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두 영웅은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콤비를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營留王)과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長壽王)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했으나, 그에 반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고구려는 아직 랴오둥의 성곽들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수나라의 침략 이후 랴오둥은 사실상 소유권이 불분명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당연히 영류왕에게 줄을 섰다. 아마 무관들은 상당수 을지문덕의 견해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는 패기만만한 한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다【『삼국사기』에는 그의 성이 천泉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성이 당의 건국자인 이연(李淵)의 이름자와 같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중국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는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된다】.
호족들의 자치권이 강했던 고구려에서는 원래 아들이 아버지의 관직을 상속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대인(大人, 고구려의 관직)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은 쉽게 그 지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귀족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역사에는 그가 원래 무도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그는 열다섯 살에 불과했으니 아마 귀족들이 반대한 진짜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을지문덕파였던 데 있을 것이다). 일단 연개소문은 귀족들 앞에서 최대한 저자세를 취하며 간신히 지위 상속에 성공했다. 하지만 저자세를 취하는 그의 마음 속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을 건 틀림없다. 영류왕(營留王)의 천리장성 축조 사업에서 연개소문은 최고 감독자가 되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기에는 그의 사적 원한과 공적 야망이 너무 크다. 더구나 귀족들도 그 점을 눈치채고 있다. 어차피 맞부딪힐 일, 연개소문은 먼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한다.
642년 그는 평양성 남쪽에서 휘하 병력의 열병식을 한다는 구실로 귀족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100명이 넘게 초청을 받았는데 어쩌랴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곧바로 궁중에 들어가 영류왕(營留王)까지도 살해한다. 그리고 왕의 조카를 허수아비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하니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기에 신라의 김춘추가 대야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고구려로 달려온 것도,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동맹의 손길을 뻗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고구려의 신흥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남진을 추구해 온 기존의 세력이 무너지고 중국에 대해 호전적인 정권이 들어섰으니 이제 고구려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을 품을 수 있다. 김춘추는 혹시 쿠데타 세력이 죽령 이북의 땅을 눈감아주지 않을까 했겠지만 연개소문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므로 의자왕(義慈王)을 파트너로 낙점했던 것이다.
▲ 라오동 벌판 고구려가 전통적으로 랴오둥까지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랴오허를 따라 늘어선 고구려 성곽들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이 성곽들의 선을 따라 오늘날 만주의 주요 도시들이 발달했다). 수 양제와 달리 당 태종은 랴오둥 벌판의 성곽들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격이 무모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실제로 옳았다.
그러나 두 영웅이 공존할 수 없다는 ‘원칙’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앞서의 두 영웅이 영류왕(營留王)과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면 이번에 자웅을 결할 두 영웅은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이다. 쿠데타라는 집권 방식도 닮은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 연도는 전하지 않지만 맡아들인 남생이 634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점차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어야 할 호적수로 떠오른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구실을 찾고 있던 당 태종에게 행동에 나설 계기를 주었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와 결탁한 백제, 이제 그는 임시 파트너로 여겨왔던 신라에게서 임시라는 딱지를 떼어주고 정식 파트너로 삼는다. 때마침 연개소문이 신라 북변을 침공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사신을 보내 추궁함으로써 신라를 두둔하고 나섰다. 연개소문은 신라와의 해묵은 숙제가 있음을 주장했고 당나라 사신은 지나간 일을 왜 따지느냐고 말했지만, 서로 간에 그것은 한바탕 붙기 위한 구실일 따름이다. 드디어 당 태종에게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모든 명분이 축적되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땅이라는 전통적인 ‘침략의 변’ 이외에 새로 보태어진 명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연개소문에 대한 증오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통일제국의 역사적 사명을 정확히 드러내는 명분이다.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이를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군신들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연개소문에 대한 적의나 고구려 정벌의 정당성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태종의 원정을 만류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遼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 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이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사실 이세민도 “본(本)을 버리고 말(末)로 가는 격”이라고 말했으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순(順)으로써 역(逆)을 치는 것"이라며 원정을 정당화했으니 애초부터 그에게는 고구려 정벌의 야망이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645년 드디어 유주에 전 병력을 집결시키고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수 양제의 패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한 덕분일까? 