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1. 현재의 위(位)에서
君子, 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군자는 그 위치에 근거하여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素, 猶見在也, 言君子但因見在所居之位, 而爲其所當爲, 無慕乎其外之心也. 소(素)는 현재에 있는 곳을 말하니, 군자는 현재 머무는 지위에 따라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그 바깥을 사모하는 마음은 없다는 것을 뜻이다. |
여기 ‘소(素)’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뜻이 많은데, 제11장의 ‘색은행괴(素隱行怪)’의 ‘소(素)’와 연관시켜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주자 주에서는 ‘소유현재야(素猶見在也)’라 하면서 ‘현재‘의 의미로 해석을 했죠. 그런데, 이 현재라는 말은 유가(儒家) 고전에는 없지만, 우리 실생활에서는 아주 많이 사용되는 말이죠. 과거·현재·미래 모두 위진남북조때 퍼진 불교용어입니다. 어쨌든 주자는 이걸 현재라고 봤고 ‘지금 이 자리에서’라고 해석을 하죠.
그러나 그럴 필요 없이 소(素)를 색(索)의 의미로 해석하면, ‘자기가 있는 위치에 근거하여, 의거하여’가 되고, 이 구절을 전부 해석해 보면, ‘현재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행한다.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현상 고착적 발상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애매하고, 그래서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말입니다. ‘항상 현재 있는 위치에서만 행한다. 진취성이 없이 자기 자리를 고수해라’라는 식의 해석 때문에 ‘동양은 진취적이지 못하고 발전성이 없다’는 비판을, 서구사상, 특히 맑시즘에 의해 받아왔죠.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행동이란 건 분명히 위(位)가 있다는 말, 이 말이 꼭 그런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이해가 되어야 합니까? 물론, 그 도가 지나치면 보수화되고, 현실 고착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죠. 그러나 이미 우리는 지금까지 텍스트를 읽어 오면서, 그 위(位)를 넘어서는 것을 바란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또한 왜 허황된 것일 수 있나를 익히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중용(中庸)의 저자가 13장에서 ‘사람들이 도(道)가 먼 곳에 있다고 하면서 뭔가를 밖에서 구하려고 하는 경향을 경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예를 좀 봅시다.
14장 2. 주어진 상황에서 자득하다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 無入而不自得焉. 부귀에 처해서 부귀한 바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한 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있을 때에는 이적(夷狄)의 법칙에 따라 행하며, 환난에 있을 때에는 환난한 대로 행하니, 군자는 들어가서 스스로 얻지 못할 바가 없다. 此言素其位而行也. 여기선 그 지위에 처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말했다. |
소부귀 행호부귀(素富貴 行乎富貴)
이 말은 부귀가 부귀한 것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귀한 위치에 걸맞는 행동양식과 덕성이 있다 이겁니다. 이것은 부귀가 그 나름대로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에 맞는 덕성을 길러 위(位)와 조화를 이루어야지, ‘부자는 좋은 것이니까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아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취해라’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부정적이고 현실고착적인 이야기만은 아니고, 부귀에 있는 사람은 부귀의 자리에서 부귀한 사람다운 행동을 하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 나름대로 부귀한 이유가 있으니까.
소이적 행호이적(素夷狄 行乎夷狄)
이적(夷狄)은 풍속이 다른 문화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Do in Rome as Romans do)!’라는 속담과 통할 수 있겠죠.
