의 생각은 달랐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한반도를 위협하는 한나라의 군현들과 싸워왔고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낙랑을 완전히 반도에서 몰아냈다. 따라서 백제의 대방 침략은 좋게 말해 어부지리(漁父之利)였고 나쁘게 말하면 무임승차였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전략이지만 고구려가 볼 때는 비열한 술책이며 인륜을 배반한 행위였다. 더구나 백제가 애시당초 고구려에서 갈라져나간 형제국임을 고려할 때 백제의 행위는 천륜을 배반한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생각은 그랬다.

 

이렇게 같은 상황을 두고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고국원왕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결국 양측이 자신의 판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전쟁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고국원왕은 진작부터 백제를 응징하고 싶었다. 그는 낙랑을 멸망시킨 이듬해, 미천왕(美川王)의 태자였던 시절에 이미 백제의 영향권이 되어 있던 대방을 공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369년까지 후속 조치를 미룰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주변 상황, 즉 중국의 변동 때문이었다.

 

 

317년 한족의 진나라가 강남으로 옮겨가서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된다. 이른바 5(五胡)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인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데, 그 중 고구려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다. 봉상왕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그들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는 아예 연나라를 세워 중원을 노리는 공식 대권후보로 등록한다. 옛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것을 전연(前燕)이라 부른다(옛 왕조의 이름을 따는 경우는 중국 역사에서 대단히 흔한데, 전연이라 이름지은 이유는 나중에 후연이 생기기 때문이다). 랴오시의 차오양(朝陽)을 수도로 삼아 전연을 세운 모용씨 세력은 당연히 랴오둥까지 진출한 고구려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 이 지역에서 일어선 중국의 모든 나라가 그랬듯이 모름지기 대권을 노리기 위해서는 후방에 해당하는 고구려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낌새를 알아챈 고국원왕(故國原王)340년에 전연에 사신을 보내 친교를 꾀하고자 했으나 전연의 방침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국 342년에 전연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이끄는 55천의 공격군과 고국원왕이 이끄는 5만여 명의 수비군은 랴오둥의 패권을 놓고 대회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병력의 규모로 보면 엇비슷했으므로 승부는 전략에서 판가름날 것이었다. 불행히도 고국원왕은 투지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전략에서 중대한 미스를 범한다. 랴오시와 랴오둥 사이에는 남과 북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보면 넓은 북쪽 길에 대병력을 배치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수비하는 고구려가 그 상식을 따른 데 반해 공격하는 연나라는 그 상식의 허를 찔렀다는 점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거의 전 병력에 해당하는 5만을 동생에게 주어 북쪽을 막게 하고 자신은 소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을 막으려 했지만, 모용황은 거꾸로 북쪽에서 15천의 병력으로 응전하게 하고 남쪽으로 주력군 4만을 보냈다. 남과 북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에서 고구려는 종합전적 11패를 올렸으나 전쟁은 무승부가 아니었다. 북쪽에서 고구려의 대군이 전연의 소군을 물리치고 있는 동안 남쪽으로 온 전연의 본군은 수도인 환도성을 유린하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포로로 잡아간 것이다. 더욱이 고국원왕으로서 통탄할 만한 사실은 그들이 아버지 미천왕(美川王)의 시신마저 파헤쳐 갔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원왕은 몇 년에 걸친 협상의 결과로 산 가족과 죽은 가족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전연을 상국으로 받들고 모용황의 아들 모용준(慕容儁)에게서 장군과 자사의 벼슬을 받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분노에 찬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목표는 한 가지, 어서 힘을 키워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을 갚는 것뿐이다. 그럼 어떻게 힘을 키울까? 바로 한반도 남쪽의 백제를 공략하는 것이다. 적어도 낙랑과 대방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연나라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369년 백제를 침공한 것은 바로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어지러운 대륙의 정세는 그 무렵 또 한 번 큰 격변을 일으킨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정의와 분노의 칼을 받아야 할 전연이 370년에 서쪽에서 일어난 진(, 전진)에게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고국원왕의 심정은 허탈해졌지만 문제는 간단해졌다. 이제 개인적 분노의 대상이자 국가적 노선은 백제라는 하나의 타깃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아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이 전사하는 비극이었다.

 

 

연나라와의 악연 한나라가 무너지고 나서 중국은 400년에 가까운 오랜 분열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한반도 삼국이 팽창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고구려는 지정학적 위치상 분열시대에 중국 동북 방면 왕조들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는 주문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의 숙적은 분열기마다 늘 부활하는 연나라였다.

 

 

불세출의 정복군주

 

 

