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1. 도올서원의 미래
몸이 아프다는 건 정말 비극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몸의 건강을 유지한다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요 며칠 내가 좀 심하게 아팠는데 오늘은 갈래가 조금 잡힌 듯합니다. 사람이 역시 무리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무리하고 살면 그게 축적돼서 반드시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거든요. 요번에 내가 아주 지독하게 고생을 했습니다. 밤낮으로 계속 잤는데도 혓바닥 밑이 꼭 암덩어리처럼 부어서는 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계속 피곤하기만 하고. 아무튼 살아 있을 동안에는 건강해야지. 몸이 아픈 건 참 비극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학생들이 많이 안 나왔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몸이 아파서 못 나온 학생들도 꽤 있을 거예요. 사실 이 도올서원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대로 다닌다는 것 그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삶의 훈련인데, 마칠 때까지 꾸준히 공부할려면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초지일관한다는 게 뜻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니까 끝까지 건강을 잃지 마시도록!
도올서원의 한 달 코스는 단순히 한문을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종합적인 인격을 닦기 위한 과정입니다. 전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우리나라 현재의 교육은 이러한 종합적인 훈련을 시켜주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황병기 선생님 강의를 들었는데, 참 좋은 강의였죠? 나도 강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황병기 선생도 분명히 내 수준은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 도대체 강의를 잘하는 사람들이 드문데, 그 이유는 강의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강의하는 내용의 본질을 깨닫질 못해서 그래요. 본질을 깨달으면 강의가 재미있고 쉬운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황병기 선생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이 먹은 선배로서, 내가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분입니다.
개비와 비개비로 실력을 평가하지 말라
그런데 이런 분들이 대학에서든 국악계에서든 도대체 기를 못 편단 말이야. 국악계는 물론이고. 국악계에서 쓰는 말 중에 ‘개비’, ‘비개비’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나라 국악계라는 게 원래 무속과 관련이 깊은데, 그러다 보니 대대로 내려오는 무당 집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삼현육각이니 시나위니 하는 것들을 배운 그런 사람들을 ‘개비’라 해서 ‘진짜’로 치고, 이 ‘개비’가 아닌, 소위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비개비’라 하면서 ‘가짜’라고 배척합니다. 황병기 선생은 물론 ‘비개비’죠. 그래서 황선생님이 아무리 가야금을 잘 타도, “저건 비개비 가야금일 뿐이야”라고 흘겨버리고 말아요. 지난 일림(一林)때 오셨던 박범훈 교수님은 전통적인 무속‘개비‘집안 출신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유학까지 갔다 왔으니 대단한 사람이죠. 그런데 황병기 선생 강의를 들어 봤으니 알겠지만, 그 지식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경기고등학교·서울법대를 나온 정도의 학문의 깊이가 있으니까, 역시 그런 안목이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그 양반 평생에 지난 목요일 강의처럼 재밌는 강의는 아마 못해봤을 겁니다. 강의하는 세 시간 내내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진지하게 듣고 있는 학생들 자세며, 일사불란하게 절하는 태도며, 아무튼 선생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이었대요. 우리 도올서원 학생들로서도 일생일대 들어보지 못한 명강의였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말 근래 보기 드문 명강의였죠? 우리나라 사람에게서 그런 명강의를 듣는다는 건 한량없이 기쁜 일입니다. 사림(四林)때도 다시 모셔서 동서양 음악사를 조감하는 강의를 부탁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도올서원생들에게 바라는 것
그런 좋은 강의를 듣는 여러분들이 앞으로 시시한 놈들이 되진 않겠죠? 이제 이삼십년 후에 ‘대통령이니 장관이니 유명 교수니 그런 사람들에게 공통분모가 하나 있는데 알고 보니 모두 도올서원 출신이더라’ 이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 이 도올서원은 국가에 등록된 단체가 아닙니다. 나는 국가제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탄압을 하던 뭐하던 죽을 때까지 등록 안 할 거예요. 사실 세무조사 받으면 여러분들이 낸 십만 원도 걸릴 거거든? 그래서, ‘이건 학생들이 기부한거다’ 하면서 유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사실 도올서원은 형체도 없고, 제도권에 속해 있지도 않고,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소야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만 주면 빌릴 수 있으니까 내 돈으로 빌린 거고. 우리 도올서원은 정말 순수한 임의단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운영한다면 내가 팔십 살까지 가르친다고 해도 기껏 육십림 밖에 안 되는 거야. 한 번에 백 명 이상씩 가르치기는 어려우니까, 일 년에 이백 명, 육십 림이라고 해봐야 육천 명밖에는 안 된단 얘기죠. 공자는 삼천제자를 거느렸다는데, 현대사회에 사는 내가 아무리 조직적으로 가르친다 해도 육천 명밖에는 안 되니. 아무튼 총 육십림 중에 삼림이 배출됐다는 건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벌써 육십분의 삼을 차지한 거예요. 그러니 이 자리가 상당히 귀한 자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시도록!