좀 쉽게 예를 들자면, 서로 다른 문화적 상황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미묘한 양상들을 훌륭하게 잡아낸 영화가 있는데, 안소니 퀸이 주연한 「Barren」이라는 영화. 여러분 알아요? 에스키모인들에 대한 내용인데, 그쪽은 우리랑 풍습이 아주 달라요. 먹는 것만 봐도 거기는 구더기를 먹거든요. 단백질 섭취를 위해서라고 하긴 하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 경지까지 가봐야 하는데. (일동 웃음) 어쨌든, 그렇게 풍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그 사람들은 방문객에 대한 최고의 대접으로 자기의 부인과의 동침을 허락하는 풍습이 있었나 봅니다. 우리 관점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효용가치 측면에서 생긴 차이인 것 같아요. 안소니 퀸의 이야기가, 총이나 탄약은 생명과 관련되니까 빌려줄 수 없지만 부인은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놀래서 거절을 하니까 에스키모인이 자기의 성의를 무시한다고 모욕을 느껴서 선교사를 죽여 버리죠. 대충의 줄거리는 이런데, 좀 과장되기는 했어요. 에스키모 풍습에 관해서 나중에 들어보니까, 평소에 ‘내 부인이랑 자라!’ 이런 것은 아니더라고. 에스키모인들 생활의 근거가 사냥이잖아요. 그런데, 멀리 사냥을 나가게 되면 몇 달씩 집을 비워 놓게 되니, 그럴 경우에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없을 동안에 내 처자식을 잘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집을 비운다니까, 그 말 속에는 ‘내 부인이랑 동침하는 것(sex)도 가능하다, 그래도 좋다’는 뜻도 포함이 되는 거라. 사냥 나가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생명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들로서는 그건 합리적인(reasonabale) 선택이거든요. 죽고 못 돌아올 가능성까지 전제하고 부탁하면서 “섹스(sex)는 하지 말아라~” 이게 더 웃기는 짓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겁니까? ‘이적에서 이적을 행하라’라고 했는데. 해야죠. 부인이랑 같이 자야죠! 왜 그걸 거절합니까? 개인적으로 그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 때문에 20년을 고민해 왔지만, 결국은 그런 문제로 그 선교사가 맞아 죽을 이유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니까요.
소환란 행호환란(素患難 行乎患難)
그래서 말하기를, ‘군자무입이불자득언(君子無入而不自得焉)’ 군자에게도 이런 상황이 자기에게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부귀했던 사람이 빈천해질 수도 있고, 엉뚱하게 에스키모 사회로 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즉, 인생의 모든 변이는 끊임없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군자로서 행할 바는 상황 자체를 기피하는 게 아니고 또한 그 상황의 변화에서 하나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야. 정답은 없어요. 아까 문제도 에스키모 부인하고 그냥 자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문화적 상황이 다른 측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윤리적으로만 파악해서 죄악시했기 때문에 그 행동이 옳은 것도 아니예요.
‘군자무입이불자득언(君子無入而不自得焉)’에서 ‘입(入)’자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냥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고, 그런 상황에 내가 능동적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강합니다. ‘자득(自得)’의 의미가 강해요. 이 시점에서 군자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입이자득(入而自得)하지 않는 바가 없다! 즉, 능동적으로 내가 주체로서 들어가서 거기에서 스스로 얻어내는 것,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빈천하면 빈천한 대로, 환난하면 환난한 대로 거기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아서 얻어내는 그것이 바로 중용(中庸)이라는 말이지. 왜냐하면, 인생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부귀(富貴)면 부귀(富貴), 빈천(貧賤)이면 빈천(貧賤)’이라는 식으로 항상 그렇게 스테이블(stable, 안정적) 고정된 게 아니니까. 어쩌면 자득(自得)을 나처럼 깊게 새기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많이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이 구절이 단지 현상고착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 버리지 않으려면 자득(自得)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능동적으로 구체적으로 깨달아서 얻어낸다’는 말이나 ‘현재의 위치에서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는 말이나 같은 뜻이라고 새겨야 해요.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인간의 상황이란 건 항상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 상황에 맞게 살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는 선생이지만, 원광대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생이거든. 그러니까 강의자일 때는 강의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야만 하겠으나, 학생일 때는 또한 학생으로서의 모든 덕성을 지켜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 상황에서 자득(自得)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군자다’라는 것이 중용(中庸)의 군자론의 핵심입니다.
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끌어 내리려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않는다. 此言不願乎其外也. 여기선 그 지위 바깥의 일을 도모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아래ㆍ위가 모두 자기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을 능멸하려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끌어 내리려고 해. 그게 인간평등인 줄 알아요. 민주사회의 인간평등이라는 게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는 거지, 일률적으로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또,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모두가 다 똑같다, 동등하다는 의미로 통하는 것도 아니예요. 어쨌든,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가 인간의 기회균등을 보장했다는 것이기는 한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민주주의의 인간평등이란 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인간의 위(位)가 상실되고, 부자지간ㆍ사제지간 같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상태를 말한 것은 아니지 않느냔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평등해질 수 있으며, 선생과 학생이 평등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세상에서 그런 평등은 영원히 없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 것이 자꾸 혼동되고 제 자리를 못 잡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중용(中庸)의 정신이 상실되고 있다는 징조지. 자유의지, 기회균등과 자기자리에 철저함의 모랄은 절대로 혼동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14장 3. 기자의 시건방
본인이 있는 앞에서 이런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잘 모르겠는데, 내가 오구라씨를 만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오구라씨가 『世界(せかい)』라는 잡지의 기자와 함께 이리 원광대학교에 한 번 왔었어요. 그 『세계(世界)』라는 잡지의 경향은 우리나라의 『신동아』보다는 『사상계』에 가까운 잡진데, 1945년에 창간되어서 50년 동안 일본 사상계를 지켜온 잡지입니다. 참 아이러니칼한 게, 일본의 역사는 극우의 역사인데 반하여, 일본 근세 지성인들은 모두 극좌의 세계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경향이 ‘좌’가 아니면 아예 지식인 축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아주 대체적으로(roughly)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7.80년대도 다 그랬어요.