비록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일찍 왕위를 승계하긴 했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 ~384)은 이미 16년 동안의 태자 시절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후각을 체득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용맹했으나 경솔했고 투지만큼 지혜가 따라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연나라의 힘을 얕보았고 백제는 더욱 무시했다. 그러나 직접 뚜껑을 열어본 결과 전연, 백제, 고구려의 삼국 중 가장 약한 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였다.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약해진 위상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전연이 전진에게 몰락한 것은 고구려에게 일단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새로운 사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게 위기인지 기회인지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판이 엄청난 화를 부른다는 사실은 이미 비운의 아버지가 온몸으로 입증한 바 있다. 화북의 어지러운 정세는 바야흐로 소수림왕에게 정확한 노선을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즉위하고 나서 6개월 동안 심사숙고한 결과 그는 정답을 찾아낸다. 우선 전연(前燕)에게 패한 고구려와 전연을 물리친 전진(前秦)의 힘을 비교하는 건 지극히 쉽다. 다만 화북의 여러 나라들은 워낙 신진대사가 빨라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전진과는 친교를 맺어두는 편이 훨씬 낫다. 마침 공동의 적인 전연이 사라졌으니 두 나라가 화친할 만한 분위기도 좋다. 이때 태도를 분명히 결정하지 않으면 전진은 고구려의 태도를 오해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전연은 명패를 내렸어도 아직 모용씨의 잔당은 랴오시와 랴오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칫 꺼진 불씨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수림왕(小獸林王)372년 전진에서 파견한 승려 순도(順道)를 환영하고 그가 가져온 불상과 불경을 널리 보급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순간이다. 나아가 소수림왕은 전진의 제도를 본받아 대학(大學)이라는 국립학교를 세우는데, 이것은 한반도 최초의 공식 교육기관이 된다. 이 두 가지 혁신으로 고구려와 한반도의 문명은 중국 문명과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것만 해도 불과 14년에 그친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을 빛나게 만든 큰 변화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이 또 한 가지 있다. 소수림왕의 북방 외교는 장차 고구려와 한반도 역사를 결정지을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다. 대중국 관계가 정비되었으니 이제 고구려는 전력을 기울여 백제 정벌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장수왕(長壽王)이 추진하는 남진정책(南進政策)의 기본 골조가 형성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외교가 마무리되자마자 곧바로 백제에 대한 공략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백제 정벌의 토대를 놓은 데 만족하고 실제의 성과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소수림왕 시절에 고구려는 전진에게 랴오둥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했던 듯하고 전진은 아마 그것을 양해하기로 했던 듯하다(전진은 중국의 대권을 노리는 후보였으므로 후방의 문제는 친교를 맺은 고구려에게 일임하는 게 마음이 편했을 터이다),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죽은 탓에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384~391)은 즉위하자마자 즉각 대군을 조직하여 랴오둥의 모용씨 잔당에 대한 토벌 작전에 나섰다. 비록 전연은 사라지고 없지만 어쨌든 고구려는 랴오둥의 선비족에게 단단히 화풀이를 한 것으로 전연에 진 빚을 다소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첨단의 불교 지금은 불교라고 하면 누구나 오랜 역사와 유구한 전통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소수림왕(小獸林王) 시절에 불교는 첨단의 종교이자 문화였다. 사진은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도입된 지 10년 뒤인 381년에 지어진 강화도의 전등사다. 아도라는 고구려 승려가 지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이후 신라에 불교를 전하는 묵호자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북방의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자 이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행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 이후 70여 년 만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남쪽이다. 여유가 생겼으니 전과 달리 전

투에 급급하지 않고 큰 전략부터 구상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먼저 신라를 백제에게서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일에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사신을 보내 핍박하는 것으로 신라의 내물왕(奈勿王)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백제와의 인연을 끊겠다고 서약한 것이다사실 백제 비류왕(比流王)이 신라와 화친을 맺을 때도 신라의 힘에 의지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다. 고이왕(古爾王) 때도 백제는 혼자 힘으로 대방과 낙랑 남부를 장악했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역시 신라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고구려를 무찔렀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 지속적인 동맹을 맺으려 했다기보다는 고구려 공격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의 사소한 분쟁을 중단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두 나라가 정식으로 동맹을 맺게 되는 때는 장수왕(長壽王)이 남진 드라이브를 거는 433년이다). 이렇듯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아직 신라는 거의 실질적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할 만큼 힘이 약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외교적 수단으로 신라를 복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품었다면 사신 대신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백제 공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복속시킨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그 해(391)에 죽는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치적이 효력을 발휘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5년 전에 그가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 담덕(談德)이 열일곱 살로 자라나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담덕, 그가 바로 불세출의 정복군주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이다.

 

1880년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 부근에서 한 거대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우리는 광개토왕이 왜 그렇게 거창한 묘호(廟號)묘호란 왕이 죽은 다음에 붙이는 시호(諡號)를 가리킨다(시호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필요하므로 왕만이 아니라 귀족이나 관료들도 죽은 뒤에는 시호가 정해진다). 역사에서는 편의상 고대의 왕들을 시호로 부르지만, 실상 그것은 왕이 죽은 뒤에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그 왕들이 재위하던 시대에는 왕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를테면 광개토왕은 아마 담덕왕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참고로, ()이나 조()로 끝나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도 모두 묘호이므로 재위하던 때에 불렸던 이름이 아니다를 받았는지(‘광개토란 영토를 크게 개척했다는 뜻이다), 또 영락(永樂)이라는 호방한 연호를 제정했는지(그 전에도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 역사상 알려진 최초의 연호는 영락이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존재를 몰랐던 아울러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전무했던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한 기사가 불과 한 쪽에 그칠 만큼 대단히 약소하다. 사실 그 비석은 높이 6미터가 넘는 것이었으니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만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어느 왕조도 압록강 바로 북쪽에 있는 지안까지 영토로 삼지 못했기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다(조선의 세종 때 오늘날의 국경에 해당하는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으나 그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17세기부터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가 자신들의 고향을 성지로 만들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는 바람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더욱더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오래 전부터 그 비석에 관해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조사가 없었으므로 한동안은 심지어 그것을 청나라 시조의 비석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덕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무려 1500년이나 지나서야 마땅한 평가를 받게 되지만, 어쨌든 묘호에 가장 어울리는 정복군주임에는 틀림없다. ‘광개토를 향한 그의 첫번째 사업은 단연 백제를 정벌하는 일이다. 광개토왕의 어깨에 걸린 아버지(고국양왕)와 큰아버지(소수림왕)의 야망, 할아버지(고국원왕)의 복수는 모두 백제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약관의 젊은 나이인 광개토왕에게 그 어깨 위의 짐은 부담이 아니라 추동력이다. 즉위 이듬해에 그는 백제의 북변을 공략해서 황해도 일대를 수복한다. 특히 강화도의 관미성을 함락시킨 것은 후속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가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예성강 전선에서 도전해봤지만 해안 일대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건 전략상의 미스를 넘어 자살 행위였다. 여기서 백제는 무려 8천 명이나 전사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백제의 반격을 손쉽게 제압한 광개토왕(廣開土王)396년에 2차 정벌을 계획하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수군이 동원된다.

