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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4. 공문자가 문(文)이란 시호를 받은 이유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야장 제오 - 14. 공문자가 문(文)이란 시호를 받은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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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공문자가 문()이란 시호를 받은 이유

 

 

5-14. 자공이 여쭈어 말씀드렸다: “공문자(孔文子)를 어찌하여 문()이라 시호 하였습니까?”
5-14.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영민한 사람인데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문이라 일컬은 것이다.”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14장에서부터 분위기는 일신된다. 여기서부터 24장까지는 당대 혹은 과거의 사회적 전범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공자의 평어가 수록되어 있다. 공자의 학내의 가까운 제자의 범위를 벗어난 인물들에 대한 평론이 수집되어 있는 것이다. 21만이 공자의 삶의 역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예외적이다. 잘못 삽입된 파편일 수도 있다.

 

공문자(孔文子)는 위령공의 맏딸, 백희(伯姫)의 남편이다. 그러니까 위령공의 맏사위다. 공문자(孔文子)와 백희(伯姫) 사이에서 난 아들 공회(孔悝)를 자로(子路)가 섬기다가 그의 삶의 최후를 맞이한 이야기는 이미 서막에서 언급하였다. 공문자(孔文子)는 위나라의 중신(重臣)이었다. 그의 성()은 공(), ()은 어(), 문자(文子)라는 것은 그의 사후에 붙여진 시호다. 시호[]라는 것은 한 사람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붙여지는 것인데, 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시호가, 좋지않은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시호가 붙여진다. 일주서(逸周書)시법해(諡法解)54에는 어떤 인물에 어떤 시호가 붙여지는가에 관한 법칙이 논의되고 있는데, 그중 ()’이라는 시호는 최상에 속하는 것이다. 천지를 경위(經緯)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도덕이 박후(博厚)한 것을 문이라 하고, 배움에 열심이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자혜(慈惠)롭게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예를 존중하는 것을 문이라 하고, 백성들에게 작위를 주는 것을 문이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經緯天地曰文, 道德博厚曰文, 學勤好問曰文, 慈惠愛民曰文, 愍民惠禮曰文, 錫民爵位曰文].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시호를 받은 공어(孔圉)라는 인물은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칭송할 만한 인물로서 간주하기 어려운 요소가 그의 전기 속에 비쳐져 있으며, 또 그러한 요소가 공자의 삶과 직접적으로 얽혀있다는 데 이 장의 해석의 묘미가 있다.

 

좌전에 의하면 애공(哀公) 11 겨울(BC 484), 그때 68세의 공자는 때마침 위()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위나라에는 이 공문자로 인하여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위나라의 태숙(大叔)인 젊은 호남자 질()은 송()나라의 자조(子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잉첩으로 따라온 여동생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조(子朝)가 위나라를 떠나 자기나라로 돌아가자, 위나라의 공문자(孔文子)는 태숙 질로 하여금 자조(子朝)의 딸인 정처와 강제로 이혼케 하고, 자기의 딸인 공길(孔姞)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숙 질은 전부인의 여동생을 잊지 못하고, 부하를 시켜 그 여자를 꼬셔오게 하여 려()라는 곳에 별궁을 짓고 그녀를 살게 하였다. 결국 태숙 질은 두 부인을 거느리게 된 셈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공문자(孔文子)는 태숙 질을 치려고 공자에게 상담을 한 다. 공자는 공문자(孔文子)가 질을 치는 것을 극구 말렸다[如二妻. 文子怒, 欲攻之, 仲尼止之]. 그러자 공문자는 그의 딸 공길(孔姑)을 데려오고 말았다. 그 후 태숙 질은 민심을 잃어 결국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위나라 사람들은 태숙의 자리에 질의 동생인 유()를 세웠다. 그러자 공문 자(孔文子)는 그의 딸 공길(孔姞)을 다시 유()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또 공문자(孔文子)가 죽자 그의 부인이었던 백희(伯姫)가 젊고 잘 생긴 노비 혼량부(渾良夫)와 정을 통하였고, 그 어리석은 혼량부를 매개로 해서 괴외(蒯聵)가 다시 출공을 축출하고 위나라로 복귀하는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그에 반항한 자로(子路)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야기는 이미 서막에서 전술한 바와 같다. 이러한 그의 사후 사정을 보더라도 공어(孔圉)라는 인물의 됨됨이가 결코 훌륭하다고 간주하기는 힘든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사태의 판단이 멀 리 미치지 못하는 좀 칠칠치 못한 인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자공의 첫 질문의 뉴앙스는, 그렇게 칠칠치 못한 인물에게 왜 문자(文子)라고 하는 훌륭한 시호를 주었을까? 과연 그 인물이 그러한 시호에 합당한 인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다. 공자가 공문자(孔文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문자(孔文子)의 외형적 상황과는 달리, 퍽으나 공자(孔子)에게 인간적으로 극진한 대접을 했던 것 같다. 공자(孔子)의 공문자(孔文子)에 대한 평어는 의외로 매우 관대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인간이 외면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결과적 행위보다는, 그 인간의 내면적 삶의 원칙 같은 것을 존중하고 있고, 그 원칙의 보편적 가치를 개인적 호오와 무관하게 자신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민이호학(敏而好學)’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민첩하게배우기를 좋아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보다 보편적인 해석은 그가 매우 영민한 사람이래서, 즉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래서, 지긋이 앉아서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호학(好學)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찬사다. 호학(好學)하면 문()이라는 시호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변호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자격으로 공자가 제시하는 덕목은 나 도올이 항상 가슴에 품고 살면서 실천에 옮기는 논어의 명구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不恥下問].