『세계(世界)』 편집장의 부탁으로 오구라씨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는 못 받아 봤지만, 그 내용은 『세계(世界)』가 50주년 기념으로 1월호에 ‘20세기 아시아 문명의 새로운 비젼’을 그리고 싶은데, 필자를 구하다 보니까 김용옥만한 필자가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런 건 나에게는 아주 고마운 일이죠.
그런 목적으로 그 기자하고 오구라씨가 이리에 갔지만 나를 못 만나서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전주로 찾아왔는데, 아침에 내가 학교로 가니까 누가 와 있다고 그래요. 학생들이 그 말을 듣고 ‘또 어떤 놈인지 야단 되게 맞겠구나’ 싶어서 또 난리가 났는가 보다 하고 있는데(왜냐하면 외부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치고 나에게 야단 안 맞은 사람이 없거든), 학생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내가 그 두 사람에게 상당히 정중히 대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세계(世界)』라는 잡지가 어떤 잡지인가를 알고 있고, 그런 잡지사에서 나를 알아보고 필자로 삼자고 글을 부탁하러 왔기 때문에, 나는 예의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구라씨가 앉아 있지만, 오구라씨는 잘 모를 겁니다. 사실은 고백을 하는 건데. 우선 그 기자라는 놈이 젊은 애예요. 거기다가 기자들 특유의 착각성을 가지고 건방지게 구는데 뭔가 문제가 있더라고. 기자들 말이죠, 자기들이 언론의 파워를 아니까, 아주 쉽게 누구 한 사람쯤은 병신 만들 수도 있고, 마치 자기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그건 아주 잘못된 점입니다.
오구라씨는 나에 대해 책을 읽어서 잘 아는데, 이 친구는 나에 대한 사전지식(information)이 없는 놈이야. 아마 오구라씨를 통해 추천을 받은 모양인데, 좋아! 그것까지도 봐줄 수 있다고 해. 그러나 이 녀석이 나를 찾아와서 하는 행동이 가관이더라구. 나는 말이죠, 외국 사람 대할 때는, 내가 여러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우리나라 지성계를 대변하는 한국의 선비로서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놈이 나를 척 보니까 애숭이 같거든. 모자 쓰고 잠바 입고 거기다가 학생이야. 원광대학교 학새∼ㅇ! 그래서 우습게 보였는지, 이놈이 나를 보고 처음 한 말이 ‘아나타(あなた, 당신)’【일본어의 일상적 회화에서 ‘아나타’라는 말이 물론 그렇게 천박한 느낌의 말은 아니다. 일본어에서는 우리말보다 공대어(honorific system)가 많이 단순화되어 있고 평준화되어 있다. 허나 김선생님께 글을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김선생님의 사회적 위치를 상식적으로 감안할 때 ‘아나타’라는 호칭은 자연스러운 말이 아니다. 우리 어감으로 누굴 그렇게 처음 만나는 마당에 “‘당신’에게 글을 부탁하려고 찾아왔습니다.”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 운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평범한 말씨일 것이다. 이런 마당에 ‘아나타’ 운운한다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을 얕잡아 보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감지 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센세이(せんせい, 선생님)’가 되었어야 한다】야. 어떻게 지가 나를 놓고 감히 ‘아나타(あなた)’라고 그럽니까? 출판계에서만 말해도 나는 통나무출판사를 지금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린, 자기네 나라의 이와나미 소덴(いわなみ しょてん, 岩波書店)의 창시자와 같은 그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나는 내색 않고 정중하게 내 감정을 숙였지.