 

수군을 이용한다는 발상은 그 전까지 서쪽의 중국과도, 남쪽의 백제와도 늘 육군으로만 싸워왔던 고구려로서도 처음 구사하는 전술이었으니 당하는 백제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비록 함선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력 수송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하는 정도였긴 하지만, 광개토왕은 강화도에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의 전략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이른 인천 상륙작전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낭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인 위례성을 유린당하고 광개토왕 앞에서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을 서약하는 치욕까지 겪는다.

 

비록 아신왕을 백제판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까지 만들지는 못했지만 광개토왕(廣開土王)으로서는 3대째 묵은 빚을 후련하게 갚았다. 항복한 적장을 죽일 수는 없는 일, 그는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가는 선에서 백제 정벌을 마무리짓는다. 신라를 복속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았다면, 이것으로 고구려는 사실상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오늘날 우리는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 때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만약 광개토왕이 삼국통일을 이루었더라면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의 역사도 달라졌을 테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토도 더욱 넓어졌으리라는 것이다(신채호나 함석헌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오늘의 관점일 뿐이다. 굳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말하자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사실 삼국통일을 이룬 셈이다. 백제와 신라는 모두 고구려를 상국으로 받드는 처지가 되었으니 굳이 더 이상 정벌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의 관점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것을 과제로 설정할 이유가 없었다. 광개토왕은 두 나라를 제후국쯤으로 여기고 제압하는 선에서 만족했을 것이며, 당시의 정황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만주에서 한반도 남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단일한 정치 체제로 아우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점에서도 고구려는 한반도형 왕국이라기보다 중국형 제국에 가까웠다?

 

 

광개토왕과 주몽에 관한 오해 정복군주라는 위명 때문인지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해서는 흔히 중국을 위협한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가 영웅이라는 데는 토를 달 필요가 없겠지만, 사실 그는 대중국 전선에 대해서는 랴오둥의 소유를 승인받는 정도로 만족했을 뿐이고 한반도 남쪽 경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진은 광개토왕릉비 첫 부분의 탁본인데, 오른쪽 상단에 고구려의 건국자를 주몽(朱蒙)이 아니라 추모(鄒牟)’라고 새긴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

 

 

원래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한반도를 평정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철갑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대와 더불어 탁월한 전략적 감각을 지닌 그가 왜 중국 대륙이라는 넓은 천하를 외면했을까? 여기에는 고구려의 역대 대중국 정책이 반영되어 있다. 이 참에 그때까지 400년간 고구려가 취해온 대외 노선의 변화를 정리해보자.

 

건국 이후 고구려는 우선 생존을 위해 팽창해야 했다. 사방에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압록강변에서 탄생한 약소국 고구려는 팽창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토 확보를 이루어야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몽의 초기 정복사업과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태조왕(太祖王)에 이르기까지 랴오둥 세력과 벌인 다툼은 그 일환이다.

 

중국에서 후한이 무너지고 랴오둥에 공손씨 정권이 성립했을 때 고구려는 생존을 위한 팽창을 넘어 성장을 위한 팽창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래서 방어의 차원이 아니라 공격의 차원에서 랴오둥 서쪽을 넘본다. 하지만 그것은 위나라의 반발을 샀고, 결국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에 호되게 당하면서 고구려는 사실상 중국 진출의 꿈을 접는다(동천왕의 천도는 그것을 말해준다). 이후 고구려는 중국 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서열상의 우위를 인정하는 선에서 화친을 맺고 남쪽 한반도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노선 전환의 결실은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복이었고, 그 후유증은 백제의 반발과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전사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랴오둥이다. 오늘날 중국의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랴오둥은 태조왕(太祖王) 이래 고구려가 관할했지만 중국에게도 고구려에게도 변방이었던 탓으로 완전한 고구려의 영토라고는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랴오허(遼河) 서쪽, 즉 차오양(朝陽)이나 베이징을 중심으로 삼는 중국 왕조가 강성해질 경우에는 고구려가 랴오둥에서 밀려나고 약한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고구려가 랴오둥을 다시 차지하는 식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사라지고 분열기를 맞으면서 랴오둥 주변의 국제 정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임시 통일제국이었던 진나라가 317년에 강남으로 물러가서 동진으로 딴살림을 차린 뒤 화북, 즉 북중국 일대는 중원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제각기 나라를 세우고 패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다. 중국 역사에서 이것은 분열기이지만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팽창기이기도 하다. 한나라 시대 400여 년 동안 정치적 통일하에서 안정을 누림과 동시에 부패해 왔던 중국 문명은 분열기를 통해 팽창과 도약을 향한 계기를 맞는다일찍이 1차 분열기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그랬던 것처럼 중국은 통일제국의 시대보다 분열기에 더 큰 발전을 이룬다. 1차 분열기에 유학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형성되었다면, 2차 분열기에는 이후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균전제(均田制)과거제(科擧制)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2차 분열기를 사이에 둔 두 통일제국, 즉 한나라와 당나라는 얼핏 비슷한 듯 보이지만 실은 커다란 위상 차이가 있다. 한나라는 유학을 공인했을 뿐이지만, 당나라는 균전제를 조세 및 토지제도로 삼고 과거제를 관리 임용제도로 삼아 한층 업그레이드된 유학 제국을 완성한다(한나라는 유학을 공인했어도 그것을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기에 외척과 환관들이 중앙정치를 주름잡는 폐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변화의 초점은 북방 민족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한족 문명권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북중국의 나라들이 랴오둥을 놓고 고구려와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선비족의 모용씨에게 시달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의 중국관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랴오둥의 서쪽까지만 중국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바꿔 말하면 랴오둥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해주는 중국 왕조라면 어느 나라든 기꺼이 서열상의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도였으므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곧바로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그 중국은 30년 전 소수림왕(小獸林王)과 친교를 맺은 전진이 아니라 후(後燕)이었다. 전진에게 멸망당한 모용씨 세력이 권토중래(捲土重來) 끝에 다시 전진을 타도하고 연나라를 부활시킨 것이다. 외교 파트너가 옛 원수로 바뀌었으니 광개토왕도 떨떠름했을 테고 후연의 왕 모용성(慕容盛)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용성은 고구려 사신의 태도가 거만하다는 것을 트집잡아 400년에 고구려 공격에 나선다. 물론 그 배후에 숨은 의도는 랴오둥을 고구려에 할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하게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전직 어깨의 심기를 건드린 셈이 되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후연의 침략을 맞받아쳐서 오히려 랴오허를 건너 차오양 인근까지 공략한다. 고구려 역사상, 아니 한반도 역사상 군대가 랴오허를 넘은 경우는 그게 유일했다. 애초부터 랴오둥 확보만을 목표로 삼았던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힘을 한 번 시위한 다음 곧바로 철군했지만, 후연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거센 역공에 심신상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마음의 충격이 워낙 커서 몸의 충격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이후 후연은 두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모두 실패하면서 407년에 결국 서쪽에서 일어난 새로운 위 나라, 즉 북위(北魏, 물론 원래 이름은 위인데 후대 역사가들이 북위라고 부른 것이다)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북위는 후연과 같은 선비족이었으나 모용씨와는 씨족이 다른 탁발씨(拓跋氏) 정권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성씨만 다른 게 아니어서 북위는 이후 100년 이상 6세기 중반까지 존속하는, 분열기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한 왕조가 된다. 북위가 화북의 패자로 오래 군림하면서 랴오둥은 고구려의 영토로 공인되었고 비로소 고구려의 대중국 노선은 안정을 되찾았다. 따라서 이제 고구려는 모든 국력을 남부 전선에 기울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다음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나타난다.

