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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 중궁은 남면할 수 있겠구나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옹야 제육 - 1. 중궁은 남면할 수 있겠구나

건방진방랑자 2021. 6. 2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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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궁은 남면할 수 있겠구나

 

 

6-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중궁의 이름)은 남면케 할 만하다.”
6-1. 子曰: “雍也可使南面.”
 
중궁(仲弓)이 자상백자(子桑伯子)에 관하여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의 간솔함은 괜찮다.”
仲弓問子桑伯子, 子曰: “可也簡.”
 
중궁이 말하였다: “자기는 공경함에 거()하면서 남에게 간솔하게 행동하고, 그렇게 백성들을 살핀다면 괜찮다고 할 만도 하겠지요? 그러나 자기도 간솔함에 거()하면서 남에게도 간솔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간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仲弓曰: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簡乎?”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옹의 말이 옳다.”
子曰: “雍之言然.”

 

논어의 모든 장이 그러하듯이, 본 장의 의미는 매우 애매하고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구석이 많다. 사실 우리의 해석이 단장취의적(斷章取義的)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채록된 이야기들의 현장적 맥락이 명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 등장하는 자상백자(子桑伯子)라는 인물에 관하여 우리는 하등의 명료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질 못하다. 고주()에도 이미 3세기 왕숙(王肅)의 말을 빌어 백자는 쓰여진 것이나 전하는 것에 드러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백자(伯子), 서전 무견야(書傳無見也)]’라고 밝히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가장 정확한 기술일 것이다.

 

혹자는 이 자상백자(子桑伯子)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11편에 나오는 자상호(子桑戶)와 동일인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하고, 산목(山木)5편에 나오는 자상호(子桑雽)도 자상호(子桑戶)의 다른 표기일 뿐이며, 자상백자(子桑伯子)도 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비정한다. 공자는 자상호()가 죽었을 때 조문객으로 제자 자공(子貢)을 보내었고, 그를 방외지인(方外之人: 세간 밖에서 노니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산목(山木)편에서는 공자가 자상호(子桑雽)에게 자기 인생의 쓰라린 경험들을 고백하면서 충언을 구한다. 자상호(子桑雽)는 공자에게 쓸데없는 인간관계에서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인간의 육체는 자연스러운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제일이고, 감정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제일이다[형막약연(形莫若緣), 정막약솔(情莫若率)]’라는 말을 던진다. 이들 모두가 도가계열의 현인(賢人)이며 은자(隱者)인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공자의 설화들이, 대부분 도가계열의 기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꾸며낸 픽션에 불과하지만, 그 픽션이 어느 정도 공자와 관련된 구전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한다면 자상백자(子桑伯子)와 자상호(子桑戶)-자상호(子桑雽)의 연관성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할 수만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상백자(子桑伯子)를 어떤 캐릭터로 설정하냐에 따라서 ()’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상백자(子桑伯子)를 도가적 은인(隱人)으로 설정한다면 그것은 곧 바로 이임기민(以臨其民)’이라는 구절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임기민(以臨其民)’은 분명히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매우 현실적 정치지도자의 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 치방(治方)에 관한 정치적 맥락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 의미를 주자(朱子)번거롭지 아니함[불번(不煩)’이라 하였고, 공안국(孔安國)의 고주(古注)관대하고 소략함[관략(寬略)]’이라 하였고, 황간(皇侃)의 소()소홀하고 간략함[소간(疎簡)]’이라고 하였다. ()간이라 함은 소략하고 거칠고 굵은 것을 말한 것이다. 자세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위소대(謂疏大), 무세행야(無細行世)]’라 한 것으로 미루어 말하면, 행동방식이 거칠고 대범한 데는 있으나 디테일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개인의 처세에서 보여지는 행동거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governing method) 즉 치세지방(治世之方)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치세지방(治世之方)이 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치세지방이 간()하다는 뜻은 우선 치자가 백성들을 대하는 방식이 대범하고 소략하여 디테일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이다. 즉 소소한 번문욕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간섭주의, 방임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상백자(子桑伯子)가 도가문헌에서 무위를 실천하는 대종사(大宗師)의 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간()이라는 논어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자(莊子)라는 서물에서 그려진 자상호(子桑戶) 이미지에서 논어속의 자상백자(子桑伯子)의 사상적 성향을 추론하기보다는, 오히려 논어에서 규정한 자상백자(子桑伯子)의 간()의 이미지 때문에 후대 도가문헌에서 자상(子桑)과 관련된 설화들이 윤색되기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미 위정(爲政)1위정이덕(爲政以德), 비여북신(譬如北辰)’해설에서 설파하였듯이, 공자 당대에 이미 도가적 성향의 어떤 사상이나 행동방식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결코 후대의 유가나 도가라고 하는 어떤 가적(家的)인 구획에 의하여 한정되는 실체적 가치체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태도가 대범하고 호방하여 간섭치 않는 무위(無爲)적 가치관은 당대에 이미 한 치세의 방략으로 보편화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정현(鄭玄)은 자상(子桑)을 진()나라의 대부(大夫)라고 주를 달고 있지만진목공(秦穆公)이 스승으로 모신 공손지(公孫枝)가 곧 진대부(秦大夫) 자상(子桑)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고유주(高誘注), 대체적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상백자(子桑伯子)는 노()나라 사람이며, 지배자계급에 속하는 어떤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집주(集註)의 설()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중궁(仲 弓)이나 공자(孔子)나 자상(子桑)이나 모두 같은 시대의 노나라 사람들이며, 이들은 서로 연관된 구조 속에서 평론(評論)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자상(子桑)과 공자(孔子)의 관계를 말해주는 기묘한 설화가, 서한(西漢) 유향(劉向)의 찬()으로 전하는 설원(說苑)31에 실려 있다.