그러면서 ‘요놈을 한 번 골탕을 먹여야 하겠구나, 본때를 한 번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식사를 제대로 대접할 형편이 안 되니, 아무 데서나 식사를 하자”고 하고 구내식당에 앉혀 놓고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김용옥의 일본말은 유창하니까, 별 어려움 없이 내가 전하고 싶은 의사를 표현해 들어갔지. 그러니까 짜식이 조금은 기가 죽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어쨌거나 내가 집으로 초대를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웬만해서는 우리 집에 초대를 안 합니다. 우리 원광대학교 총장도 내 집에 오고 싶어 하는데 못 왔고, 전주에 살면서 누구도 내 방으로 초대한 적이 없어요. 사실, 이 이야기도 야회 가서 하려고 했는데, 지금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초대한다고 이야기하니까, 이 친구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오구라씨가 변소에 갔다가 올 때쯤인데, 오구라씨를 딱 보면서 오구라씨는 자기가 신용하는 사람이고 어쩌구. 하더니, 나에게서 돌아서면서 오구라씨에게 하는 말이 “우치니 츠레데이쿤다데(うちに つれていくんだて)”야. “쟤가 자기 집에 우리를 데려 간대”라는 말이거든. 그 순간에 나는 그 새끼 귓싸대기를 갈겨 버릴려고 했어요. 그러나 어린애 말버릇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참았죠. 내가 없을 때면 또 몰라, 어떻게 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냔 말이야. 거기서 걔는 완전히 나간 거야. 회복할 수가 없어!
그런데 그때까지도 걔는 나의 감정 상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내가 『세계(世界)』에 기고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줄 알고 있더라고. 그놈은 이제 죽었지. 그래서 내가 정중하게 집에 데려다 놓고서는, 나에게 무릎 꿇고 ‘센세이(せんせい)’하게끔 해서 돌려보냈어요.
이건 서브틀(Subtle)한 감정의 문제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런 서틀한 문제들을 외국사람 앞에서 감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결코 오구라씨 같은 일본 지성인들이 한국을 동경해서 찾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걸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깊게 반성하고 일본사회를 개혁시킬 수 있는 위대한 지성인들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을 이해해 달라는 이야기는 안 해요.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 기자 같은 놈이 한국에 와서, 한국의 교수들에게 『세계』 잡지 ‘50주년 기념 특대호’에 당신의 글을 헤드 아티클(Head article, 서문)로 싣고 싶다고 하면, 일본에서 유학이나 하고 돌아온 사람 같으면 환장하고 달려들겠지. 그렇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 많으니까, 그런 사람 데려다가 실어라!”라고 해 버렸지.
일본인들 특유의, 굉장히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오만한 그 잘못된 버릇이 감히 김용옥 앞에서 그 따위 말버릇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오구라씨는 눈치를 못 채고 그 뒤로도 나에게 계속 『세계』 잡지에 이러저러한 것을 기고해 달라고 그러는데, 문제를 인식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세계』 편집장이 와도 어림없어요. 모든 상황에 있어서 그런 식의 시각 속에서 한국 사람으로서 프라이드를 갖고 산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알고 거기까지 찾아 왔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의 경의와 한국의 지성인들을 대접할 공경심을 가지고 일본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자각하려는 태도로 무엇인가를 시도하려고 해야지. 어떻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건방지게 나옵니까?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는 어리석은 기자애들의 장난에 한국 지성인들이 놀아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런 일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수준이 결정되는 거예요.
어떠한 경우에도, 위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능멸하려 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마라! 모든 인간사회에서 상하관계는 명백한 현실입니다. 그걸 무시한 데모크라시(Democracy, 민주주의)는 환상일 뿐이지요. 인류의 앞날이 서구문명이 제시한 데모크라시라는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명백한 현실을 바로 보고,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중용(中庸)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인간세의 모습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나와 남의 평등을 사회보장을 통해서만 받으려 하지 말고[正己 不求於人], 궁극적인 가치 기준은 나에게 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14장 4. 평이한 일에서
故君子, 居易以俟命; 小人, 行險以徼幸.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평범한 데 거하면서 천명(天命)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범하고 요행을 바란다. 易, 平地也, 居易, 素位而行也. 俟命, 不願乎外也. 徼, 求也. 幸, 謂所不當得而得者. 이(易)는 평상시에 사는 곳을 말한다. 거이(居易)는 그 지위에 처하여 행동한다는 뜻이다. 사명(俟命)은 그 바깥의 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徼)는 구한다는 뜻이다. 행(幸)은 마땅히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었다는 뜻이다. |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것은 이(易)와 험(險)입니다. 이것은 또다시 앞서 분수나 위(位)의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주역(周易)』 「계사(繫辭)」에 나오는 ‘간이(簡易)의 사상’과도 상통하는 말입니다. 군자는 항상 쉬운데 거하여[居易] 명을 기다린다[俟命].