 

 

 

 

믿을 건 외교뿐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라고 하면 대뜸 장수왕(長壽王)이 떠오르지만 앞서 본 것처럼 고구려가 남쪽의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한 시기는 상당히 오래다. 일찍이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랴오둥과 낙랑을 함께 공략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처음부터 서쪽의 랴오둥만이 아니라 남쪽의 한반도도 전혀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랴오둥이 생존에 필수적인 비타민이라면 한반도는 고구려의 성장을 돕는 단백질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늘 중국쪽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고, 남쪽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낙랑이 멸망하면서 백제와 접경하고, 백제와 신라가 제법 살집이 붙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남쪽을 향한 고구려의 시선은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이래 고구려가 아직 불안정한 정세에서도 남행길을 서두른 것은 남쪽이 그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남쪽은 고구려에게 결코 따뜻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긴 했지만.

 

고국원왕 때 백제에게서 따뜻하기는커녕 뜨거운 맛을 본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중국 관계를 안정시키면서 남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고구려의 그런 낌새를 알아챈 남쪽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구려가 압박 전술로 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 이에 대해 백제와 신라의 두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정이 다른 만큼 두 나라의 해법은 다르다.

 

 

 

 

백제가 선택한 방법은 동맹을 구하는 것이었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평생 씻지 못할 수모를 당한 아신왕(阿莘王)은 차라리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처럼 전장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았으니 광개토왕 앞에서 맹세한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백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도움을 얻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동쪽을 돌아보지만 비류왕(比流王) 시절에 느슨한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이미 고구려에게 붙어 있다.

 

고민하는 아신왕에게 유력한 동맹자로 중국의 동진이 떠오른다. 아닌 게 아니라 동진과의 관계는 각별한 데가 있다. 379년에 할아버지 근구수왕(近仇首王, 재위 375~384)이 처음 인사를 텄고 아버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때는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가 와서 백제에 처음으로 당대의 첨단 문명인 불교를 전했다. 이때가 384, 고구려보다 12년 늦었지만 고구려는 북중국의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입한 데 비해 백제는 그와 별도로 남중국 동진의 불교를 수입한 만큼 고구려에 뒤질 게 없다. 더욱이 당시 극동의 불교는 호국불교였으므로 국가 종교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고구려에서나 백제에서나 불교가 처음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었던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다불교의 발생지는 인도였으나 기원전 2세기에 마우리아 제국이 붕괴한 이래 인도는 오히려 전통적인 힌두교로 복귀했고 불교는 동쪽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런데 불교를 수용하는 데서도 그 전부터 정치적 편제가 확고한 동북아시아와 그렇지 못한 동남아시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소승불교 계열이 전래된 동남아시아에 비해 대승불교 계열에 속하는 극동의 불교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호국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다만 일본의 경우는 호국불교 외에 밀교와 선불교의 계통도 전해졌으며, 이후에도 독자적인 종파가 생겨날 정도로 한반도에 비해서 훨씬 다양했다.

 

그러나 선진 문물까지는 수입할 수 있어도 동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었다. 당시 동진은 남중국에서도 이미 저물어가는 해였으며(동진은 420년에 멸망한다), 북중국의 강성한 오랑캐나라들에 비해 약해빠진 한족 왕조였으니 백제에게 당장 절실히 필요한 물리력의 도움을 얻기란 불가능했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은 다른 조력자를 구해야 했다.

