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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 16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16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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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정약용과 주희의 귀신론

 

 

합리적으로 해석한 귀신

 

중요한 것은 16입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끝내면 될 것 같은데, 16장이 유명한 장이예요. 정약용 선생이 정조(正祖)에게 진강(進講)을 했는데, 임금에게 중용(中庸)을 강의한 강의록이 중용강의(中庸講義)라고 해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은 자꾸 이 귀신을 초월적인 어떤 상제(上帝)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용(中庸)에서의 귀신이라는 의미는 그런 게 아니예요.

 

주자 주를 보면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귀신이라는 것은 천지의 공용이고 조화의 흔적이다[程子曰: “鬼神, 天地之功用, 而造化之迹也.”]”라고 말한 것이 있지요.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것은 이미 정명도 시대에만 해도 천지라는 코스몰로지의 프레임 웤(frame work)’ 속에서 굉장히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가 있는 겁니다. ‘귀신은 천지의 공능(funtion)이다, 지의 기능적인 측면이다라는 말은 이미 천지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귀신을 해석해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장자(장횡거)왈 귀신이라는 건 이기지양능(二氣之良能)이라했지요. 여기서 이기(二氣)라는 건 음양입니다. 귀신을 음양론으로 해석해 들어갈 땐 귀신의 인격적 존재성이 희박해지고 천지론에 의한 법칙적 기능으로 되버리겠지요. 그래서 이기지양능(二氣之良能)’이라 한 것에 대해 주자가 말하기를, “(), 나는 그것을 따른다. 이기(二氣)를 가지고써 말하면 귀()자는 음지령(陰之靈)’으로 음()에 속하고, ()이란 건 양지령(陽之靈)’이라 했다. 이것을 다시 한 기()로 합쳐서 말하면 지()하여 신()하는 것이 신()이고 반()하여 귀()하는 것이 귀()이니 기실은 일물(一物)일 뿐이다. 위덕(爲德)이라 한 것은 성정공효(性情功效)를 말한 것과 같다[愚謂以二氣言, 則鬼者陰之靈也, 神者陽之靈也. 以一氣言, 則至而伸者爲神, 反而歸者爲鬼, 其實一物而已. 爲德, 猶言性情功效.]”고 했습니다.

 

이러한 주자의 이야기를 잘 보세요. 천지는 명백한 하나의 세계관을 나타낸다고 했었죠? 그 세계관에서 천()은 양()이고 지()는 음()입니다. ()라는 것은 정조로 말한다면 조()한 것이고 하늘이 정()한 것입니다. 하늘이 미()한 것이라면 땅은 현()한 것이고, 하늘이 무형적인 것이라면 땅은 유형적인 것으로 명백하게 나뉘는 것이죠. 천지론에서 신()이라는 것은 신()이라고 펀(Pun, 언어유희)을 썼는데, 이것은 양()이 펼쳐나가는 기운[天氣]이고, 또한 귀()는 돌아올 귀()자라고 썼는데, 이건 음()이 수렴하고 돌아가는 기운지기(地氣)입니다.

 

 

= =

 

 

이러면 귀신이라는 것은 음양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하등의 신비로울 것이 없어요. 주자의 귀신론은 초자연적 실체(super natural entity)의 문제도 천지론 속에 흡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명유학의 합리론이고 신유학(neoconfuciasm)의 합리론적 구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16장을 전체적으로 쭈욱 읽어보면,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 如在其上, 如在其左右.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夫微之顯, 誠之不可揜如此夫!”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온다, 이른다라는 말로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격이나 마찬가지등등 느낌이 어때요? 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다지 천지론적 음양적 공능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지요? 본래 중용(中庸)에 나타나 있는 귀신의 느낌은 귀신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생각들인데, 주자가 천지론적 구조에 의해 해석한 귀신은 서양에서 말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적 구조와 흡사합니다. 이것이 근세 유학의 법칙적인 세계이죠. 귀신은 천지의 공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과 귀신

 

하늘과 땅의 묘합이 인()이라고 하면, ((()이라는 구조 속에서 인() 자체가 신()과 귀()로 구성된 것입니다. 주자의 귀신론(鬼神論) 구조는 혼백론(魂魄論)과 같은 거예요. ()과 같은 것이 혼()이고 귀()에 해당되는 것이 백()이죠. 사람은 귀와 신, 혼과 백이 합쳐져 있을 때 사람이고, 죽으면 이것이 분리되어 혼()은 다시 펼쳐져 날라가서[] ()이 되고, ()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서[] ()가 된다는 겁니다. 천신(天神지귀(地鬼)입니다. 주자는 혼백론에 의해서 귀신론을 해석한 거예요. 주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천지의 기능으로 볼 때는, 사람이 죽고 나면 사람의 귀신은 결국 천지의 기능으로 다시 환원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불교 등에서 말하는 것처럼 독립된 귀신으로서의 존재성을 갖는다면, 이 대기는 혼백들의 교통지옥에 빠질 것이다. 수없는 사람들이 죽었으니까 그들이 다 그대로 있다면, 대기에도 교통순경이 있어서 혼백들이 다니는 것을 교통정리도 해야 하고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의 귀신장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주자가 말하는 귀신이라는 것은, ()는 땅으로 들어가고, 우리 몸의 귀()라는 것은 형체적인 측면을 말하니까, 해부학적으로 보는 시체들이 모두 귀(), 즉 백()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이 뜨는 것입니다. ‘() 나간다는 것 알아요? 분명히 있다고 합니다.