아무튼 스타트는 순조로웠다. 병력은 수나라 때보다 훨씬 적어 17만 정도였지만 어차피 수가 많다고 해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수나라의 실패에서 배운 바 있다.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어떻게 공략할 것이냐다. 과연 랴오허를 건넌 당나라 본군은 개모성(지금의 푸순)을 함락시켜 초장부터 개가를 올린다. 곧이어 산둥에서 출발한 수군이 랴오둥 반도 끝부분의 비사성(지금의 다롄)을 점령하여 호응한다. 성 하나 제대로 점령하지 못하고 랴오둥 들판을 헤맸던 수나라 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요처는 수 양제가 집요하게 공략하고서도 끝내 정복하지 못했던 요동성이다. 요동성 앞에 이른 태종은 성을 완전 포위하고 해자를 메우는 작업까지 손수 거들면서 공성에 주력한다. 포차로 돌을 날리고 충차로 부딪기를 수십 일, 드디어 그는 요동성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당시 고구려군은 1만 이상이 전사하고 1만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성 주민 4만과 식량 50만 석이 적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요동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믿었던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황급히 고혜진(高惠眞)과 고연수(高延壽)에게 전 병력이나 다름없는 15만의 대군을 주어 당나라의 다음 공략지인 안시성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두 지휘관은 서로 의견 충돌을 빚은 데다 당 태종이 직접 짠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이나 그것으로 고구려의 등불은 꺼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보게 만든 것은 안시성이었다. 사실 연개소문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편이 전황에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안시성은 끄떡없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포기하고 그대로 평양을 향해 남진했더라면, 남은 수비 병력이 없는 고구려는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랴오둥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나라의 실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그는 안시성 공략에 나섰고, 안시성은 위기의 고구려를 구했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이미 당대에 이름을 높이 날리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명장답지 않게 정치적 야망이 없는 강직하고 충직한 군인이었던 듯하다(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랴오둥을 수비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북진정책을 추종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개소문과 무력 충돌까지 빚은 적이 있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양만춘을 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과 고구려의 운명을 위해 더없는 행운이 되었다.
요동성의 복제품쯤으로 인식되었던 안시성은 양만춘의 탁월한 솜씨로 오히려 요동성을 능가하는 진품 걸작으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복제품을 대하는 것과 같은 공략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안시성 수비군은 적이 포차를 날리면 숨었고 충차를 부딪히면 그 구멍을 메웠다. 심지어 당군은 성벽과 맞먹는 높이의 토산까지 쌓았으나 고구려군은 성벽을 더 높이며 항전했다. 토산이 무너지며 성 한측을 무너뜨리자 번개같이 달려들어 거뜬히 수리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워낙 애를 먹어 성을 정복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넣어 죽일 마음까지 품었지만 태종은 분명 당대의 영웅이었다. 양만춘이 성벽에 올라 철수하는 당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태종은 그에게 비단 100필을 보내 적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 10개를 손에 넣었고 7만의 백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켰으니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전쟁은 중국의 패배였다. 그러나 수 양제도 그랬던 것처럼 당 태종도 고구려 정벌을 1차전으로 끝내려 하지는 않았다. 패전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회복된 646년에도 그는 1차전에서 활약한 이적(李勣, 원래 이름은 세적世勣이었으나 ‘世’ 자가 이세민과 같기에 ‘勣’으로 줄였다)에게 고구려 침공을 명했고, 이듬해에는 산둥에서 수군으로 침략하게 했으며, 또 그 이듬해에도 고구려를 공략했다. 하지만 양만춘이 막아준 1차전 이후 정신을 차린 연개소문은 그때마다 뛰어난 전술 운용으로 잘 방어해냈다. 결국 649년 당 태종이 죽음으로써 이 대회전은 막을 내렸다(일설에 의하면 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멀었고 그 독으로 인해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의 죽음으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공존할 수 없었던 영웅들 간의 승패를 굳이 따진다면 이세민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패장이 될 터이고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승장이 되겠지만, 나라의 운명은 정반대다. 이세민이 반석 위에 올린 당나라는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다시금 한나라 시대와 같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복원을 노리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사실상 지배한 고구려는 거듭되는 전란으로 국력이 약해지면서 한반도 내에서조차 패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 전쟁의 승부를 결정한 전투 안시성 전투의 기록화다. 당군은 랴오둥의 거의 모든 성들을 함락시켰지만 유독 이 안시성만은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구려의 야전군이 궤멸한 뒤에도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이 살아남았기에 당 태종은 또 다시 패전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그러나 안시성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큰 성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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