 

 

공자가 자상백자(子桑伯子)를 찾아갔을 때, 백자는 옷도 입지 않고 관도 쓰지 않은 채 거처하고 있었다. 공자의 제자들이 여쭈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왜 이따위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질이 아름다우나 그 문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문을 갖추도록 말하여 주려는 것이다.” 공자가 떠나자, 자상백자의 문인들이 심기가 불쾌하여 그들의 선생께 여쭈었다. “선생님! 어찌하여 공자같은 사나이를 접견하셨습니까?” 그러나 백자는 답하였다: “그의 질이 아름다우나 그 문이 너무 번잡스럽다. 그래서 나는 그를 설득하여 그 문을 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말한다. 문과 질이 다 골고루 닦아진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질만 있고 문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이야(易野)라고 한다. 자상백자는 이야의 한 전형이다. 그는 사람의 도리를 소와 말에 동일시하려 한다. 그래서 니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백자는 너무 간하여 번거로움이 없다. 나는 그에게 문을 갖추도록 말하려하였다.”

孔子見伯子, 伯子不衣冠而處. 弟子曰: “夫子何爲見此人乎?” : “其質 美而無文繁, 吾欲說而文之.” 孔子去, 子桑伯子門人不悅, : “何爲見孔 子乎?” : “其質美而文繁, 吾欲說而去其文.” 故曰文質修者, 謂之君子; 有質而無文, 謂之易野. 子桑伯子易野, 欲同人道於牛馬, 故仲尼曰: “大 簡無文繁, 吾欲說而文之.”(황소皇疏에 실려있는 대로 인용하였다. 설원(說苑)』 「수문의 문장은 약간 다르다.)

 

 