 

사람 죽을 때 보면 죽기 얼마 전에 지붕에서 불덩어리가 휙 나간다고 하거든요. 밤에 떠서 가는 것을 본다고 하는데, 그것이 나가고 나서 얼마 안 되니까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혼불이라는 것이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봤다고 합니다. 나는 못 봤지만. 지금 이런 게 다 없어진 것은 전기문화가 들어오고 나서입니다. 도깨비나 혼불 같은 것들이 다 없어졌어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마을에서 아이들이 밥 먹고 나와서 동네에 앉아 있으면 도깨비불이 산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함께 봤어요. 동네 솥뚜껑을 집어가기도 하는 도깨비라는 것이 있었는데, 에디슨 형님 때문에 완전히 멸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혼백이라는 구조를 주자는 이신론(理神論, deism)적으로 합리적으로 해석한 거죠. ()과 백(), ()과 귀()는 결국은 다시 천()이 되고 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입니다.

 

 

 

유교와 불교의 혼에 대한 생각

 

불교의 윤회설이란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혼()의 영속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혼이라는 것은 몇 억겁년이든 영원히 간다는 것이죠. 그럼 그 혼이 어디로 가는가? 잠시 백()을 빌렸다가() 다시 백()에서 나오는 것(죽음)이예요. ()을 빌리고 있는 동안이 인생이고, 죽으면 혼()은 해방되어 다시 윤회의 억겁을 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회설은 혼불멸설(魂不滅說)입니다.

 

그런데 동양의 천지론에서는 혼불멸설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혼백은 천지 그 자체의 공효(功效)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늘님, 하늘의 기()로 환원되는 것이거든요. 다시 재조합될 때는 김용옥이가 통째로 환생은 안 되고, 천지론으로 말하면 억만분의 일의 기()라도 들어오긴 하지만, 그것은 천지의 기()로서 들어오는 것이지 김용옥이란 존재성의 기()로 다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동양의 천지론은 인간의 존재성이 완전히 흩어졌다가 다시 탄생될 때 천지의 기()로 조합되지만, 인간의 존재성이 그대로 재생되는 경우는 없지요.

 

그런데 불교는 혼의 영속성을 인정하므로 혼이 통째로 되돌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딱 죽는 시간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하나를 후계자로 뽑는데, 이게 뭐냐면 혼이 그대로 다른 백()에 간다는 생각이거든요. 우리나라 옛날이야기 중에, 혼불이 나와서 막 가니까 사람이 막 따라가 보면 어느 집에 쑥 들어가는데, 혼불이 나온 집의 할머니는 그날 돌아가시고 그 혼불이 들어간 집에서 아기가 태어났다고 하는 말들이 있지요. 이런 것들은 다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교와 유교가 이렇게 달라요.

 

 

 

 

162. 합리적 귀신론

 

 

명당과 우리가 모시는 제사

 

유교에서 죽은 후에 혼백이 흩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묘자리 쓰는 진정한 이유는 혼백이 잘 흩어지는 자리를 고르는 것입니다. 명당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속성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흩어질 적에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흩어지지 못하고 갑자기 탁 흩어지게 되면, 이 혼이 어디서 괴이하게 뭉치거나 잘못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동양인들은 죽는 순간에 사람의 혼백이 탁 하고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의 형태로 혼이 있으면 그 형태로 어느 정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고 난 바로 다음은 혼이 명료하게 있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흩어지는 겁니다. 그 흩어지는 기간 동안에 제사를 지내는데, 한 세대(generation)30년으로 보고 4대를 통해서 한 120년간 제사를 지내는 거죠. 이것은 흩어지는 유예기간을 설정한 것으로서 이 4대 봉사의 기간에 그 사람은 살아있는 훼밀리의 일원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래서 뒤뜰 사당에 모시죠. 4대가 지나면 매주(埋主)라고 해서 신주를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죠. 이런 합리적인 구조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주자는 혼의 영속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급사예요. 주자는 불교가 말하는 지(((() 중에서 ()ㆍ수()는 유형적 세계이며 땅이고, ()ㆍ풍()이라는 것은 무형적 세계이며 하늘이다라고 해서 지(((()은 땅과 하늘로 나누어 백()이고 혼()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지(()가 점점 고갈되어 가고 화(()도 같이 희미해져 가다가 덜컥 끝나면 죽는 것인데, 이렇게 잘 죽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으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급사(急死), 원사(寃死)의 경우입니다.