 

 

 

 

그 다음 후보로 떠오른 것은 일본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서로 안면을 익혔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 그러나 현 위기를 타개하는 데 유일하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은 일본뿐이다. 해답을 찾았다 싶은 아신왕(阿莘王)은 황급히 397년에 일본과 정식 수교를 맺기로 한다. 태자까지 일본에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그의 다급한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후 백제와 일본은 여러 차례 사신을 주고받으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진다. 비록 두 나라의 거리는 상당히 멀지만 가야라는 징검다리가 있어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가야는 마치 오늘날의 자유무역항과 같은 일본 전용 무역기지를 두고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백제와 일본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이 전문이었다이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논리를 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그것인데 (임나란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가야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가야에 일본과 거래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 측 입장에서 확대ㆍ왜곡한 논리였기에 곧 설득력을 잃었다. 문제는 그런 억지 논리를 오늘날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백제가 산둥을 비롯한 중국 일부 지방에 무역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대ㆍ왜곡해서 백제가 마치 중국 동해안을 관장하고 황해 무역을 독점한 것처럼 주장하는 게 그 예다. 백제는 일본의 물리적인 도움이 필요하고, 일본은 백제의 문화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사이란 이렇게 서로 부족한 점을 메워 주는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직스러운 관계로도 고구려의 기세를 막지는 못했다. 399년 아신왕(阿莘王)은 일본과 가야까지 총동원해서 연합군을 이루어 고구려 측으로 달라붙은 배신자 신라를 먼저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내물왕(奈勿王)SOS를 받은 광개토왕(廣開土王)5만의 대군을 보내는 바람에 아신왕은 다시 자기 머리털을 쥐어뜯어야만 했다. 게다가 백제와의 연고 때문에 할 수 없이 출병한 가야는 내친 김에 본토까지 밀고 내려온 고구려 군에 의해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이것을 계기로 가야는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신라에 병합된다). 아신왕(阿莘王)은 그에 굴하지 않고 404년에는 왜군과 함께 대방의 수복을 꾀하지만, 결국 또다시 실패하고 그 이듬해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재위 기간을 마감한다. 아마 그는 하필이면 제갈량의 시대에 태어난 주유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불과 한 세대 전 증조할아버지(근초고왕)에게 자신과 똑같이 당한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그래도 아신왕(阿莘王)은 자신의 죽음으로 백제에 한 가지 선물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인즉슨 이렇다. 태자가 국내에 없는 탓에 일단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아신왕(阿莘王)의 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왕위에 뜻을 품은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조카가 계승할 지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는 태자에게 일본 왕은 100명의 군사를 붙여준다. 태자가 일단 사태 관망을 위해 해안 부근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쿠데타에 반대한 대신들의 손에 설례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태자는 어렵사리 왕위를 되찾고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이 되었는데, 자신을 보호해준 일본 측에 고마워했을 것은 당연하다. 이래저래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뒤늦게 중국의 동진은 전지왕을 책봉한다느니 하면서 수선을 떨지만 백제가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416년에 동진의 안제(安帝)는 전지왕에게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내렸는데, 쉽게 말하면 중국의 동쪽 변방을 담당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다. 백제에게 필요한 군사적 도움을 주기는커녕 정치적 영향력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북중국의 오랑캐들로부터 자신의 안위마저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제왕에게 그런 벼슬을 내렸으니, 중국 황제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하겠다. 현실이 어떠하든 명분상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중국 한족 왕조의 고유한 중화 사상이며, 유학에서 비롯된 정치 이데올로기. 당시 중국의 왕조들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반도의 군주들에게 관작을 주고 책봉했다. 참고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400년에 후연의 왕에게 平州牧遙東帶方二國王으로 책봉되었고, 435년 장수왕(長壽王)은 북연에 스스로 책봉을 청해 都督遙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遙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라는 직책을 얻었는데, 뜻은 전지왕의 직함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중국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는다. 일본이 허물없는 친구라면 중국은 부모 격이다. 누가 현실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지는 뻔하지만 필요없다고 해서 부모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백제는 그런 심정으로 당장에 별 쓸모도 없는 중국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춰 대한다. 장차 한반도 역사 1500년을 좌우할 사대(事大)라는 독특한 대중국 관계는 여기서 싹튼다. 이 점에 관해서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신라는 그보다 한술 더 뜨게 되는데, 민족적 혈통과 언어가 판이하게 다른 나라를 단지 대국이라 해서 이처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대단히 희귀한 경우다(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모두 중국 중심의 질서를 인정했으나 한반도 왕조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경우는 없었다). 동진이 곧 무너지고 남중국의 주인이 송()나라로 바뀌고 난 다음에도 백제의 사대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곧이어 장수왕(長壽王)의 고구려군이 코앞에 닥칠 무렵까지는.

 

 

가야의 운명 삼국시대 초기, 그러니까 사진의 고분들에 가야의 왕들이 묻힐 때만 해도 가야는 백제, 신라와 어깨를 견줄 만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가야가 몰락한 이유는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주력하느라 상대적으로 육로로의 영역 확장을 게을리 한 탓이다. 철광산이 많고 바다에 면해 있다는 이점이 오히려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된 셈이다. 어쨌거나 그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가야는 일찌감치 한반도 바깥의 문명을 접했으며(불교도 삼국보다 먼저, 그것도 인도로부터 직수입했다는 설이 있다), 자연히 일본과도 교역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뭉쳐야 산다

 

 

한편 신라는 백제와 달리 부모처럼 받들어 섬길 나라도,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낼 나라도 없다. 신라는 아직 중국과 교류할 루트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가야와 일본은 이미 백제 측으로 노선을 정했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신라도 응당 이웃인 백제에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백제는 건국 초부터 동진 정책으로 신라를 정복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적인 앙숙이었다.