주희는 집주(集註)에서 공자가어라는 책에는 자상백자가 의관을 갖추지 않고 거처하고 있어서, 공자께서 인도를 우마에 동일시하려한다고 꾸짖으시는 장면이 실려있다[가어설백자불의관이처(家語說伯子不衣冠而處), 부자기기욕동인도어우마(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어에는 전혀 이러한 내용이 실려있지 않다. 이것은 주희가 출전을 잘 조사해보지 않는 데서 온 실수에 불과하다. 주희가 여기서 가어의 말로서 인용한 내용은 유향의 설원(說苑)』 「수문(脩文)편에 속하는 것이다. 군서(群書)를 박람한 주희와 같은 대가도 이런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보면 여하한 고전을 대할 때든지 권위를 앞세우지 말고 치밀한 조사를 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설원의 고사로써 옹야본문의 의미맥락을 해설할 수는 없다. 다산(茶山)이 명료하게 지적한 대로, 이 유향의 설원(說苑)의 기사는 논어로 인하여 부연된 것이므로, 그 말()을 가지고 본()을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此因論論而演之爲說, 未足深信].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이야의 간의 의미가 공자와 멀지 않은 시대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되어 내려왔는가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설원의 설화가 꾸며지게 되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의 한 이해방식의 전승 속에서는 간의 의미는 곧 옹야16에서 말하고 있는 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이상에서, ()이 문()을 승()하고 있는 야()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원의 고사는 너무 이 간()의 의미맥락을 공자와 자상백자간의 개인적 인생처세태도의 차이로서 규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가에 대하여 그 본문의 맥락을 세밀히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것은 중궁(仲弓)이라는 공자의 제자가 의도적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자상백자(子桑伯子)라는 인물에 관한 공자(孔子)의 평가를 듣고 싶어서 공자에게 문의함으로써 발단이 된 것이다.

 

중궁(仲弓)은 염옹(冉雍)의 자()이다. 공자보다 29세 연하로서 추정되는 이 염옹이라는 제자에 관해서는 이미 5-4에서 상술하였다. 염옹은 염백우(冉伯牛)ㆍ염구(冉求)와 함께 사과십철(四科十哲)에 든 인물로, 이들 3인이 모두 한 집안사람이라는 것도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3-6). ‘()’이라는 글자의 발음이 염색한다는 ()’자와 상통한다는 점에 미루어, 이들은 노나라 수수(洙水) 냇가에 거처하던 염색장인집안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튼 염옹은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못난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으며 말재주가 없는 매우 투박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물에 대하여 공자는 가사남면(可使南面)’이라는 격찬의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남면(南面)’이란 상식적으로 신하를 맞이하는 인군(人君)의 자리이며, 따라서 남면은 보통 정치적 지도자로서 국정을 다스리는 행위로서 해석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이 남면(南面)의 주체의 지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포씨(苞氏)나 정현(鄭玄; 可使南面者, 言任諸侯. 吐魯番阿斯塔那 184號 墓寫本), 황소(皇疏), 형병소(邢昺疏)는 모두 제후(諸侯)라고 하였고, 유향(劉向)은 천자(天子)를 지칭한다 하였고, 또 후대의 주석가들은 경대부(卿大夫)의 지위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주희는 남면이라는 것은 인군이 정사를 다스리는 자리이다[남면자(南面者, 인군청치지위(人君聽治之位)]’라 하여 애매하게 말하였고, 그 지위의 특정성을 지칭하질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엔 공자가 이 말을 했을 때는 어떠한 특정한 위계를 지칭한 것이 아니며, 맥락에 따라서 대부(大夫)에서 천자(天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지도자의 가능성을 개방적으로 의미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공자 자신이, 정치적 지도자의 자리는 불가침의 세습적 지위가 아니며, 한 인간으로서 자격만 갖추면 해볼 만한 자리라는 매우 개방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결국 공자 자신도 중궁(仲弓)처럼 천한 신분의 소생으로서 남면(南面)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옹야(雍也), 가사남면(可使南面)’이라는 문구와 그 후의 문구를 독립된 별개의 두 로기온자료로서 간주한다. 아마도 이 두 개는 서로 내재적 연관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염옹이라는 동일한 캐릭터가 연루되어 있으므로 옹야편의 편집자가 한 군데로 몰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희는 이 두 파편에 내재적 연관성을 부여하면서 한 장으로 묶어버렸다. 나는 주희의 분장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한 장으로 묶었지만, 사실은 두 장으로 분장(分章)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체제를 반영할 것이다.