 

급사의 경우, 만약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 하면, 혼은 흩어질 준비기간이 없는데 갑자기 백()의 기능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혼은 갑자기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이 없어졌으므로 황당한 거지요. ‘, 아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내 백()이 어디로 갔냐?’ 이러면 혼()이 억울하겠죠. 이런 경우에 혼()이 원귀가 된다, 이런 이야깁니다. 제대로 흩어지지 못하는 거죠. 옛날 사람들이 대개 교통사고를 당하면 당한 그 자리에서 굿을 합니다. 실지로 이런 굿을 할 필요가 있어요. 거기서 풀어줘야지 그렇지 못하면 원귀가 계속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원귀에게 미안하게 되었는데, 예고 없이 백이 없어지게 되어서 죄송하다하고 무당이 대신 굿을 해서 혼이 잘 흩어지도록 이제 백()을 회복할 수 없으니, 혼이여! 미안하지만 하늘로 흩어져라하고 잘 달래는 제사를 지내는 거지요. 그렇지 않으면 혼이 계속 원귀가 되어 자꾸 인간을 괴롭힌다는 겁니다. 이게 주자가 생각하는 굉장한 귀신론적인 틀이예요. 이 사람이 새로 만든 합리적인 틀이거든요. 이것이 유교에 어떤 틀을 줬어요. 합리론과 귀신의 초자연성 같은 것을 짬뽕을 했지요.

 

원불교 사은설(四恩說, 天地恩·同胞恩·父母恩·法律恩)의 천지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원불교인들도 그 불교의 윤회설 같은 걸 취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원불교 이론 같은 것을 보면, 불교의 윤회설을 그대로 취하고 있어요. 여기 원불교 분들도 와 계시지만, 나는 그런 해석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자의 합리론적 해설에 원불교가 받아들일 측면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불교의 사은설이 갖는 천지론적 성격과 일관되게 해설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겁니다.

 

 

 

정약용이 생각했던 귀신

 

그런데 이 정약용이란 사람의 전체적인 사상구조를 봅시다. 오구라 씨가 한국사상을 공부하니까 언제 한 번 이런 걸 발표해도 좋지요. 귀신론의 문제는 동서가 똑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근세로 오면서 정약용이 상제(上帝)를 말하게 됩니다. 그가 상제를 말하는 이유를 보면, “인간세의 도덕적 기준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고, 인간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주어질 때 인간은 더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초월신의 개념과 비슷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말하기를 정약용의 사상이 그러니까 정약용도 기독교 신자였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정약용이 귀신을 상제라는 초월적 존재로 해석하려는 것은 상당한 근대정신의 표출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인간의 궁극적 도덕성의 근거로서 요청하는느낌이 강하지요. 칸트는 도덕적 원리(moral principle)로서 요청된 신()만 있을 뿐이고, 신이란 다만 요청될 뿐이라고 보는데, 사실 정약용의 이 상제론을 보면 칸트의 도덕론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인간세상에 있어서 귀신론이 문제되는 것은 귀신이라는 것을 어떠한 초월적 존재성으로 보느냐 내재적인 법칙으로 보느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양문명에서든 서양문명에서든 마찬가지로 이렇게 봤다가 저렇게 봤다가 한 문제이거든요. 나는 예전에, 서양은 초월적이고 동양은 합리적이라고 봤는데 그건 틀린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서양 사람들도 갓(God)이라는 문제를 놓고 생각한 것이 동양 사람과 별반 다를게 없고 이런 문제의식은 동서문명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귀신론에 있어서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차원, 즉 유교문명이 생각하는 차원은 역사라는 차원을 하나 더 갖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없는 거지요. 내 책 새춘향전에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오는데, 영화통사에 대한 글의 앞부분에 쓴 것 같은 데 한번 찾아보세요.

 

 

 

 

 

 

 

163. 서양과 동양의 죽음 해소방식

 

 

시간 안에서 죽음을 해결 하는가? 시간 밖에서 위로를 찾는가?