 

삼국사기유례왕(儒禮王) 조의 기사에는 백제에 대한 신라의 증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295년 왜구의 잦은 해안 침략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백제와 연합해서 일본을 쳐들어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논의가 있었다(당시에 말하는 일본은 전통적으로 왜구의 본거지였던 쓰시마를 가리킨다), 이때 홍권이라는 자가 나서서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므로 더불어 꾀를 같이 하기 어렵다[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라고 말하자 유례왕이 맞장구를 치며 그 계획을 포기한다. 당시에는 백제와 일본이 찰떡궁합을 이루기 전이므로 신라가 백제와 연합해서 일본을 공격하는 전략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그때부터 신라에게 백제는 거짓이 많고 믿을 수 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이것도 지역감정의 오랜 뿌리라고 할까?

 

때로는 이해관계보다 중요한 게 감정이다. 따라서 내물왕(奈勿王, 재위 352~402)이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에게 조카인 실성을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고구려에게 의탁하려 한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내물왕에게는 더 좋은 볼모감인 아들 눌지가 있었지만, 아마 나이가 너무 어렸거나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듯하다(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 가운데 출생 연도가 알려진 사람은 거의 없다. 왕들의 출생 시기가 확실해지는 것은 고려 왕조부터다). 실성왕이 즉위하는 402년에도 눌지는 나이가 어려 즉위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실성이 나중에 내물왕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것을 감안한다면 혹시 거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제를 경계한다면 진작부터 그랬어야 하겠지만, 일이 늦어진 데는 아마도 신라의 왕권이 일관된 대외 정책을 추진하지 못할 만큼 미약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미추왕 이래 100년 만에 두 번째 김씨 왕으로 즉위한 내물왕이 47년간 재위하면서 비로소 신라의 왕계는 김씨로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구려에 붙기로 한 내물왕의 외교 노선은 대단히 시의적절했다. 이듬해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하면서 백제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몰릴 때 신라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치국(治國)에서는 성과를 냈다고 하지만 제가(齊家)에 관한 한 내물왕은 실패했다. 세 아들 모두 나이가 어려 왕위를 잇지 못한 것은 그가 알고 있었던 실패지만 죽을 때까지 몰랐던 실패도 있다.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이 돌아와 왕위를 이은 것이 그것이다. 실성왕(實聖王, 재위 402~417)으로서는 아무리 나라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자신을 적지로 보낸 삼촌이 밉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삼촌이 남긴 사촌 동생들도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그 중 막내인 미사흔을 일본에, 둘째인 복호를 고구려에 각각 볼모로 보낸다. 그렇다면 맏이인 눌지에 대한 처우가 더욱 가혹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으니, 눌지 역시 실성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실성은 아예 눌지를 살해함으로써 후환을 없애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 개인으로서는 큰 실수였고 나라로서는 큰 이바지였다. 그 기회를 역이용하여 눌지는 오히려 신라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일으켜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42년을 재위하면서 아버지에 뒤이어 뛰어난 외교적 성과를 이루게 된다(눌지의 아내는 실성의 딸이니까 눌지는 장인을 죽인 셈이 되는데, 당시에는 왕실의 족내혼이 이루어졌으므로 장인 - 사위 관계가 그다지 유별날 게 없었다).

 

 

 

 

아버지 내물왕(奈勿王)과 달라진 것은 협상의 파트너다. 아버지와 달리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은 고구려를 안식처로 여기지 않았고 지속적인 파트너로 믿지도 않았다.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쿠데타에는 고구려 측의 지원이 있었으므로 눌지왕은 즉위 초기에는 고구려에 대해 사대의 자세를 취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략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사실 신라를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게 신라는 좋게 말해 보호령일 따름이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백제와 가야, 일본 연합군을 물리쳐준 이래 고구려는 신라에 상주군을 주둔시킬 정도였으니 현대사로 비유하면 1945년 남한에서 점령국행세를 톡톡히 한 미군의 지위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청 지배기에 이승만이 미군과 한편으로 협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듯이, 1500년 전 신라의 눌지왕(訥祗王)은 고구려를 적당히 섬기면서 은근히 독자 노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왕은 가진 권력에서는 같아도 신분에서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 권력욕에 눈이 먼 대통령 이승만은 끝끝내 좌우합작을 거부했으나 신분상 권력을 보장받고 있었던 국왕 눌지는 적극적인 합작을 통해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애초부터 눌지왕(訥祗王)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합작 파트너는 놀랍게도 바로 백제였다. 유례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신라의 역대 어느 왕도, 심지어 백제 비류왕(比流王)과 잠정적인 우호를 도모했던 흘해왕조차도 백제를 정식 동맹자로 여기지는 않았으니, 그 점에서 눌지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고를 했던 인물이다. 더구나 백제와 파트너가 되면 당시 신라를 그악스럽게 괴롭히던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진전을 볼 수 있을 테니, 아마 그는 그것까지 계산에 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눌지에게는 백제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실성왕(實聖王) 때 고구려에 볼모로 간 동생 복호를 데려오는 일이다. 즉위하자마자 그 일을 추진한 배경에는 필경 고구려와 인연을 끊겠다는 눌지의 장기적인 복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눌지는 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막내 미사흔도 귀국시켜 눈물 어린 형제 상봉을 누렸으나 그 대신 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야 했다. 영리한 계략으로 복호와 미사흔을 돌려보낸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서 참혹하게 죽었고 그의 부인은 망부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뭉치면 산다는 건 눌지왕(訥祗王)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장수왕(長壽王)이 남진을 결행한다면 그 대상은 신라만이 아니라 백제도 포함된다. 오히려 전력이 있었던 백제는 더 크게 회를 입을 가능성이 짙다. 그래서 백제의 비유왕(毗有王, 재위 427~455)은 즉위하자마자 다방면으로 동맹을 꾀하는데, 먼저 전통적인 우호 관계에 있는 일본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아직 신생국이지만 동진에 뒤이어 중국 강남의 지배자가 된 송()나라와 차례로 우의를 다지고, 433년에는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렇잖아도 고구려의 우산 밑에서 나오면 백제밖에 의지할 대상이 없었던 눌지왕(訥祗王)은 비유왕이 내미는 손을 덥석 움켜쥔다.