 

많은 사람들이 유교를 예교의 권위주의로 생각한다. 공자에게는 권위주의가 없다.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묻는 것이 곧 호학이다. 배움[()]이란 묻는 것[()]이다. 물음이란 묻는 대상을 가리지 아니한다. 공문자는 태숙 질을 치려 할 때 공자에게 물었다. 그리고 공자의 말을 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개인적 체험이 공자의 언급의 배경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진솔하게 물을 줄 아는 성품이 지도자의 제일의 덕성이다. 오늘 우리나라에 참다운 지도자가 없는 것도 이러한 덕성의 결여가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라는 시호는 최고의 명예다. 당나라 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가 문공(文公)이란 시호를 얻은 것이 그 한 예이다. () 이후에는 두 글자의 시호가 보통이었는데, ()을 관()한 인물들은 모두 일류의 인물이었다. ()의 사마광(司馬光)이 문정공(文正公), 구양수(歐陽修), 소동파(蘇東波)가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얻었다. 문정(文正)이 최고이고 문충(文忠)이 그 다음 급이다. 명청(明淸)대에는 진사(進士)출신의 대신(大臣)은 모두 문()자를 시호로 받았다. 명나라 화가 동기창(董其昌)이 문민공(文敏公), 청나라 시인 문어양(文漁洋), 언어학자 왕인지(王引之)가 모두 문간공(文簡公), 금석가 반조음(潘祖蔭)이 문근공(文勤公)으로 시()되었다. 청말에 내려오면 문()의 시()의 가치가 좀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그러나 증국번(曾國藩)에게 문정(文正)이 이홍장(李鴻章)에게 문충(文忠)이 시()되었다. 문정(文正) ㆍ문충(文忠)은 역시 최고의 시호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정(文正)의 시호를 얻은 자로는 조광조(趙光祖),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을 들 수가 있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얻은 자로는 정몽주(鄭夢周), 하륜(河崙), 신숙주(申叔舟), 유성룡(柳成龍) 등을 들 수가 있다. 정도전(鄭道傳)은 문헌(文憲), 김장생(金長生)은 문원(文元), 성삼문(成三問)은 충문(忠文),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문순(文純), 율곡 이이(李珥)는 문성(文成),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문도(文度)이다.

 

수양대군의 찬탈에 가담한 신숙주(申叔舟)가 문충(文忠)을 얻고, 성삼문(成三問)이 충문(忠文)을 얻은 것은 찬탈을 거부하고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은 충신이 오히려 낮게 평가되는 서글픈 역사의 굴레를 되씹어보게 한다.

 

 

()’는 거성이다. 공문자(孔文子)’는 위나라 대부이다. 이름이 어()이다. 대저 인성(人性)이 명민()한 자는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고, 지위가 높은 자는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가 많다. 그러므로 시호를 내리는 법에 근학호문(勤學好問)’배우기를 열심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주희는 일주서를 보고 인용한 것이다. 그 배움의 넓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는 학근호문으로 되어있다하는 자를 ()’으로 한다고 했으니 이 또한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어가 문이라는 시호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 去聲. 孔文子, 衛大夫, 名圉. 凡人性敏者多不好學, 位高者多恥下問. 故謚法有以勤學好問爲文者, 蓋亦人所難也. 孔圉得謚爲文, 以此而已.

