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생국의 신경전
가장 중요한 국호가 결정되자 정도전의 조선 기획은 더욱 가속화되고, 그에 따라 그의 재능도 더욱 빛을 발한다. 우선 그는 이성계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일종의 간이 오페라인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錄)」을 지어 작사ㆍ작곡ㆍ안무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현재 음률은 전하지 않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가사와 일부 춤동작만이 전한다). 그러나 이런 예능의 자질은 그가 지닌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곧이어 그는 군사제도를 정비해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만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직접 군사 조련까지 담당하면서 폭넓은 오지랖을 마음껏 과시한다.
1394년에 접어들자 그는 잠시 짬을 내서 국가 운영 지침서인 『조선경국전』을 저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새 도읍지로 한양을 정하고 새로 지을 궁궐, 종묘의 위치와 이름까지 일일이 제정한다【지금 서울의 대표적 ‘고궁’인 경복궁(景福宮)이 바로 이때 지어진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다. 처음 지어질 당시 경복궁은 400칸이 채 못 되는 작은 규모였으므로 정도전(鄭道傳)이 작업을 총감독하고 부속 건물들의 이름까지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개이경복(介爾景福, 그대에게 빛나는 복이 있으라)’이라는 구절에서 따와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짓고,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침소인 강녕전(康寧殿) 등의 위치와 명칭도 직접 정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이 오리지널 경복궁은 훗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완전히 불에 타 없어졌고, 현재의 모습은 1867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다시 지은 복제판이다】.
또 이듬해에는 『고려사(高麗史)』 37권의 편찬까지 맡았으니 슈퍼맨이 따로 없다(앞에서 말했듯이 원래 새 왕조는 건국한 지 50년 이내에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이 문헌은 지금 전하지 않고 세종 때 재편찬한 『고려사』가 전한다).
그러나 건국 직업에 여념이 없는 정도전(鄭道傳)이 잠시 손길을 늦출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다. 고려 말부터 한반도의 사태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온 명 나라가 여전히 조선을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일단 조선이라는 국호까지는 승인했으나 명나라는 여전히 새 왕조는커녕 이성계의 쿠데타 자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명나라로서는 몽골의 식민지였던 고려가 못마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 대륙의 주인이 바뀐 것에 때맞춰 한반도의 주인도 바뀐 것을 환영할 마음 역시 없었던 듯하다).
사실 정도전(鄭道傳)이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가 건국될 때처럼 분열되어 있던 나라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쿠데타로 이룬 새 나라였으니 정통성의 문제는 오로지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점에서는 명나라도 마찬가지다. 비록 오랜 만에 컴백한 한족 왕조였지만 아직까지는 신생국의 딱지를 벗지 못하고 있으므로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최대 관심사는 하루빨리 명나라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무엇보다 주변 정세에 대해 후각이 지극히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까지의 중국 왕조들이 중원에 도읍을 정한 데 비해 주원장은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을 확실히 할 겸, 또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겸해서 이례적으로 강남의 난징에 도읍을 정할 정도였다(곧 명나라는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지만 중국의 역대 통일제국 중에서 난징에 도읍을 정한 것은 명나라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관해 주원장(朱元璋)이 가장 만족스러워할 만한 변화는 정몽주를 대표로 하는 고려 말의 친명(親明) 세력이 집권하는 것이다. 고려가 친원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개혁에 성공하는 것은 대환영이지만 새 왕조가 들어서는 것은 그로서는 전혀 환영할 만한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는 조선의 고삐를 한껏 죄는 방식으로 보상을 받고자 한다. 그 결과로 터져 나온 게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라는 사건이다(표전이란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표문表文과 황제를 제외한 다른 황족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전문箋文을 합친 말이다).
국호 문제가 통과된 시점에서 이제 명나라의 수중에 남은 카드는 바로 이성계에 대한 승인장이다. 조선을 승인했는데 이성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애를 먹일 수는 있다. 1395년 11월에 이성계는 정총(鄭摠, 1358~97)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는데, 그 임무는 자신의 승인장, 즉 조선 국왕 임명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고상한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이라고 부른다. 고명이란 왕위를 승인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이란 그에 부수되는 인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책봉의 절차라고 보면 된다. 원래 고명과 인신은 당나라 시대에 5품 이상의 관리를 임명할 때 주던 임명장과 인장을 뜻하는 용어였으니,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왕은 중국의 관리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조선이 중국 바깥에 있는 속국인 이상 책봉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이성계가 조선의 국왕 노릇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책봉을 받기 전까지는 정식 국왕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그는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를 자칭할 수밖에 없었으니 여러모로 자존심도 상하고 나름대로 불편한 구석도 있다.