 

이것이 후대에 나제동맹(羅濟同盟)이라 알려진 사건인데, 가히 고대의 통일전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나 과정에서 보듯이 그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맺어진 동맹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백제는 남조의 송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가야와 두루 연대하고 있었으니 신라와의 동맹은 그 연대의 사슬 중 하나의 고리일 뿐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만이 유일한 연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신라는 백제의 다른 파트너들과는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나제동맹을 맺고 나서도 신라는 일본의 대규모 침략을 당한다). 이는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서 백제와 신라의 위상 차이가 현격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고구려의 타깃도 역시 신라가 아니라 백제가 될 것은 당연하다. 비록 신라가 고구려의 우산에서 벗어났지만 고구려는 동남부의 약소국인 신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남진의 차비를 마친 장수왕(長壽王)의 일정표에는 오직 백제 정벌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도덕 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박제상의 충성심은 그의 가족에게는 비극을 안겨주었지만 후대인들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림은 조선 후기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라는 책에 수록된 박제상의 이야기다(오른쪽 위에 제상충렬堤上忠烈이라는 제목이 보이는데, 그림은 김홍도가 그렸다고 한다). 대부분이 중국인들로 채워진 수록 인물들 중에 박제상이 당당히 끼인 것을 보면 충성심이란 시대를 초월한 도덕인 모양이다. 하기야, 그렇듯 헌신적인 충성을 마다할 왕이 어디 있을까?

 

 

백제의 멸망?

 

 

정복군주란 원래 요절하는 걸까? 서른셋에 죽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처럼 광개토왕(廣開土王)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비록 정복의 규모로 보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듯이 광개토왕도 짧은 생애 동안 이룰 수 있는 모든 정복을 이루었다. 그러나 닮은 점은 여기까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그의 세계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쪼개졌지만, 광개토왕은 훨씬 든든한 후계자를 두었다. 그의 아들 거련(巨連)은 아버지가 외형적으로 성장시킨 나라에 확고한 토대를 놓았으며, 무려 78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흔여덟 살까지 살아 여러모로 요절한 아버지를 섭섭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묘호가 장수왕(長壽王)이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2세기 왕들의 특별한 장수 기록에 의문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장수왕(長壽王)은 실질적으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왕이다. 491년 그가 죽었을 때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그의 장수와 업적을 기려 직접 베옷을 입고 애도식을 거행할 정도였다(효문제는 획기적인 토지 제도인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한 황제로 중국사에서 이름이 높다).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은 우선 이듬해에 아버지의 위덕(威德)을 기리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세워 광개토왕의 뜻을 따를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오랜 치세를 시작했다(1500년 뒤에야 한반도인들에게 그 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비문을 새기고 비석을 세우는 그의 마음도 착잡했으리라). 흔히 그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 전술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중국 방면으로 화려하게 진출한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유지를 받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맨 먼저 광개토왕의 공적비를 세운 것에서 보듯이 장수왕(長壽王)은 아버지의 의도를 잘 이해했고 거의 그대로 따랐다. 광개토왕이 더 오래 살았다 해도 아마 랴오둥 사태가 해결되고 나면 곧바로 남진에 나섰을 테니까.

 

하지만 장수왕은 마치 자신이 앞으로 장수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 신중하고도 느긋하게 행보한다. 우선 아버지의 시대에 이미 랴오둥 문제는 매듭이 지어졌지만 그는 좀 더 그 소유권을 확실히 다지고자 한다. 전쟁의 시대가 끝났으니 그 방법은 외교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전통적 수교 대상인 북중국을 넘어 멀리 남조의 동진에까지 외교의 손길을 뻗친다. 비록 그 방식은 조공이었지만 한족 왕조마저 고구려가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못한 데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대에 일궈놓은 고구려의 든든한 국력이 크게 작용했으니, 집안에 인물이 한 명 나면 여러 대가 먹고 산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중국의 역대 왕조, 특히 화북에 자리 잡은 나라들에게는 늘 고구려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니까 대중국 관계가 완전히 안정되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466년 북위의 헌문제는 장수왕(長壽王)에게 딸을 자신의 후궁으로 바치라고 명한다. 그러자 장수왕은 조카딸을 대신 보내겠노라고 대답했는데, 그 뒤 북위가 연 나라를 칠 때도 정략결혼으로 우호를 다지는 척하다가 기습 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을 바꿔먹고 조카딸이 죽었다고 통보한다. 뻔한 거짓말에 헌문제는 대노했으나 별다른 조처는 취하지 못했다. 아마 당시 북위는 부쩍 성장한 고구려를 껄끄럽게 여겼을 테고, 고구려는 비록 북위의 조공국이지만 나름대로 버티는 자세였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한반도 역사상 중국과 마지막으로 보인 호각지세(互角之勢). 나중에 중국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두 번 다시 그런 관계를 꿈꾸지 못한다. 동진이 멸망하자 장수왕은 그 뒤를 이은 송나라에 다시 조공했으며, 이렇게 북조의 북위, 남조의 송과 두루 우호를 다짐으로써 남진을 위한 모든 차비를 마쳤다.

