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왕자의 난, 정종)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왕자의 난, 정종)

건방진방랑자 2021. 6. 15. 15:39
728x90
반응형

 2장 왕자는 왕국을 선호한다

 

 

붓보다 강한 칼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 최종 목표였겠지만 정도전(鄭道傳)의 목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정도전은 조선의 두뇌이며, 이성계가 시공자라면 정도전은 건축가다. 그러므로 이성계는 건물이 다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어도 정도전은 인테리어까지 마쳐야만 완공이라고 본다. 게다가 중국의 까다로운 준공 검사에 합격하려면 인테리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성계가 아직도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에 머물러 있는 게 그 증거다.

 

컴백한 유교제국 명나라와 좋은 짝을 이루려면 조선도 유교왕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조선경국전으로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갓 자리잡은 유학을 확고히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최대 무기인 붓을 놓지 않는다. 1394년에는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써서 유교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불교와 도교를 공격하는가 하면, 4년 뒤에는 불씨잡변(佛氏雜辨)으로 불교에 대해 확실한 사형선고를 내린다심기리의 심()은 불교, ()는 도교, ()는 유교를 뜻한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경을 이용하여 도교를 비판하고 노장 사상을 이용하여 불교를 비판하면서 결국 리를 본질로 하는 유교만이 최선의 이념이라고 찬양한다. 또한 불씨잡변에서는 논의의 차원을 더욱 끌어올려 철학적으로 불교의 윤회설을 공박하면서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가 어떻게 멸망의 길로 치달았는지를 성리학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 개념을 혼동하지 말라고 주장한 점이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정도전(鄭道傳)에 따르면 자비는 무차별한 박애주의이므로 오히려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개념이라고 한다(불교의 자비는 도덕적 개념이지만 유학의 인이란 원래 정치와 국가 운영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붓이 칼보다 강한 경우는 사회가 정상적인 진화 과정을 밟고 있을 때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조선은 인테리어가 끝나지 않은 미완성 건물, 따라서 아직까지는 붓보다 칼의 힘이 더 강했다.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도 보았듯이 무릇 새 왕조는 이른바 개국초기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겪게 마련이다. 건국자의 특권과 카리스마는 보장되지만 건국자가 물러난 뒤에는 그 특권과 카리스마가 특정한 개인에게 매끄럽게 상속되기 어렵다는 증상, 요컨대 후계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성계에게는 1354년생인 맏이에서부터 1382년생인 막내까지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는 데다 그 가운데 첫째 아내에게서 얻은 여섯 아들은 조선을 건국할 무렵 모두 장성해 있었다.

 

건국 당시 이미 이성계의 나이는 오십대 후반이었으니 아무래도 후계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장자 계승의 전통적인 원칙이 있지만 그것 역시 사회가 정상적인 행정에 있을 때나 통하는 원칙일 따름이다. 더구나 이성계의 맏아들인 이방우(李芳雨, 1354~93)는 고려 말부터 관직을 맡아 일했으나 아버지의 역성 쿠데타에 반발하고 은퇴해서 황해도 해주로 가 술을 벗하며 살다 죽어 가뜩이나 복잡한 후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다. 그래서 건국자가 죽고 난 다음에 왕위계승전이 벌어진 고려와는 달리 조선의 개국초기증후군은 이성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절에 터져 나온다. 조선 왕조를 배경으로 한 통속 역사소설과 TV 사극에서 즐겨 다루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시 1392년 건국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보자. 갓 탄생한 새 왕조가 한시바삐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권력의 승계가 분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장성한 여섯 아들이 모두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들이었으므로 이성계는 어느 아들을 특별히 편들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름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는 방책을 마련한다. 여섯 아들은 모두 지난해에 죽은 첫 아내(신의왕후)의 소생이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의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온전한 왕위계승자라고 볼 수 없다왕위계승자의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왕자였는가, 아닌가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당대에는 무척 중요한 기준이었다. 참고로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현역 황제를 아버지로 두고 황궁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포르피로게니투스(porphyrogenitus, ‘태어나면서부터 황태자’)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아버지가 건국자인 경우 아들은 대개 그런 신분이 아니다. 따라서 개국공신들, 쉽게 말해 건국자의 부하들은 건국자의 아들에 대해 특별히 왕자로서의 예우를 갖춰 대하지는 않았다(물론 건국자의 아내, 즉 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아마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정도전(鄭道傳)이나 조준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지금의 아내 강씨(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번(李芳蕃, 1381~98)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마음먹는다(강씨는 고려 말 권문세족인 강윤성의 딸인데, 아마 이성계는 처가로부터 받은 도움에 보답할 겸, 명문의 후손을 후계자로 삼을 겸 해서 방번을 후계자로 낙점했을 것이다).