 

결국 귀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죽음의 해결방식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존재의 유한성인데,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유한성을 어떻게 무한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죠. 자기의 존재성을 영속시키고 싶은 욕망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상당한 위로를 얻으니까요. 해탈한 사람들은 인생이란 게, 잠깐 왔다 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 가지고는 마음이 불안하단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잠깐 초개처럼 왔다가 끝나고 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 죽음의 해결방식에는 기본적으로 시간 밖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있고 시간 안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시간 밖에서 해결하는 건 뭐예요? 천당 가는 거지요. 천당이란 건 시간성이 없어서 시간밖에 있는 완벽한 세상으로 나이 먹는 게 없습니다. 천당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영원한 곳, 그곳에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중동이라든가 인도문명은 시간 밖에서 해결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은 우리가 말하는 하늘 밖에 있는 하늘입니다. 천지(天地)할 때의 천()과 서양 사람들의 헤븐(heaven)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예요. ‘within time’으로 간다면 이건 철저하게 천지론이 됩니다. 천지 속에서 해결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이 유한한 존재의 연결은 무한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시간 속에서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나의 존재의 연결은, 내 뜻을 자식이 받고 또 그 자식이 계속 이어가니까, 나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확장(extention)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식세포로 봐도 내 생식세포의 반은 자식에게 가잖아요. DNA 구조의 반은 섞여서 세대가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 나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귀신의 기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떨어진 것들을 잇는 데는 그 사이를 메꾸는 풀(glue)들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흩어진다는 말이죠. 이 연결고리가 무엇이냐면 바로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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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ue (귀신)

 

 

 

귀신이 나옴으로써 역사가 가능해졌다

 

사람이 죽어도 죽는 순간에 자기와 관계된 모든 타아와 단절되어 딱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주자가 말한 것처럼 120년을 사니까사대봉사(四代奉祀), 120년은 시간 안에서 사는 겁니까, 시간 밖에서 사는 겁니까? 이건 역사 속에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규우 소라이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지요. “귀신이 나옴으로서 역사가 가능해졌다.” 에도(江戶)의 유학자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가 명언을 했습니다. 귀신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는 무한성을 획득할 수 있던 것입니다. 귀신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나에게 잘못하면 내 귀신이 여러분들을 괴롭힐 것이란 말이예요. 그래서 조심하게 되고 귀신을 대접하게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연결고리를 가지게 됨으로 인간세는 이 귀신으로 인해서 역사적 연결성(historical continuity)이 확보됐다 이 말이죠. 동양인은 존재의 영속성의 보장이 어디서 이루어져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라는 것은 시간 밖에다가 인간존재의 영속성을 부여한 거지요. 맨날 천당에 가서 잘 살기 위해서 연보돈감사하여 하나님께 바친 물질이나 돈을 연보(捐補) 혹은 헌금(獻金)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헌금을 때때로 연보, 은혜, 축복이라고도 부릅니다잘 내고 목사 말 잘 듣고 성경말씀 많이 외워야 합니다. 동양인들은 이런 생각이 없이 역사에서 어떤 공덕을 쌓는가 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지요. ‘음덕을 쌓는다.’ 주역(周易)계사(繫辭)에도 보면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여경(餘慶)이란 여기서 내가 쌓은 보이지 않는 덕망입니다. 중용(中庸)첫 장에서 막현호미(莫顯乎微)’라고 했는데 그렇게 은미한 세계에서 신독(愼獨)해서 군자지덕을 쌓아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자가 되어서, 역사 속에서 나의 존재의 영속을 보장한다, 또 그것이 나의 자손에 미치게 되어 대대손손 내려간다는 생각, 이런 역사관은 굉장히 현실적인 것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역사 속에서 확보하려는 것이지요. 기독교보다 상당히 현실성이 철저합니다. 기독교의 초월성이라는 것도 허망한 것이, 사실은 한 길로 생각하면 결국은 우리가 말하는 역사성으로 귀착되어 버립니다.

 

 

 

 

 

 

164. 귀신은 어디에도 있다

 

 

 

존재를 나누고 죽음을 함께 해결한다

 

그리고 이 죽음의 해결방식에서 인간존재라는 절대적 개체를 설정하게 되면, 자꾸만 개인적 문제해결(indivisual solution)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해결, 중동문명의 경우에 그런 것이 있는데, 만약 존재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관계된 존재면 죽음 자체를 집단적인 해결(collected solution)을 합니다. 죽음을 같이 해결한다는 거지요. 가족 단위로 해결하거나 마을단위나 국가단위, 인류단위 등 죽음의 문제를 나 개인에게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집안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여러 사람에게 공유(share)되면서 죽음을 같이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장례라는 것이 다 그런 의미예요. 죽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되고 죽음을 축하해주고 그것이 후손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의 이러한 성격, 시간 안에서 집단적 문제해결로 나온 것이 바로 제사예요. 사실은 모든 종교는 제사로부터 출발합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ancester worship)로부터 모든 종교는 출발한다는 것이 종교학의 대전제입니다.

 

나중에 초월신관이 나오게 되면서 좀 달라지는 면이 있긴 한데 귀신이라는 것이 귀신론(家神論)적인 견해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잘못 본 것입니다. 그런 건 아니예요. 지금 세계 종교학이라는 것이 뭔가 근본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기는 한데, 자 다음을 봅시다.