 

 

이렇게 고구려의 남침 의도가 점점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것은 물론 백제다. 광개토왕(廣開土王) 때 역전된 이래 백제는 한번도 단독으로 고구려와 맞붙어 승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아신왕(阿莘王) 이후 전지왕(腆支王) - 구이신왕(久爾辛王) - 비유왕(毗有王)의 치세 50여 년 동안 백제는 늘 고구려의 남침을 최대의 국가적 고민으로 간직해왔다. 나름대로 대비는 하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 건 누가 봐도 분명하다. 따라서 백제가 기댈 것은 오로지 외교 즉 어떻게든 동맹을 확대하는 것뿐이다. 비유왕의 아들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이제 마지막 외교로써 다가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스폰서인 북위와 접촉하는 것이다. 장수왕(長壽王)이 남조에까지 접근한다면 나는 북조에 접근하겠다. 남조의 송은 일단 구워삶아놨으니 고구려의 흔들기 작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북위마저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고구려의 의도는 불발로 끝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72년 드디어 개로왕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서신이 뱃길로 북위에 전달된다. 그러나 당시 북위의 황제가 장수왕과 마찰을 빚었던 헌문제에서 불과 3년 전에 그 아들인 효문제(孝文帝)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일단 개로왕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조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 대국을 섬기고자 하는 사무치는 정성을 달랠 길이 없다는 사뭇 감동적인(?) 글월에도 불구하고 효문제는 고구려가 본국을 섬긴 지 오래도록 별다른 결례를 한 일이 없으니 어찌 고구려를 정벌하겠느냐며 오히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타이른다. 효문제의 진의는 물론 고구려의 백제 정벌을 승인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개로왕은 북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조공도 끊어 버린다.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로부터 3년 뒤 장수왕(長壽王)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침을 개시했다.

 

대병력은 아니지만 철기병 위주의 고구려 정예병을 백제는 막을 힘이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근초고왕(近肖古王)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이고 고구려의 보복을 걱정하여 산 속에 도성을 쌓아 대비했으나(남한산성) 그 조상의 슬기조차 백제의 운명을 건져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후손에게 복을 베풀기는커녕 화를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성문이 불타는 것을 보고 개로왕(蓋鹵王)은 뒷문으로 빠져 달아났다가 고구려의 추격군에게 잡혀 백제를 버린 매국노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으니까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유명한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다. 장수왕은 백제를 침공하기 전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 궁실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것처럼 위장하고 개로왕과 바둑친구가 되어 환심을 산다. 그리고는 개로왕에게 백제의 도성은 하늘이 내린 지세이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왕궁을 확장해서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백제가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축성 사업으로 방어망이 약해진 데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것을 유발한 장수왕(長壽王)의 첩보전도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고구려의 남진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고,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장수왕(長壽王)은 증조할아버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원한을 완전히 풀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역관계가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두 나라의 건국 이후 500년간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건국 이후 두 나라는 400년 가까이 지나도록 낙랑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탓에 직접 조우할 기회가 없었다. 완충지가 사라지자 두 나라는 곧바로 접경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결과는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서전(緖戰)은 예상과 달리 백제의 완승,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구려가 대중국 관계에 주력하느라 남부 전선에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근초고왕은 그 점을 알았기에 승리한 뒤에도 고구려의 침략을 걱정했던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분열 상태였지만 강남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던 화북에서 북위가 패자로 발돋움하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다. 북위는 고구려에게 랴오둥의 소유를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고구려는 북위의 서열을 인정해주었다(그런 관계였으니 개로왕이 북위에 접근하려 한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남진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장수왕(長壽王)은 건국 이후 최대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이지만, 백제는 반대로 건국 이후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다행히도 개로왕은 도성의 몰락을 눈앞에 두고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아들 문주에게 어서 도망쳐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는데, 그런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더라면 백제는 아마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을 것이다. 문주는 신라에서 1만의 병력을 빌려 황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아버지는 죽고 성은 무너진 상태였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고구려군이 물러갔다는 것인데, 아마 장수왕은 도성을 유린한 것으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했다고 본 듯하다오늘날 영토국가개념으로 보면 장수왕(長壽王)의 철군은 이해할 수 없는 게 된다. 그는 왜 백제의 뿌리마저 잘라 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모두 완전한 영토국가가 아니었다. 쉽게 말해 국경선이라는 분명한 울타리를 두른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제의 도성이 산 속에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개념이 아니라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의 국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아마 그는 이후의 백제를 잔존 세력이 세운 지방정권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개념의 국가가 아니었기에 변방에 지방정권이 성립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비록 고구려군이 철수했다 해도 죽은 아버지의 왕위만 이었을 뿐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은 원래의 도성을 회복할 자신이 없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일 처지도 아니려니와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언제 다시 장수왕의 철퇴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남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멀리 내려가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에 해당하는 웅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을 원래의 백제와 구분하여 웅진백제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 백제가 멸망했다고 본다면 그런 구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왕계의 보존을 고려한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어쨌거나 그건 뭐든지 구분하기를 즐기는 학자들의 몫이니까 여기서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일설에 따르면 그 무렵 백제 지배층의 일부가 대규모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야마토 정권의 성립에 기여했으며, 따라서 일본 천황의 혈통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도 하는데,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시대에 굳이 두 나라 왕조의 혈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극적인 천도 아신왕(阿莘王)을 살려준 광개토왕(廣開土王)과 개로왕(蓋鹵王)을 죽인 장수왕, 그것은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잔인했기 때문은 아니다. 신라를 거느리고 있던 광개토왕은 백제의 항복으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판단했기에 여유가 있었고, 장수왕은 나제동맹이라는 강력한 수비망을 의식해서 독하게 나간 것뿐이다. 어쨌거나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500년 도읍지를 버리고 사진에서 보는 웅진성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다(지금 이름은 공주의 공산성인데, 돌로 된 성벽은 조선시대에 개수된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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