 

물론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 1354~98)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일단 찬성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여섯 아들이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을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는 정도전은 권력의 경쟁자인 그들이 왕권마저 장악하면 자칫 국가 대사는 물론 그 자신의 개인적 야망마저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음직하다. 하지만 공신들은 이성계에게, 그럴 바에는 오히려 막내인 이방석(李芳碩, 1382~98)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한다. 기록에는 방번이 경솔한 성품이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겨우 열한두 살짜리 아이가 경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공신들은 필경 막내를 계승자로 삼아 왕권을 더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이성계의 의도와 일치하므로 13928월에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방석의 배다른 형들, 즉 신의왕후의 여섯 아들은 입이 잔뜩 부을 수밖에 없다. 막상 조선 건국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뛴 것은 자기들인데, 엉뚱하게도 열한 살짜리 배다른 막내동생이 세자가 되었으니 죽 쒀서 개 준 격이란 바로 그들의 처지를 뜻하는 말이리라. 특히나 정몽주(鄭夢周)를 죽여 사실상 건국의 길을 닦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1418)은 기가 막힌 심정이다. 정몽주에 이어 또 하나의 정씨(정도전)가 그의 타깃이 되는 계기는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노래 짓고 천도하고 책 쓰고 군사 조련하면서 사실상의 왕권을 행사해온 그였으니 알았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직하다.

 

 

결국 무모한 랴오둥 정벌 계획이 정도전의 명을 앞당기고 말았다. 정벌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1398년 여름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 조직을 해체하고 왕자들도 진법 훈련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들이 따르지 않자 정도전은 징계 삼아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보내려 했는데, 그게 곧 왕자들의 반란이라는 묘한 봉기의 빌미가 되었다. 826일 밤 이방원은 휘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은의 첩실 집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장악했다당시 정도전(鄭道傳)은 이웃집으로 도망쳤다가 주인의 밀고로 잡혀나와 이방원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예전에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주시오.” 그가 말하는 예전이란 바로 1392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덕분에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왔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권리를 누렸음에도 또 뭐가 부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거요?” 조선의 기획자인 정도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왕자의 관점에서는 엄연한 왕국을 때이르게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한

것이 악행이라면 악행이었을 것이다.

 

그 길로 이성계에게 달려간 여섯 왕자는 아버지에게 세자를 다시 책봉하라고 다그친다. 브레인을 잃은 이성계는 독자적인 판단을 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형제들은 모두 방원을 추대했으나 방원은 짐짓 서열을 운위하면서 둘째 형인 이방과(李芳果, 1357~1419)에게 양보했다(원래 쿠데타의 실세는 허수아비를 먼저 내세운 다음에 집권하는 절차를 밟는다).

 

배다른 형들은 냉혹했다. 폐위된 세자 이방석은 유배 조치를 받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살해되었고, 곧이어 그의 형인 이방번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가뜩이나 두뇌를 잃고 헤매던 이성계는 두 아들이 여섯 아들에게 왕따를 당해 살해되자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할 기력이 없다. 그래서 다음 달인 9월에 새 세자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그가 곧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이다. 그러나 이것은 1라운드에 불과했다(무인戊寅년에 일어났다 해서 이 사건을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간지干支로 사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조선시대 내내 흔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독자 연호를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도 그랬듯 아직 개국초기증후군이 끝나려면 2라운드가 필요했다.

 

 

가지 많은 나무 이성계 집안의 가계도다. 옛날로 치면 여덟 아들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건국자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적을수록 분란의 불씨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불씨에 불을 당긴 것은 어리고 힘없는 막내를 세자로 삼아서 조선을 일찌감치 사대부 국가로 만들려 했던 정도전(鄭道傳)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붓보다 강한 칼

유교왕국의 모순

2차 건국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