인생은 어찌 보면 기다림이죠. 무얼 기다리냐구요? 애인을? 부(富)를? 다 좋습니다. 허나 기다림의 궁극은 천명입니다. 사랑도 돈도 명예도 궁극적으로 하늘의 명을 얻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천명은 돈이 돈으로서, 사랑이 사랑으로서, 명예가 명예로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보편적 근거입니다.
소인은 무얼 바랍니까? 요행을 바랍니다[徼幸]. 요행을 바라기 위해 무얼 합니까? 험준한 일도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지요. 이것은 ‘인생에 어드벤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위험한 짓을 하는 목적이 요행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지요. 인생의 성패는 그러한 위험한 짓을 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이한 일에 정확히 나의 공력을 다함으로써 천명을 기다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삶의 어드벤쳐는 오히려 천명을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허나 인간은 쉬운 일에서 평이한 일에서 천기(天機)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낙오자가 되는 것이지 기발한 한 건수를 잡지 못해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말에는 ‘요행’이 명사화되어 있지만 여기의 요행(徼幸)은 사명(俟命)과 파라렐(parallel, 평행)한 것으로 행(幸)은 요(徼)라는 타동사의 목적이 되고, 이 목적인 행(幸)이야말로 지금 우리말의 요행(僥倖)에 해당됩니다. 요(徼)는 단순히 ‘바란다’ ‘희구한다’라는 타동사입니다. 요기(徼冀)라고 하면 ‘바란다’ 뜻이지요. 그리고 요(徼)가 명사로 쓰일 때는 『노자(老子)』 제1장에서 “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라고 했을 때와 같이 ‘가생이’ ‘변두리’ ‘변방’ ‘샛길’의 뜻을 나타냅니다. 이때의 발음은 ‘교’가 됩니다. 묘(妙)과 요(徼)은 같은 운을 밟고 있으며 묘(妙)를 ‘중심(centre, 센트레)’라 하면 요(徼)는 ‘주변(periphery, 페리퍼리)’의 뜻이 되지요.
14장 5. 존 듀이와 중용
子曰: “射, 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같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자기 몸에서 구한다. 畫布曰正; 棲皮曰鵠, 皆侯之中, 射之的也. 子思, 引此孔子之言, 以結上文之意. 右第十四章, 子思之言也. 凡章首, 無子曰字者, 放此. 비단에 과녁의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정(正)이라하고, 가죽에 과녁의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곡(鵠)이라고 하니, 모두 과녁의 중앙이며, 활쏘기의 목표점을 말한다. 자사는 여기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윗문장의 뜻을 결론지었다. 오른쪽은 제14장이니, 자사의 말이다. 장이 시작될 때 ‘자왈(子曰)’이 없으면, 자사의 말이라고 보면 된다. |
이 구절은 군자의 도(道)를 활쏘기에 비유한 것인데, 예로부터 그런 비유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요번에 야회에 가지만, 옛날 선비들이 모여서 야회를 가면 반드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가 있었거든요. 활쏘기라는 것은 옛날 사람의 풍습에 있었던 거니까, 자기들이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옛날 교육이라는 게 ‘문(文)’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무(武)’도 함께 배우게 했다는 거지. 지금도 동경대학에 가면 궁술부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데, 그것이 옛날 교육의 전통을 잘 지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구절은, 군자라면 활을 잘 쏠 줄 알아야 하고, 이 활쏘기는 자기들이 보기에 매우 군자의 도(道)에 가까운 것 같다는 뜻이예요.
‘실저정곡(失諸正鵠).’ 주자 주를 보면, 정(正)과 곡(鵠)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삼베에 <표적을> 그려놓은 것을 정(正)이라 하고, 가죽을 붙여 놓은 것을 곡(鵠)이라고 한다[畵佈曰正 棲皮曰鵠].” 정(正)을 정곡이라고 해도 되죠. 대화 중에 핵심을 찌르는 말을 뭐라고 해요? 정곡을 찌른다고 하죠? 그런 의미예요. 활을 쏠 때, 과녁의 가장 가운데에 있는 목표의 센터(Center)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저정곡(失諸正鵠)’ 그런데, 이게 군자의 도(道)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여러분 잘 모르겠죠? 여기에 옛날 사람들의 굉장한 생각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죤 듀이(John Dewey: 1859-1952) 아시죠? 교육에 있어서 목적론의 중요성을 말한 사람으로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에 보면 그의 생각이 잘 나와 있는데, 이게 우리의 논의와 같은 맥락입니다.