 

옹야(雍也)’()’의 용법은, 고유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로서 그 논의의 주체가 되고 있는 명사를 일단 객관화시키고 약간의 거리를 주면서 강조하는 기능이 있다. ‘옹이라는 아이는정도의 어감이 있을 것이다. 옹이라는 아이는 남면(南面)케 할 만하다라는 공자의 평어는 매우 충격적이다. 앞뒤로 재는 사려가 없이 그냥 툭 던진 말이며, 그 톤이 매우 격렬하기 때문이다. 만약 주자의 구상대로 이 두 파편이 하나의 연속체라고 한다면, 자상백자(子桑伯子)에 관한 논의는, 남면(南面)케 할 만하다는 격찬의 말을 들은 염옹이 그러한 공자의 격찬을 계속 유도해 내기 위한 방편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정치적 지도자의 한 인물에 관한 공자의 평가를 묻고 있는 맥락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공자의 자상백자에 관한 평가는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인색한 것이다.

 

가야(可也), ()’가야(可也)’가 도치되어 강조된 것이다. 그리고 가()라는 평가의 대상은 간()이라는 자상()의 치세(治世)의 측면이다. 그런데 가야(可也)’라는 말은 전폭적 지지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억지로 평가한다면 그 한 측면은 봐줄만 하다는 식의 인색한 표현인 것이다. 주희는 가라는 것은 겨우 괜찮다는 뜻이며 미진함이 있는 말이다[가자(可者), 근가이유소미진지사(僅可而有所未盡之辭)]’라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인색한 평가를 중궁은 매우 긍정적인 전폭적인 평가로 오해하였다. 그래서 약간 자상()을 평가절하하는 논의를 공자의 평어 뒤끝에 첨가하는 맥락이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이러한 맥락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에 대한 논의는 가사남면(可使南面)’에 선행(先行)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상백자를 둘러싼 공자와 염옹의 이야기는 독립적인 파편이며, 그러한 대화 속에서 염옹의 치세(治世)의 요점을 깊게 터득한 자질이 충분히 드러났음으로, 비로소 그가 대중을 제어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것을 허여케 된 것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염옹에게 남면케 할 만하다고 허여할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 간의 논의는 염웅이 남면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소이연(所以然) 을 드러내는 파편으로서 가사남면(可使南面)’에 선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을 편집한 기자가 염옹에 대한 공자의 칭허(稱許)의 말을 먼저 수록하고, 그 칭허의 까닭을 밝히는 대화를 뒤에 부기(附記)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記者先記稱許之語, 附見其所以得此語之故]. 다시 말해서 공자의 말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한 기자의 연출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논의는 기실 앞서 인용한 유향의 설원에 명기되어 있다. 자상백자와 공자가 만나 서로를 비판한 사건, 즉 공자는 자상백자가 질()은 좋으나 문()이 부족하다 했고, 자상백자는 공자가 문()은 번()한데 질이 부족하다고 평한 사건과 연관되는 중궁의 멘트로서 유향은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자상백자는 이야(易野)가공되지 않은 야함. 예문이 없는 사람의 형용하여 인도(人道)를 소나 말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중궁이 너무 간하다고 멘트를 날린 것이다. 위로는 밝은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슬기로운 방백이 없어, 천하에 도가 없어졌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들이 아비를 죽인다. 힘으로 토벌할 수만 있다면 토벌하는 놈이 장땡인 것이다. 공자의 시대에도 위로는 밝은 천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공자는 옹이야말로 남면케 할 만하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남면이라고 하는 것은 천자가 된다는 것이다. 염옹이 남면할 만하다고 공자의 찬상을 얻은 까닭은 그가 자상백자를 공자에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그 간함은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궁(염옹)이 말했다: ‘경함에 거하면서 간을 실천하여 백성들을 인도한다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간에 거하면서 간만을 행한다면 너무 간한 것이 아닙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중궁은 통치의 화술(化術)에 통하였고, 공자는 왕도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중궁의 말에 덧보탤 것이 없었던 것이다.

子桑伯子易野, 欲同人道於牛馬. 故仲弓曰: “太簡.” 上無明天子, 下無賢 方伯, 天下爲無道. 臣弑其君, 子弑其父. 力能討之, 討之可也. 當孔子之 時, 上無明天子也, 故言雍也, 可使南面.” 南面者, 天子也. 雍之所以得 稱南面者, 問子桑伯子於孔子. 孔子曰: “可也, .” 仲弓曰: “居敬而行簡而道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太簡乎?” 子曰: “雍之言然.” 仲弓通於化術, 孔子明於王道, 而無以加仲弓之言.