 

 

 

 

 

바깥의 모든 세계는 내생명의 조건이다

 

여기서의 귀신에 대한 생각은 천지음양론적인 주자의 해석에 입각하여 보기보다는 상당히 소박한 귀신론으로 봅시다. 우리가 고스트(ghost)’라고 번역하는 귀신이라고 하는 말로 보자는 겁니다. 도깨비라고 해도 좋습니다. 귀신이라고 하는 말이 왜 동양인들에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물활론적(animistic) 세계관에 있어서는 무생물이란 게 있을 수가 없어요.

 

돌멩이 하나도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란 말이죠. 피가 났다가 혈소판들이 모여서 딱딱하게 굳으면 딱지가 앉습니다. 이 딱지는 꼭 쇠가 녹슨 것 같지요? 난 옛날에 이걸 밖에 있는 쇠랑 다른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의학을 공부하고 보니까 이게 같은 헤모글로빈-(hemoglobin-hem)’이예요. 철이 산화된 것이더라구요. 바깥의 쇠가 녹슨 것이나 피가 딱지가 져서 녹슨 쇠가 되어 있는 것이나 완벽하게 동일한 겁니다. 쇳물이 녹으면 철분이 식물 뿌리로 흡수되고 우리가 시금치를 먹던지 음식을 먹으면 그게 다 우리 몸속에서 쇠로 분해 되서 산화능력이 강하기 때문에 산소랑 결합해서 우리 몸에 피를 공급해주는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저기 있는 돌멩이에 있는 쇠와 내 몸의 피 속에 있는 쇠가 같은 것이라고 할 때 쇠를 무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의학공부를 하면서 철저하게 아니미스틱한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실 무생물이란 없어요.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 광물세계까지도 그건 생명의 조건입니다. 화이트헤드 같은 사람은 심지어 돌멩이도 의식이 있다고 하거든요. 물리학적으로 보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닌, 굉장히 빠른 액션의 체계들입니다. 엄청난 분자운동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다 생각들이 있다는 겁니다. 단지 돌멩이는 의식의 단계가 너무 낮을 뿐이지요. 우리처럼 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리 던져도 깨져도 아프지도 않고 어디 갈 생각도 안하고 판단력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입니다. 돌멩이도 사고를 한다는 것,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예요.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해서 돌멩이가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귀신이라는 것이 어디든지 없을 수가 없어요. 귀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신령함이거든요.

 

 

 

 

 

 

165. 통하는 혈기론과 귀신론

 

 

혈관은 파이프가 아니라 관개수로이다

 

한 마디만 더 하지요. 전번에 동맥이니 정맥이니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우리 몸은 어디나 실핏줄, 모세혈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심()이라는 것은 가운데 심장만 심()이 아니라 모세혈관들도 다 심()이라고 했지요? 결국은 심()이라는 건 일종의 저수지로 생각하라는 것이고 혈관들은 다 관개수로입니다. 저수지가 있고 댐이 있고 그 주위의 대평원에 관개된 논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인체에 비교해 봅시다.

 

인체는 혈()의 체계입니다. 이 혈이라는 것은 천지론으로 보면 땅이예요. 우리의 혈()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땅으로부터 왔습니다. ()은 곧 땅이에요. 땅을 흘러가는 관개용 수로가 곧 피인 것입니다. 땅에 대해서 하늘이 있는 것처럼, 논에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기가 있는 거지요. 혈기왕성하다 혈기미정하다라는 말처럼 혈기라는 말을 쓰는데, 혈기를 귀신론적으로 말하면, ()이 음()이고 기()가 양()이고, ()이 백()이고 기()가 혼()입니다. ()라는 것은 관개수로를 지나가는 혈()의 조건에 따라서 상호영향을 주고받겠지요. ()은 기()에 영향을 주고 기()는 혈()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수로에서 물이 공급되지만 이것이 위로 떠올라서 증발되면 습한 기운이 되고 청명한 날에는 물이 빨리 흐르고 습기가 꽉 찬 날이면 물이 천천히 흐릅니다. 이러한 혈()과 기()의 상호작용이 발현되고 있는 실체가 바로 인체인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혈관이라는 것을 파이프개념으로 생각해서, 이걸 고립계(closed system)’로 생각했단 말이지요. 그러나 인체 내의 혈관은 고립계가 아니라 열려있는 체계(open system)’입니다. 관개수로와 같은 거예요. 이런 개념을 가지고 혈관을 생각해야 합니다. 서양의 개념은 오류예요.

 

 

 

 

 

기는 혈이라는 수로의 아지랑이이다.

