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과 천도를 거의 말하지 않던 공자
5-12.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인간의 본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얻어 들을 수가 없다.” 5-12.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
1장부터 11장까지는 모두 공자가 주변의 친근한 제자들을 평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12장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자공이 공자를 평한 이야기다. 1장부터 13장까지를 공자의 제자에 대한 평어 모음이라고 말한다면, 그 중 12장과 13장은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11장까지의 편집에 대한 부록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브룩스는 본 장을 양화편 뒤로 재편시켰다. 아마도 이것은 자 공이 훗날에 그의 스승을 회상하면서 한 이야기로서 후대에 구성된 파편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형이하학적인 것이며 형이상학적 본체론에 관한 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통설이다. 그리고 이 장의 파편은, 공자의 사상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구체적이며 즉물적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프래그머틱(Pragmatic, 실용적인)한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인용되는 너무도 유명한 『논어』의 구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맥락에서 이 장이 료해되어야 할까?
우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라는 이원적 인식의 틀 속에서 공자의 사상이 형이하학적 성격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자공의 언급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공자 자신은 호교론적 시대(apologetic age)를 산 사람이 아니며, 그에게 문장(文章, 형이하학적 차원)과 성ㆍ천도(性與天道, 형이상학적 차원)라는 어떤 이원적 인식의 틀이 있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본장의 언급을 자공이 살아생전에 공자의 사상을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은 자공이라는 캐릭터를 빌어 공자 사상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후대의 어떤 학단의 요구를 반영 하고 있는 것이다.
성(性)에 관한 본격적 논의는 맹자(孟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맹자(孟子)가 공자의 사상을 펼치기 위하여, 그 인정(仁政)의 내용을 이루는 도덕주의의 선험적 근거를 인간성 자체 내에 발견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모랄 아프라이오리즘(moral apriorism)이 인성 내에서 확보되어야만 그 인정(仁政)의 주장의 보편성과 필연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맹자(孟子)의 성론(性論)은 양주(楊朱)의 위아(爲我)주의(extreme egoism)나 묵적(墨輩)의 겸애(兼愛)주의(extreme altruism)에 대한 아폴로지로서 형성된 것이다. 공자는 단지 ‘성상근(性相近)’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구비된 성향이었을 뿐이다.
천도(天道)에 관한 논의는 『장자(莊子)』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천도는 자연과학적인 하늘[天]의 법칙[道]이 아니다. 그것은 유위(有爲)에 대한 무위(無爲)의 아폴로지다. 그가 말하는 천도(天道)는 천지지감(天地之鑒)이요, 만물지경(萬物之鏡)이다. 허정염담(虛靜恬淡)하고 적막무위(寂漠無爲)한 천도(天道)야말로 천지의 기준[天地之平]이며, 도덕의 지고한 경지(道德之至)다. 그것은 인정(仁政)의 남면(南面)조차 거부하는 초윤리적인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천도(天道)는 노자적 자연주의의 극단적 아폴로지며, 현세적 가치관의 집착에 대한 초월주의인 것이다.
바로 여기 자공이 부자(夫子)의 문장(文章)은 들어볼 수 있으나, 성(性)과 천도(天道)는 들어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이미 맹자(孟子)와 장자(莊子)의 도전을 거친 이후에 유교학단 내에서 공자의 사상은 맹자(孟子)의 성선론(性善論) 이나 장자(莊子)의 초세간주의적 측면으로 규정될 수 없는 그 이전의 소박한 인문주의의 표방일 뿐이라고 하는 강력한 후대의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장(文章)이란, 문(文)의 장(章)이다. 문(文)의 장(章)이란 문(文)의 질서이다. 여기서 문(文)이란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의 문화다. 그리고 그것은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서 문자를 매개로 해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성격의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문화란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전통이요 질서다. 그의 문자가 대상으로 한 것은 예악(禮樂)이요 형정(刑政)이다. 이러한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근거로서 공자는 인(仁)을 말했을 뿐, 성(性)이나 천도(天道)라는 어떤 형이상학적 논란을 일삼지 않았다. 인(仁)은 느낌이요, 성(性)은 개념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자공이 ‘듣는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음악도 듣는 것이고 당시의 『시』, 『서』라는 것도 암송되어 귀로 들려왔던 것이다. 귀로 듣는 문화의 총체를 ‘문장’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성(性)에 관한 『논어』 중의 언급은, 앞서 말했듯이 「양화(陽貨)」 2의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서로 비슷한 것이나 후천적 습득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성상근야(性相近也), 습상원야(習相遠也)]’라 한 것이 그 유일한 것이고, 또 천도(天道)에 관한 언급도 「양화(陽貨)」 19에 ‘하늘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사시는 잘 운행되고 있고, 온갖 만물이 잘 생성되고 있는데, 하늘이 과연 무엇을 말하겠는가[천하언재(天何言哉)! 사시행언(四時行焉), 백물생언(百物生焉), 천하언재(天何言哉)]!’라 한 것이 있다.