 

 

우리는 또 여기서 유향(劉向, BC 79~8)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읽어낼 수 있다. 유향의 시대야말로 환관과 외척이 극심하게 발호하던 시기였고, 외척 왕씨 들의 전횡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외척 왕씨 중에서 천시당하던 왕망(王莽)이 정권을 장악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유향이 중궁의 남면을 천자가 된다로 풀이한 것은, 비록 유향이 왕망이 천자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궁과 같은 공자의 제자도 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서슴치 않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혼탁한 분위기가 유향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유흠은 왕망과 결탁하여 국사가 되었다. 유향은 염옹을 빌어 자기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 장에 있어서 맥락적 선후의 사실은 과히 중요치 않다. 문제의 핵심은 가야(可也), ()’이라는 공자의 평어에 대한 중궁의 논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치세지방으로서의 간()이 불간섭주의ㆍ방임주의적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최소한 번문욕례로써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뜻으로서의 대범함이나 단순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논의된 바와 같다. 그러한 간()의 측면을 공자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완전히 긍정적인 것으로만 끝나버리면 공자의 인()의 사상이나 예악(禮樂)의 사상조차도 완전히 도가적인 무위론(無論)으로 끝나버릴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중궁은 매우 자세한 새로운 논의를 첨가한다. 즉 간()에 대하여 경()이라는 새로운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라는 의미를 송유(宋儒)들은 주일무적(主一無適)’하나에 전일하게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이라 하여 매우 심리적으로 해석하였고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의 의미와 비슷하다, 또 일반적으로는 공경한다는 덕목으로 해석하지만, 여기 중궁(仲弓)의 논의는 그러한 선입견이 없이 자체맥락에서 해석되어야 정해(正解)를 얻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희는 송유의 일반적 논의에 따라, ‘중유주(中有主)’라는 말로 경()을 해설하였으니, 그것은 나의 내면에 흐트러지지 않는 어떤 도덕적 기준이 서 있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키엔, ()은 간()과 대립적인 덕목으로 설정된 것이므로 그 자체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취함이 옳다. ()이 루스(loose)한 것이라면, ()은 타이트(tight)한 것이다. ()이 쿨(cool)한 것이라면 경()은 핫(hot)한 것이다. ()이 대범하고 소략한 것이라면 경()은 자세하고 치밀한 것이다. ()이 방종적인 것이라면 경()은 구속적인 것이다. 여기 간()과 경()을 지배하고 있는 동사에도 우리는 특별한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을 행()이라는 동사가 받고 있는데 반하여 경()은 거()라는 동사가 받고 있는 것이다. ()와 행()에는, ()와 외(), ()와 공()이라는 의미맥락이 깔려 있다.

 

() ()
() ()
() ()

 

중궁(仲弓)은 백성에게 임하는 치자(治者)의 자세로서 거경이행간(居敬而行簡)’이라는 새로운 복합적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궁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이상은 가치의 양면성이요, 대립적 가치의 구유(具有). 공적으로 대범한 행위를 하는 것은 가하지만, 그 대범성의 배면에는 그 대범성을 구속하는 사적(私的)인 치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가가 말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조차도 그 배면에는 나의 유위적 도덕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호방하고 호탕한 척하는 인간들이 실제로 그들의 인성의 내면에 그러한 호방함을 구속하는 어떤 도덕적 집중이나 세밀한 배려가 없으면 그것은 너무 간[태간: 大簡=太簡]’하여 아무 쓸모가 없는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간적 가치의 복합성에 관한 중궁의 통찰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치세지방(治世之方)의 핵심이다. 인간은 일면적으로 다스려지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해탈에는 구속이 있어야 하고, 무위에는 유위가 있어야 하고, 간략함에는 치밀함이 있어야 하고, 호방함에는 주도면밀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궁(仲弓)은 사회적 행위와 인성적 가치의 양면성을, 대립적이며 불가양립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화해적이며 양립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공자께서 자상백자의 간()의 측면을 허여하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중궁(仲弓)은 자상백자의 간()은 단지 외면적일 뿐이며, 그 내면에 있어서의 경()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너무 간()하다고 날카로운 비판을 첨가했던 것이다. 공자는 그러한 첨가적 언사를 중궁의 진실한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래서 옹의 말이 옳다고 허여하신 것이다.