국호를 승인받은 이상 이성계는 책봉도 쉽게 이루어질 줄로 믿었다. 그러나 웬걸, 정총의 표문을 받아본 주원장(朱元璋)은 엉뚱하게도 표문의 문구가 불손하다며 트집을 잡는다. 애초부터 그는 뭔가 꼬투리를 잡을 심산이었으니 어차피 표문의 문구 따위는 표면상의 구실일 뿐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표문을 반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총을 억류해 버린다. 이듬해 조선은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이번에도 역시 표문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억류된다. 조선 정부가 명나라의 진의를 알게 된 건 그때다. 명 황실에서 표문을 지은 사람을 보내라고 다그친 것이다. 물론 그 지은이는 다름아닌 정도전(鄭道傳)이다.
▲ 1722年 英祖朝鮮國王世弟冊封誥命
이제 사태는 명확해졌다. 명나라는 처음부터 정도전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왜? 정도전은 조선의 기획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명나라는 한반도에 조선이 들어서는 것보다 고려의 온건파이자 친명파인 개혁 세력이 집권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서 환골탈태한 고려 왕조가 적극적인 친명 정책으로 나와 충실하게 사대해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역성 쿠데타가 발생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새 나라가 생겨났다. 게다가 그 주체 세력은 이색(李穡)과 정몽주 등 적극적인 친명파를 제거하고 집권했다. 따라서 명나라의 의도는 조선의 브레인이자 기획자인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에게서 충성의 다짐을 받아둬야겠다는 것이다【물론 고려 말에는 정도전도 친명파였으며, 새 국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보듯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사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보기에 이성계와 정도전은 중국의 승인 없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한 일종의 ‘반역자’다. 명 황실에서 특히 정도전(鄭道傳)을 밉본 이유는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사건 탓도 있다(비록 범행 자체는 이방원이 꾸민 것이지만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았으면 쿠데타가 성공하기 어려웠으니 정도전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몽주는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던 1384년에 사신으로 와서 그 관계를 개선하는 데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정도전 자신도 당시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함께 명에 갔었으니 명 황실이 정도전을 어떻게 볼지는 명백하다)】.
그런 진의를 알고서도 호랑이굴로 찾아갈 바보는 없다. 정도전은 한 해 동안 몇 차례나 중국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대타로 다른 후배 관료들을 보내면서 버틴다. 결국 이 사건은 1년이상 질질 끌다가 1396년 7월 표문 짓는 일에 참여했던 정탁(鄭擢, 1363~1423)과 권근(權近, 1352~1409)이 명나라에 가서 사죄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되지는 않았음을 명나라도 정도전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표문의 근본 목적인 이성계의 책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명나라는 다시 그것을 이용해서 뭔가 꼬투리를 잡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최대의 피해자는 정도전이 될 터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중대 결심을 한다. 바로 명나라에게 무력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 초에 있었던 랴오둥(遼東, 요동) 정벌인데, 계획은 있었어도 실제 집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정벌이라 할 것도 없다. 일단 정도전은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대를 증강하고 예행 연습도 하는 등 나름대로 정벌의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게 ‘시위용’이라는 것은 정도전(鄭道傳)도 명나라도 알았고, 아마 참가한 병사들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조선 군대의 힘으로 랴오둥을 정벌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을 뿐 아니라, 정도전의 최대 목표는 어떻게든 이성계의 책봉을 받아내는 것인데, 책봉을 바라는 나라가 책봉을 주는 나라를 공격해서 그 목표를 이루려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이 계획은 1398년 사건의 양 당사자인 주원장(朱元璋)과 정도전이 죽음으로써 끝내 계획에만 머물고 만다【기본적으로 친명파이자 사대주의자였던 정도전이 비록 계획뿐이지만 감히(?) 랴오둥 정벌을 계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명나라가 신생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은 고려 초기 광종(光宗)의 정책과 닮은 데가 있다.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통일제국으로 성립하자 광종 역시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다가 12년 뒤에야 비로소 송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그래도 고려 초 광종은 잠시나마 독자적인 연호를 쓸 만큼 강경 노선을 취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은 그 정도까지 버틸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 배산임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도전(鄭道傳)은 북한산을 뒤로 하고 한강을 앞에 둔 천혜의 도습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새로 지었다. 그림은 경복궁의 전경인데, 이것은 19세기 말에 중건된 모습이고 처음 지을 무렵에는 이보다 훨씬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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