우리는 양화의 성립연대를 맹자나 장자의 생존시대 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공자의 성(性)과 천도(天道)에 관한 언급조차도 맹(孟)ㆍ장(莊)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양화(陽貨)」의 ‘천하언재(天何言哉)!’란 탄식은 『장자』 「지북유(知北游)」 5에 나오는 ‘천지는 거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고, 사시는 명료한 법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의론치 않는다[천지유대미이불언(天地有大美而不言), 사시유명법이불의(四時有明法而不議)]’라 한 것과 거의 동일한 주제를 달리 언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곽점죽간과 상박죽간에서 『성자명출(性自命出)』, 『성정론(性情論)』과 같은 문헌이 나오면서 공자의 ‘성상근(性相近)’으로부터 맹자의 ‘성본선(性本善)’의 주장으로 이어지는 사상발전경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 장의 성립연대를 따진다고 한다면 당연히 맹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장(文章)’이란 덕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나 위의(威儀)ㆍ문사(文辭)가 다 이에 속한다. ‘성(性)’이라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바의 천리(天理) 이다. ‘천도’라는 것은 천리가 스스로 그러한 바의 본체(本體)이니, 기실은 성과 천도가 하나의 리(理)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자의 문장(文章)은 날로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같이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性)과 천도(天道)의 문제에 이르게 되면 부자께서 일부러 말하실 일이 없으니 배우는 자들이 들을 기회가 없었다. 대저 성인의 문하에서는 가르침 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으므로, 자공은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과 천도에 관하여 얻어 듣고는 그 훌륭함을 감탄한 것이다.
文章, 德之見乎外者, 威儀文辭皆是也. 性者, 人所受之天理; 天道者, 天理自然之本體, 其實一理也. 言夫子之文章, 日見乎外, 固學者所共聞; 至於性與天道, 則夫子罕言之, 而學者有不得聞者. 蓋聖門敎不躐等, 子貢至是始得聞之, 而歎其美也.
○ 정이천이 말하였다: “이는 자공이 부자의 궁극적인 논변을 듣고서 탄미한 말이다.”
○ 程子曰: “此子貢聞夫子之至論而歎美之言也.”
주자는 정이천의 생각을 계승하여, 자공이 평소에는 성과 천도에 관하여 들을 기회가 없었다가 어느 시점에 듣고나서 이 찬미의 탄성을 발출하였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주자나 정이천이나 이런 문제에 관한 생각이 매우 졸렬하다. 앞서 충분히 논의했지만, 우선 공자의 사상을 문장과 성ㆍ천도라는 대립적 카테고리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문장과 성ㆍ천도를 대립적으로 설정한다면 공자가 문장은 말했어도 성ㆍ천도는 말하지 않았다는 자공의 멘트는 매우 적확한 것이다. 이러한 자의 멘트를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공이 성ㆍ천도에 관하여 평소 얻어 듣지 못했다가 어느 차제에 얻어 듣고 찬미의 탄성을 발한 것이 본 장의 내용이라고, 그 배면의 분위기까지 풀이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라고 해야 옳다. 공자에게 있어서 문장(文章)이라는 것은 당연히 성(性)과 천도(天道)를 배경으로 한 것이며, 성과 천도는 공자의 문장 속에 배여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성과 천도는 문장의 세계에서 객화시켜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자의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하는 정신이다(14-37). ‘지아자(知我者)는 천(天)’일 것이나, 천이란 나로부터 객관화시켜 개념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장은 들을 수 있어도 성과 천도는 들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공의 멘트는, 공자의 삶과 사상의 핵심을 파악한 자의 느낀 대로의 소감일 뿐이다.
거기다 대고 성문(聲聞)의 가르침에는 등급이 있다는 둥, 마치 공자가 형이상학적 최고의 진리에 관해서는 설법의 비전(秘傳) 사다리가 있어 단계적으로 관문을 통과한 제자만이 마지막 순간에 성과 천도가 계시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꾸며대고, 이장의 내용이 그러한 비전의 진리를 획득한 자공이 찬미의 탄성을 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주학이 얼마나 전등(傳燈)의 신화에 매달려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현실적 불교의 나쁜 점은 충실히 계승하려고 하는 정주학의 본색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조선유학은 이러한 도통관념을 계승하여 조선왕조의 사상을 통제했던 것이다.
공자는 상식인이다. 그에게는 비전의 진리가 없다. 공자의 가르침에는 엽등(등급을 건너뜀)의 타부를 운운할 건덕지가 전무하다. 공자가 튕기는 금(琴) 줄 하나하나에 성(性)과 천도(天道)가 배어있는 것이다. 공자는 실로 문장을 말했지만 성과 천도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류사에서 공자처럼 성과 천도를 깊이있게 말한 성인도 없다. 상달(上達)의 세계는 하학(下學)에 충실한 자들에 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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