 

무내(無乃) …… ()?’곧 무엇무엇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가벼운 반문의 이디엄이다.

 

 

남면(南面)’이라는 것은 인군(人君)이 정치를 듣는 자리이다. 중궁은 마음이 너그럽고 도양이 크며 간략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인군의 풍도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자상백자(子桑伯子)’는 노나라 사람이다. 호인(胡寅)은 이 자상백자가 장주(莊周)가 언급한 자상호(子桑戶)라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중궁은 부자께서 남면할 만하다 하고 허여하셨기 때문에 자상백자는 어떠합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라는 것은 겨우 괜찮다는 정도의 말로서 미진함이 담겨있는 표현이다. ‘()’이라는 것은 번잡스럽지 않다라는 뜻이다.

南面者, 人君聽治之位. 言仲弓寬洪簡重, 有人君之度也. 子桑伯子, 魯人, 胡氏以爲疑卽莊周所稱子桑戶者是也. 仲弓以夫子許己南面, 故問伯子如何. 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 簡者, 不煩之謂.

 

()’라고 발음한다. 여기서 중궁이 말한 대의는 다음과 같다. 스스로 내 면적으로 경에 처하면 심중에 주인이 있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엄격해진다. 이와 같이 간()을 행하여 백성에 임하면, 정사가 번잡스럽지 아니 하고 백성이 곤요롭지 않을 것인지라 ()’라 할 만하다. 만약 먼저 스스로 간에 처하면 심중에 주인이 없고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소홀해진다. 게다가 또다시 백성들에게 간을 실천하면, 너무 간하여 잘못되어버릴 것이요, 지킬 만한 법도조차 없어져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가어에 자상백자가 옷을 입지도 않고 관을 쓰지도 않고 거처하니 부자께서 인도(人道)를 우마(牛馬) 수준으로 떨어뜨린다고 야단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즉 자상백자는 부자께서 너무 지나치게 허여(인정)하시지 않았나 하고 의심한 것이다.

, 音泰. 言自處以敬, 則中有主而自治嚴, 如是而行簡以臨民, 則事不煩而民不擾, 所以爲可. 若先自處以簡, 則中無主而自治疏矣, 而所行又簡, 豈不失之太簡, 而無法度之可守乎? 家語伯子不衣冠而處, 夫子譏其欲同人道於牛馬.’ 然則伯子蓋太簡者, 而仲弓疑夫子之過許與?

 

공자가어에는 자상백자와 공자가 만난 이야기가 실려있지 않다. ()가 출전을 착각하였다.

 

 

중궁은 부자께서 말씀하신 ()’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말한 바의 이치는 은연중 묵계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仲弓蓋未喩夫子可字之意, 而其所言之理, 有黙契焉者, 故夫子然之.

 

정이천이 말하였다: “자상백자의 간은 비록 취할 만하나 지극히 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께서 겨우 가()하다라고만 말씀하신 것이다. 중궁은 이로 인하여 내면으로는 경()을 주로 하면서 간하면 요직(要直: 긴요하고 곧음)케 되지만, 내면마저 간하고 또 간을 행하면 소략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으니, 중궁은 그 취지를 파악했다고 평가해줄 만하다.”

程子曰: “子桑伯子之簡, 雖可取而未盡善, 故夫子云可也. 仲弓因言內主於敬而簡, 則爲要直; 內存乎簡而簡, 則爲疏略, 可謂得其旨矣.”

 

정이천은 또 말하였다: “()에 거하면 마음속에 아무 일도 없게 되므로 행하는 바가 저절로 간()하게 된다. 그러나 간()에 거하게 되면 먼저 마음을 간에 두게 되는 것이니, 쓸데없이 간()의 의식이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너무 간하다 라고 중궁이 멘트를 날린 것이다.”

又曰: “居敬則心中無物, 故所行自簡; 居簡則先有心於簡, 而多一簡字矣, 故曰太簡.”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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