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다
5-11. 자공이 말하였다. “저는 남이 저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남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5-11.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야! 그것은 네가 쉽게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
이 장에 대한 해석은 미묘한 차이 같지만, 신주와 고주의 해석이 크게 다르다. 나는 고주의 해석을 따랐다. 고주와 신주의 차이는 자공의 제1문장과 제2문장을 단절적으로 보느냐, 연속적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고주는 양자를 단절적으로 파악하는데 반하여, 신주는 양자를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고주는 우선 ‘가(加)’라는 동사를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본격적으로 해석한다.
‘가(加)’라는 것은 능욕(능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加, 陵也.
즉 물질적ㆍ정신적 폭력이나 압력을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주는 ‘가(加)’를 그렇게 강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문장에 있어서 첫 문장이 아(我)로 시작하고, 둘째 문장이 오(吾)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사태이다. 왜 꼭 그렇게 되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내릴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는 텍스트 상의 어떤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
먼저, 신주는 이 양자를 연결하여 하나의 문장처럼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그 해석은,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저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곧 주자가 이 「공야장(公冶長)」 11의 문장을 하론(下論)의 「안연(顔淵)」 2와 「위령공」 23에 나타나고 있는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과 동일한 맥락의 명제로서 풀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은 유가철학에 있어서 칸트가 말하는 바, 정언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유가철학의 모든 도덕적 명제가 연역되어 나올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정언명령이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한에 있어서 그 보편적 질서를 위하여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하론(下論)의 「안연」과 「위령공」에서는 정형화된 맥심(maxim)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대학(大學)』의 전(傳) 10장에서 말하고 있는 ‘혈구지도(絜矩之道)’와 같은 것으로서 발전적으로 개념화되었다. 물론 「안연」과 「위령공」, 그리고 『대학』은 같은 시대정신의 소산이다. 따라서 나는 이 「공야장(公冶長)」 11의 언급은 「안연」 「위령공」 『대학』에서와 같이 격률화되기 이전의 소박한 형태의 담론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나 ‘혈구지도(絜矩之道)’와는 다른 어떤 자공의 소박한 독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장의 언급은 보다 소박한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 고주는 자공의 두 명제를 단절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가(加)를 능(陵)의 뜻으로 구체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 해석한다. 그러면 그 뜻은 이렇게 될 것이다.
저는 남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我不欲人之加諸我也.]
저 또한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吾亦欲無加諸人.].
공자는 말한다: “사야! 바로 그것이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남이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으려면 타인의 폭력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으려면 내 자신이 철저히 비폭력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바래야 할 지고의 이상이다. 그렇게 자공의 말처럼 원한다[欲]해서 곧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공자의 사(士)의 집단은 군사집단적인 성격도 있었기 때문에 폭력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사의 이상을 타인과 나를 철저히 비폭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그 방향성의 구극에 인(仁)이 있었다. 따라서 네가 쉽게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타이르는 공자의 의식 속에는 ‘무가저인(無加諸人)’이란 인(仁)만큼이나 쉽게 허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공이 말하기를, 남이 나에게 가(加)하기를 원치 아니 하는 일을 나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인자(仁者)의 일이라서 억지로 힘써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자공 네가 미칠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子貢言我所不欲人加於我之事, 我亦不欲以此加之於人. 此仁者之事, 不待勉强, 故夫子以爲非子貢所及.
○ 정이천이 말하였다: “내가 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치 않는 일을 나도 또한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 함은 인(仁)이요, 나에게 베풀어보아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아니 하는 것은 서(恕)이다. 서(恕)라며는 자공이 혹시 힘쓸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인(仁)이라면 자공이 미칠 바가 아니다.”
○ 程子曰: “我不欲人之加諸我, 吾亦欲無加諸人, 仁也;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恕也. 恕則子貢或能勉之, 仁則非所及矣.”
나 주희는 말한다: ‘무가저인(無加諸人)’의 ‘무(無)’는 스스로 그러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요, ‘물시어인(勿施於人)’의 ‘물(勿)’은 금지를 일컬음이니, 이것이 곧 인(仁)과 서(恕)의 구별이다.
愚謂無者自然而然, 勿者禁止之謂, 此所以爲仁恕之別.
정주학의 논의가 매우 미세한 데에 미치고 있다. 거창한 이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세목의 미묘한 논의가 쇄언(瑣言)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동방의 학문은 이렇게 일상적 덕목을 주제로 하여 성립했다고 하는 그 문명의 특질을 잘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21세기에는, 과연 ‘학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20세기를 통하여 우리가 서구문명을 흡수해야만했던 강박관념 속에서 성립된 학문’이라는 개념 자체의 근원적 재고가 필요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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