 

장자(莊子)의 처음인 소요유(逍遙遊)를 보면 야마(野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야마(野馬)들의 말이란 것이죠. 이것은 장자가 대붕(大鵬)이 되어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면서 보는 것인데, 여기서의 야마(野馬)란 아지랑이 같은 것으로 봄에 산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혈()에 대한 아지랑이예요. ()의 조건이 기()의 조건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기()는 혈()로부터 생겨나지만(emerge), ()는 혈()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아지랑이의 세계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처럼, 물처럼 고착되어 있지가 않아요.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모여서 인간의 정신작용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신세계를 현대의학에서 신경이라고 하던 말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우리의 정신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논두렁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인데, 신경이라는 것도 결국 혈관에 다 분포되어 있고, 신경세포는 또 피에 의해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이라는 것에서부터 신경세포가 다 모이기 시작해서 대가리에 집중되어 있는 그 체계가 인간의 심지(心志) 작용을 결정한다고 해도 결국 같은 이야기예요. 한의학에서의 기혈론이나 현대의학의 정신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혈()입니다. 그러나 혈()이라는 것은 다시 기()를 낳는 것입니다. 이 기()라는 것은 신묘한 정신작용이 있다는 것으로서 이게 바로 귀신입니다. 산에 혈맥이 있고 물이 있고 거기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산의 기가 되고 산의 귀신이 됩니다. 산에도 신경이 있고 이것이 모여서 신경시냅스를 연결하듯 산귀신이 있다는 것이 동양인들의 사고예요.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어디에나 신령스러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중용론=귀신론=혈기론

 

여러분들이 쓰는 책상도 여기서 계속 갈고 닦고 쓰면 어떻게 됩니까? 책상 개개가 다 귀신이 있는 것이 됩니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부엌에서 매일 고생고생하고 밥하면서 솥뚜껑 문지르고 사니까 그들에게는 부뚜막이 최고의 귀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조왕신이 생겨나는 거예요. 몇 대씩 여자들, 과부들의 한이 부엌에 맺히니 귀신이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그 옆에 커다란 항아리가 몇 백 년씩 된 게 있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불을 못 내서 여기에 빠져 자살을 하셨다고 하면 쳐다보면서 눈물이 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아리 신도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당놀이 할 때는 조왕신, 항아리 신에게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겁니다. 다 이런 식으로 신의 세계, 신령한 기운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에게서 심지(心志)작용이 나는 것이나 항아리에게서 심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든 물()이든 같은 세계관의 법칙적 문제입니다. 그런데 존재하는 사물에 내재하는 영험한 이 세계의 생명적 세계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 물질문명의 최대의 오류입니다. 중용(中庸)의 귀신론이 망가지면서 현대인들은 신령한 모든 기운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전부 자신이 피의 산소교환체계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인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의 문제입니다. 인체의 기의 문제란 것은 칠정,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문제입니다. 스트레스의 문제예요. 이건 천지론으로 말하면 여러분들의 몸의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아서 구름이 콱 낀 거예요. 그럼 피가 잘 안 돌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늘의 구름을 걷어내는 약을 쓰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귤껍질-진피 같은 것이 우리 동양인이 생각하는 하늘의 구름을 걷어내는 약입니다. 구름이 걷어지면 다시 피가 빨리빨리 도는 것이죠. 행기(行氣)ㆍ활혈(活血) 이런 말들이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중용(中庸)이 처음부터 말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산다고 하는 조건, 인간의 몸의 하늘의 조건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잘 조절할 줄 알아야 여러분들의 귀신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예요. 그걸 모르고 스트레스를 받았다하고 정신분석 의사에게 아무리 분석을 받은들, 물론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지론적 세계관에 의해서 나의 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이게 한의학이랑 중용(中庸)이랑 마구 짬뽕이 되어서 여러분들로서는 전체적인 언어를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텐데, 이 혈기론과 천지론과 귀신론과 만물의 영험,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로 연결된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의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끝나지를 않아요. 일본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런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 소라이를 분석하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비판합니다. 이번 동경대학에 쓴 글에도 그런 것을 조금 비판했습니다.

 

 

 

 

 

166. 신유학의 틀로 본 귀신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대하구나!”
 
程子: “鬼神, 天地之功用, 而造化之迹也.”
정자가 귀신은 천지의 공용(功用)이고 조화의 자취다.”라고 말했다.
 
張子: “鬼神者, 二氣之良能也.”
장자가 귀신은 음양 두 기운의 훌륭한 기능이다.”라고 말했다.
 
愚謂以二氣言, 則鬼者陰之靈也, 神者陽之靈也.
내가 생각하기로 두 기운으로 말한다면 귀()라는 것은 음()의 신령함이고 신()이라는 것은 양()의 신령함이다.
 
以一氣言, 則至而伸者爲神, 反而歸者爲鬼, 其實一物而已. 爲德, 猶言性情功效.
하나의 기운으로 말하면 지극하며 펴진 것을 신()이라 하고 거두어 되돌아가는 것을 귀()라 하니, 실제론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위덕(爲德)이란 성정(性情)이나 공효(功效)라는 말과 같다.

 

귀신이라는 것은 분명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귀신이라는 것은 주자가 말하는 단순한 리법(理法)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어 빠뜨리지 않는다.
 
