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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2부 1792년 대체 무슨 일이? -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건방진방랑자 2021. 7. 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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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反正)’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184100책에 이르는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단적인 증거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섭렵 및 주도면밀한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뿐더러, 왕실 아카데미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료(臣僚)들에게 직접 강의를 주도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수시로 신하들을 경연에 불러모아 시문을 짓는 과제를 내곤 했으니, 신하들 입장에선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정조가 아니고는 당시 유행하는 문체가 불온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부터 도학적 훈육을 받기에 급급했던 여타 평범한 왕들로서야 무슨 안목으로 시정에 유행하는 문체가 순정한지 타락한지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순전히 정조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문체가 통치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국왕이 손수 검열을 진두 지휘한단 말인가?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표상의 장치이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한 것을 떠올리면 일단 감이 잡힐 것이다. ‘어떤 어조와 제스처를 쓸 것인가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하는 따위는 단순히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과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좀더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 대학에서 양산하는 학문체계는 논문이라는 표현형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한다. 그러므로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대학이 부과하는 규범화된 언표체계를 습득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서론에선 문제제기를 하고 연구사를 정리한 뒤, 연구방법을 제시한다, 또 결론에선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남는 과제를 제시한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문장형식도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런 틀에 맞추려면 당연히 담을 수 있는 내용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나물에 그 밥’, 이 체계를 일탈하는 순간 그것은 지식의 경계 밖으로 축출된다.

 

만약 논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문체를 사용했다고 하자. 아예 논문 제출 단계에서 짤리고 만다. 그 정도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만이라도 아카데믹한어법에서 벗어나면, 당장 제동이 걸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나 역시 그런 일을 숱하게 겪었다. 학위논문이 아니라, 레포트 수준에서도 좀 개성있는 문장을 시도해볼라치면, 가차없이 그건 비평체 아냐하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비평이 뭐 어때서?), 그러니까 대학에서는 비평 스타일조차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달라진 거 같진 않다. 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가장 첨단의 기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문체는 지배적인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태어나서 문자를 익히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지식인들은 고문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에 진입한다. 얇은 곧 고문으로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경(六經)의 문장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로 대표되는 선진양한(先秦兩漢)의 문장 및 한유(韓愈)소식(蘇軾) 등 당송(唐宋) 팔대가의 문장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사유 및 신체를 이 표상의 범위 안에 묶어 놓는다는 점에서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유효한 장치로 기능하였다. ()란 무엇인가? 중국의 고대이다. 고문이란 그때 완성된 문장의 전범들이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옛날, 공간적으로는 저 중원땅을 향하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를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교묘하면서도 집요한 습속(習俗)의 장치! 그것이 바로 고문이었다.

 

 

 김홍도의 규장각도

규장각은 정조가 설치한 왕실 아카데미다. 정조는 재야에 숨은 인재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아 왕도정치를 위한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연암그룹에 속했던 서얼 출신의 인물들 즉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등이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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