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도무지 갈 데가 없었다. 로사(老舍)에서 보기로 한 경극도 취소되었고, 재래시장, 영화관 등 열린 광장들은 모조리 폐쇄되었다. 물어물어 연암이 다녀간 사찰들을 찾아갔건만, 거기조차 스산한 공고문과 함께 문이 닫혔다. 엄마가 깨를 사오라고 했다는 J와 여름나기 알뜰쇼핑을 계획했던 Y의 희망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L은 심각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고, 우리들은 이름없는 공원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하에 다녀오는 동안 베이징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관망하던 중국공산당이 인터넷 여론에 밀려 마침내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마스크의 행렬, 경계하는 눈빛들 귀국러시. 마치 외계인의 침입을 다룬 SF에서처럼 정체도, 원인도 알 수 없는 육중한 공포가 베이징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루쉰박물관에 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소치였다.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 문득 마주친 곳이기 때문이다. L은 너무 많이 다녀간 곳이라 지겹다고 했고, 나 또한 이미 와봤던 곳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팀의 막내들이 열광적인 루쉰 팬인 데다 첫방문이라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물론 거기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공안 두 명이 감시인지 보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무심하게, 정말 무심하게 박물관을 돌고 있는데 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박물관을 반쯤 돌 즈음, 불현듯 루쉰의 초상 뒤에서 연암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광인일기」 「아Q정전」을 통해 중국사회의 낡은 관습에 통렬한 풍자를 감행했던 초기 루쉰과 「양반전(兩班傳)」, 「마장전(馬駔傳)」을 통해 양반사대부의 부조리를 여지없이 까발린 청년 연암. 잡문(雜文)이라는 특이한 스타일로 문학과 사상의 경계를 종횡했던 후기 루쉰과 촌철살인의 아포리즘(aphorizm)으로 고문(古文)의 견고한 지반을 뒤흔들었던 중년 연암, 웃음과 역설이 연암의 무기였다면 풍자와 파토스는 루쉰의 투창과 비수였다.
하긴, 이런 식의 유사성은 사소한 것일 터, 시공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조우할 수 있다면, 그건 두 사람 모두 걸으면서 질문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던졌다. 걸으면서 묻고, 묻기 위해서 걸었다. 어떤 해답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다. 연암이 중세의 내부와 외부를 가로지르며 중세적인 것에도, 근대적인 것에도 결박당하지 않았던 것처럼 루쉰 역시 근대의 광풍이 밀려오는 그 순간에 이미 근대의 심연을 투시해버렸다. 이 난만한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물음으로, 아주 낯선 길로 유도한다는 것, 그거야말로 내가 두 사람을 헷갈린(!) 진정한 원천이었다.
연암은 말한다. “길은 강과 언덕, 그 사이에 있다”고. 그러면 루쉰은 이렇게 응답한다.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지나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길을 잃고 헤매다 루쉰을 만나고, 또 루쉰을 통해 연암을 다시 보게 된 건 실로 운명적 마주침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맹’이다. 남들은 눈감고도 가는 길을 두눈 멀쩡히 뜨고도 늘 잘못 들어선다. 하지만 박물관을 나오며 이제부턴 다르게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따지고 보면 내가 연암을 만난 것도, 중국 여행을 하게 된 것도, 또 이 설익은 여행기를 쓰게 된 것도 모두 ‘길을 잘못 들어선’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또 어쩌겠는가. 그 잘못 들어선 길들이 이미 내 ‘생의 한 가운데’를 점령해버린 것을.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도 길은 계속될 것이다. 길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고원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길! 그러므로 나는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감히 이렇게 기원하면서, 나 또한 걸으면서 질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길이 되기를! 다른 이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 갈 수 있는 낯설고 경이로운 길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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