흔히 우리는 마치 어떤 목적이라는 게 과녁으로 있는 걸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교육할 적에 보통 목적이 저 바깥에 있는 걸로 알아요. 예를 들면, 축구를 할 때 축구하는 목적이 뭡니까? 골대가 목적은 아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골대를 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축구의 목적은 골대로 골을 차 넣는 거예요. 그리고 공을 차 넣는 것은 그 순간까지는 사람의 발의 기예죠. 행위자는 사람의 발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발의 기술이라고. 그런데 축구의 목적을 마치 골대에 공이 들어가는데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활을 쏠 적에 활을 쏘는 목적이 그 과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손이 활을 튕겼을 때에 그 명중 여부가 결정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 튕기는 것은 전부 나의 행위라고. 그러니까 교육의 목적은 저 밖의 과녁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그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내 몸의 순간적 상황을 콘트롤하는 모든 요소들에 내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존 듀이의 교육론에 있어서 굉장히 획기적인 사상이거든. 그런데 이게 동양 사상으로부터, 즉 듀이의 동양적인 생성론에서 부터 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존 듀이가 왜 존 듀이인지 모르고, 그가 근세 서구라파 교육론을 왜 만들었는지를 몰라. 잘 들어 보세요. 그 사람은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미국의 교육질서를 개편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포부를 가진 사람이 주장했던 교육론이 바로 다이내믹 프로세스(Dynamic process, 역동적 과정)를 창조한 교육론이었고, 그게 바로 그 사람의 유명한 이론인 ‘도구주의’라는 겁니다. 마치 우리는 ‘목적’이라는 말을 쓸 때에, 그 ‘적(的)’이라는 것을 과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용론(中庸論)에 의하면 과녁은 목적이 될 수가 없어요. 정곡이 그대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목적은 어디 있는 것이냐 하면 바로 내 몸 안에 있다는 겁니다. 즉, ‘반구저기신(反求諸其身)’ 왜 실패했느냐, 왜 저 과녁에 들어맞질 않았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서 구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군자지도이고, 이게 바로 중용(中庸)이예요. 이것은 엄청난 겁니다. 존 듀이의 사상이 중용(中庸)에 다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교육의 목적’하면,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 박사 따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 박사를 따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얻었느냐’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다들 기억하겠지만, 내가 중용(中庸)의 정의를 처음부터 ‘다이나믹 프로세스’라고 ‘다이내믹 이퀼리브리엄(Dynamic Equilibrium, 역동적 평형)’이라고, 그리고 ‘끊임없는 시중(時中)’이라고 했죠? 이 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향방이 달려 있는 문제란 말입니다. 인류의 미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것에서 사고의 전향이 일어나야 됩니다. 과녁은 애쓰지 않아도 눈에 쉽게 보이니까, “야! 저기 과녁이 보인다. 저걸 목표로 향해 쏘자!”라고 하는데 넌센스죠, 넌센스. 명심하십시오. 그런 식의 목적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내 몸 밖에 있는 그런 과녁은 목적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나이 몸의 역동적 과정을 유도하는 방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항상 내 몸에서 확인하고 반추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쏘기는 군자지도에 가까운 것이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군자라고 한 것이죠. 아시겠습니까?
존 듀이 교육론의 핵심은 ‘모든 에임(Aim)은 프로세스(Process)에 내재한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나중에 화이트헤드(Whitehead)의 교육론과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맨날 바깥에서 교육의 목표를 구하고 있어요. 교육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부 ‘과녁의 형태가 무엇이냐?’하는 것만이 주요 관심사입니다. 교육론이란 게 ‘과녁이 어떻게 생겼느냐, 잘 보이게 해라, 형광색으로 해라, 네모로 해라, 동그랗게 해라’ 이런 것이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이야기해 왔지만, 교육론에 있어서 반구저기신(反求諸其身)하는 것, 이게 핵심적인,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중용(中庸)이란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위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씹고 씹어도 이것은 끝이 없는 책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서 중용(中庸)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시고, 살면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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