鬼神, 無形與聲. 然物之終始, 莫非陰陽合散之所爲, 是其爲物之體, 而物之所不能遺也.
귀신은 형태와 소리가 없다. 그러나 물건의 처음과 끝에 음양과 모이고 흩어짐에 행하게 하는 힘이 아님이 없으니, 물건의 본체가 된다는 것으로 물건에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其言體物, 所謂幹事.’
물건에 깃들어 있다는 말은 주역에서 말한 사물의 근간이 된다라는 말과 같다.

 

귀신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부뚜막에도 있고 여러분들 머리카락 하나에도 있고 다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것, 만물에 어디든지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체물이불가유(體物而不可遺)’ 임바디드(embodied, 육체화되어) 되어서 빠짐이 없이 모든 것에 있다. 어디에든지 귀신은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내가 매사에, 걸음걸이 하나 청소하는 것 하나부터 제대로 하라고 하는 것은 사물에 구현되어 있는 귀신에 대한 대접입니다.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 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재계하여 깨끗이 하고 제사의 복장을 성대히 한다. 귀신은 넘실넘실하도다! 위에 있는 듯하고 좌우에 있는 듯하다.
 
齊之爲言齊也, 所以齊不齊而致其齋也. , 猶潔也. 洋洋, 流動充滿之意. 能使人畏敬奉承, 而發見昭著如此, 乃其體物而不可遺之驗也.
()라는 말은 가지런히 한다는 것으로, 가지런하지 않는 것을 가지런히 하여 재계를 극진히 한다는 것이다. ()은 깨끗하다와 같다. 양양(洋洋)은 흘러 이동하여 충만하단 뜻이다.
 
孔子: “其氣發揚于上爲昭明, 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 正謂此爾.
공자가 기가 위로 발양되어 밝게 빛남이 이와 같으니 향풀을 태워 귀신이 이르면 서글퍼지는 것은 온갖 물건의 정기 때문이고 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제명성복(齊明盛服)’이란 목욕재계를 해서 깨끗이 하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목욕재계란 말도 잘 모르지요? 옛날에는 오늘날 같이 뜨거운 물에 나체로 들어가서 목욕하는 그런 목욕탕 같은 것이 없었어요. 한사(寒邪)를 뺀다고 풍덩들어가서 다리 쭉 뻗고 늘어져 있을 수 있는 그런 목욕탕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목욕이라고 하는 것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하고 살았거든요. 그러니 옛날 여자들이 오죽 더러웠겠어요? 그래서 맨날 뒷물 따로 하고 그랬던 겁니다. 머리와 몸을 같이 씻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단오절에는 머리만 씻는 겁니다. 몸은 안 씻고, 아니 못 씻는 거지요. 머리만 씻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그것을 수()에 목(), 즉 목()이라고 하고, 몸을 씻는 것을 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목()과 욕()은 전혀 다른 것이예요.

 

옛날에는 목욕을 한다는 건(머리와 사지·몸통을 모두 함께 씻는 것)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주 특별한 것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두 번씩 목욕하는데, 특히 제사지낼 때는 제사지내는 제주(祭主)들이 목욕을 다 함으로써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성화(聖化)해서 제사에 임한다, 이것이죠. 옛날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옛날 여자들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실은 때가 덕지덕지 끼었을 겁니다.

 

반면에 요새 여자들은 너무 몸을 씻어서 몸을 버려요. 여러분들, 자꾸 비누 같은 것을 마구 쓰지 말고, 특히 샴푸 같은 것을 가지고 머리감지 마세요!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절대 샴푸 못쓰게 해요. 우리 마누라도 평생 샴푸 안 써봤어요. 그냥 비누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불필요한 짓 하지 마세요. 특히, 여자 분들은 자꾸만 밑구멍을 씻으면 안 됩니다. 그건 좋지 않아요. 거기 균들이 있어야 사천왕들이 사는데! 그걸 자꾸만 씻어내 버리면 사천왕들이 없어져서 외사(外邪)를 막을 기능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뒷물 같은 것을 과도하게 하지 말고 어쩌다 불편하면 몇 달에 한 번씩 씻되 꼬리꼬리한 냄새나는 그대로 두어라 이거예요. 그래야만 건강하다는 겁니다. 아시겠죠?

 

제명(齊明)’은 목욕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 성복(盛服)’이라고 하는 것은 복장을 아주 성대하게 입고, ‘이승제사(以承祭祀)’제사를 받든다는 거지요. 뒤에도 또 나오지만 제사라고 하는 것은 상례(喪禮)와는 다른 겁니다. (상례(喪禮)는 사람이 바로 죽었을 때 하는 것이고, 제사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달라요. ‘관혼상제라고 할 때, ()20세에 성인식하는 것인데 지금은 없어졌지요, ()은 혼례, ()은 죽었을 때 하는 것이고, ()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입니다. ()는 상()보다 훨씬 후의 사건이예요. 제사라고 하는 것은 오래된 조상숭배 의식(儀式)이죠.