 

소씨가 말하였다: “공문자가 태숙 질로 하여금 본부인을 내쫓게 하고 자기 딸인 공길(孔姑)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그 후 태숙 질은 쫓겨난 본부인의 여동생과 정을 통하였다. 이에 공문자는 노하여 장차 질을 치려고 중니에게 물은 것이다. 중니는 대답치 아니 하고 수레를 명하여 떠나버렸다. 질은 나중에 송나라로 쫓겨 달아났다. 그러자 공문자는 태숙 질의 자리를 이은 질의 아우 유()로 하여금 자기 딸 공길을 또다시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사람의 위인됨이 이 모양인데 죽은 후에 ()’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이 때문에 자공이 의심하여 물은 것이다. 공자께서는 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이 때문에 덮어버리지 아니 하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였으니, 역시 문()이라고 시호할 만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경천위지(經天緯地)’일주서에서 제일 먼저 꼽은 최고의 경지의 문은 아닐 것이다.”

蘇氏曰: “孔文子使太叔疾出其妻而妻之. 疾通於初妻之娣, 文子怒, 將攻之. 訪於仲尼, 仲尼不對, 命駕而行. 疾奔宋, 文子使疾弟遺室孔姞. 其爲人如此而謚曰文, 此子貢之所以疑而問也. 孔子不沒其善, 言能如此, 亦足以爲文矣, 非經天緯地之文也.”

 

 

여기 소씨는 소동파(蘇東波)가 아니라, 소동파의 동생, 소철(蘇轍, 쑤저, Su Zhe, 1039~1112)이다. 우리에게는 보통 소동파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동생 소철이야말로 촉학(蜀學)의 중추적 인물로서 신유학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자는 자유(子由), 호는 영빈유로(潁濱遺老). 삼소(三蘇)의 한 사람인 동시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가우(嘉祐) 2(1057)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한림학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렀다. 폐정개혁에 대한 강력한 소신을 폈지만 희녕(熙寧)의 신정(新政)에는 반대하여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은 유학의 정통을 다루었지만 불교와 노장사상을 조금도 유학과 배치되는 이단으로 생각지 않고, 유ㆍ불ㆍ도를 완전히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 자유자재로 생각하는 특이한 학풍을 수립했기 때문에 매우 기발한 신설이 많았다. 우리가 사실 기발하다고 평하는 것 자체가 도학의 정통주의의 세뇌를 거쳤기 때문이요, 그 시대의 뛰어난 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중용(中庸)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을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본체나, 노자가 말하는 ()’와 동일시한다. 이름이 다를 뿐 실제로는 하나라는 것이다. ‘()’()’의 다른 이름이며, ()이란 도()가 깃드는 곳이다. 도라는 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것이며 사람에게 있을 때 성()이라 할 뿐이다.

 

()이라는 것은 무소불애(無所不愛)한 것이다. 공자가 인한 자라야 사람을 좋아할 줄도 알고 사람을 미워할 줄도 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인의 사랑에는 차등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무소불애(無所不愛)는 같은 논리에 의하여 무소불오(無所不惡)도 될 수 있다. 유교가 너무 차별적 분별심을 가지고 세상을 보려는 것을 경계하였다. 공자가 인의 예악(仁義禮樂)’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려는 것이나, 노자가 그런 덕목을 절기(絶棄)하여 천하를 다스리려는 것이나 결국 하나의 이치라는 것이다. 하학하여 상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를 체현하여 사심(私心)에서 벗어나고,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는 노자천지불인(天地不仁)’ 사상을 중시하여 목적론적, 조작적, 유신론적 세계관에 반대하였다. 천지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만물의 스스로 그러 함을 존중할 뿐이다[聽萬物之自然]. 만물은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죽는 것이다[萬物自生自死]. 내가 학대를 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내가 인을 베풀어서 사는 것도 아니다[死非我虐之, 生非吾仁之也]. 인성의 본체 또한 천지자연의 리()일 뿐이다.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자신과 세계를 몰아가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다.

 

주희는 소시랑(蘇侍郞)은 우리의 정통 유도를 자꾸만 노자에 합치시키려고 하고[合吾儒于老子], 또 불교를 가지고 땜질을 하려 하니[又幷釋氏而彌縫之], 어긋남이 심하다 할 것이다[可謂舛矣].”라 하여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근세유학이 초기에는 얼마나 폭넓은 사고를 했는가 하는 것을 촉학(蜀學)의 일면을 통하여서도 규탐(窺探)할 수 있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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