 

동양인이고 서양인이고 마찬가지로 이런 종교형태는 전부 제사입니다. 마태복음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낳고 해서 예수까지 왔다는 이런 것들이 다 전부 조상숭배의식, 즉 제사를 반영하는 글입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러니 이건 동서고금이 다 똑같습니다.

 

양양호(洋洋乎)” 의기양양이란 말 알지요? 동해바다에 가보면 바다가 넘실넘실 하듯이 여러분들 의기가 양양하다 이거지요. 그런 것과 같이 귀신은 어디든지 양양하게 있습니다. 야마(野馬, 아지랑이)처럼 사방에 촥 깔려있는 것이 귀신입니다. ‘양양하다그것은 저 위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의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미생물처럼 바이러스처럼 귀신은 어디에나 있어요.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시경(詩經)귀신의 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싫어할 수 있으랴.’라고 말했다.
 
, 大雅抑之篇. , 來也. , 況也. , 厭也, 言厭怠而不敬也. , 語辭.
시는 대아억의 편이다. ()은 이른다는 뜻이다. ()은 하물며란 뜻이다. ()는 싫어한다는 뜻이니 싫어하고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는 어조사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신의 이르심이여!” 여기서 사()는 무의미한 조사입니다. ()는 해석하지 마세요.

 

시경(詩經)은 특이하므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문 실력을 가지고 시경(詩經)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약속체계에 의해서 다시 봐야 합니다. ()온다라는 것이죠? ()헤아릴 탁자입니다. “신의 이르심이여, ! 헤아릴 수가 없도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와 똑같지 않습니까? 다 비슷한 것이예요.

()하물며란 뜻입니다.

 

여기의 사()싫어할 역으로 읽습니다. 염세(厭世)한다고 할 때의 염()자와 의미가 같지요. “신의 이르심이여! 헤아릴 수가 없네, 어찌 우리 인간으로서 신을 싫어할 수가 있으랴!” 하는 이야기입니다. 황가염호(況可厭乎)! 이런 식이죠. “어찌 우리가 이것을 싫어할 수가 있으랴!”

 

 

 

夫微之顯, 誠之不可揜如此夫!”
은미하지만 명확히 드러나니, ()이란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誠者, 眞實無妄之謂. 陰陽合散, 無非實者. 故其發見之不可揜如此.
()이란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음을 말한다. 음과 양, 그리고 모여듦과 흩어짐이 실제가 아님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발현되어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右第十六章. 不見不聞, 隱也. 體物如在, 則亦費矣.
여기까지 16장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은()이다. 물건에 깃들어 여기에 있는 듯하다는 것은 또한 비().

 

미지현(微之顯)’ 이거 또 나왔지요? 1에 있던 주제죠? “미세한 것의 드러남, 미세한 것일수록 더욱더 드러나고란 뜻입니다. 신의 세계는 아까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이라고 했는데, 이건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미세할수록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나는 세계이죠. “아아, 그것의 진실함!”

 

()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천지의 성실함이예요. 이 천지의 운행이라든가 모든 만물의 운행이란 것이 아주 성실하다는 것, 천지의 성실함이란 신의 세계, 신의 기능이지요. ‘성지불가엄 여차부(誠之不可揜 如此夫)’. 여기 엄()가리다라는 말인데, “신의 공능인 성실함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는 말입니다. 양양하니까 가릴 수가 있습니까? 체물(體物)불가유(不可遺)’하니 그것은 어디든지 있어요. ‘여재기상(如在其上)’하고 여재기좌우(如在其左右)’거든요. “신의 옴이여 그것을 헤아릴 수가 없도다, 어찌 우리가 그 신을 싫어할 수 있으랴! 아아, 신의 세계는 미세할수록 더욱 드러나는 것, 그 성실함이야말로 인간이 그것을 가릴 수가 없도다. 거역할 수 없는 엄연한 세계이니, 그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도다!”

 

중용(中庸)16, 이 귀신장은 유명한 장입니다. 계속 문제가 되어 왔지만, 아직 귀신장에 대한 명료한 해석이 없었습니다. 내가 오늘 해석한 것은 신유학의 틀을 상당히 포용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한의학적 세계관과 관련지어서 포괄적 해석을 시도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해석을 만나더라도, 아마 이 중용(中庸) 귀신장은 내가 해석한 이것의 스케일을 더 벗어나진 않을 거예요. 그러나 이 귀신장을 놓고 유교의 합리주의자들과 초월주의자들의 논쟁이 분분한 장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 두시도록. 이것으로 오늘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목요일날은 황병기 선생님이 오셔서 국악에 대한 포괄적인 소개를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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