내 바램은 이 형태 그대로 교외에 터를 잡아서 서원을 지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옛 성균관 스타일로 쿼드랭글(quadrangle)로 짓는 거예요.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삼각산같은 수려한 산이 있는 그런 자리에, 명륜당·선생방·교수방이 들어가는 건물을 짓고, 그 앞에, 널직하고 네모 반듯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보도록 동재·서재를 짓고, 누각도 하나 멋있게 짓고. 꼭 영화에 나오는 소림사처럼 말이야.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여름·겨울 한 달씩 여기서 숙식하면서 강의를 받을 수 있다면 좋겠죠? 새벽에 바라같은 걸 뻥-때리면 재생들이 착착 다 나와서 소림사 쿵푸 같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오전엔 공부하고, 오후엔 산천을 돌아다니고, 농사도 짓고, 그렇게 숙식을 하면서 강의를 받으면 우선 결석하는 학생이 없을 거야. 물론 이것도 국가에 등록 안 합니다. 어떠한 제도권과도 관계가 없을 거예요. 이것이 나의 꿈인데, 여러분들이 졸업해서 내 꿈을 이뤄줬으면 합니다. 땅은 앞으로 내가 병원을 개업해서 살 테니까, 건물 짓는 건 여러분들이 돈을 대는 거야. 어때? 괜찮겠죠?
18장 2. 서도(書道)와 심미적 감수성
지난 시간에 17장까지 했죠? 오늘은 진도를 나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기예를 하나 가르쳐 주겠어요. 현대 생활의 근본적 문제 중의 하나가 취미다운 취미가 없다는 점인데, 사실 컴퓨터 게임을 해본들 금방 식상해지고, 디즈니랜드를 가본들 몇 번 못가 시시해집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가슴 뿌듯하게시리 놀꺼리가 없어요. 그러니 학생들이 방황을 하고, 쓸데없이 술이나 마시러 다니는데, 우리 도올서원 학생들은 최소한 붓 잡는 법 정도는 알아야겠어요. 저번에 작시(作詩)를 가르쳐 줬죠? 시(詩)를 알았으니, 이제 서도(書道)를 배워봅시다.
칼리그라피는 모든 문자문명에 존재
‘칼리그라피(Calligraphy)’라 하면 중국문명에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문자가 있는 문명치고 칼리그라피가 없는 문명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사원에 가면 꼬불꼬불한 이슬람 문자로 사원 벽을 온통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게 모두 칼리그라피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으로, 칼리그라피는 털로 된 붓을 도구로 사용하는 아트(Art)만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있는데, 중국 문명 최초의 서도(書道)라 할 수 있는 갑골문은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칼로 새긴 것입니다.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칼로 새겨진 획 하나하나에서 매우 강력한 파워를 느낄 수가 있어요. 『동경대전(東經大全)』이나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같은 목판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판본이란 나무판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칼로 파낸 것으로, 구한말까지 가장 포퓰러한 인쇄 방식이었는데, 『동경대전(東經大全)』 ‘무자판(戊子版)’을 보면 서민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파냈는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제 동양의 칼리그라피가 붓의 예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겠죠?
심지어 볼펜도 훌륭한 칼리그라피 도구가 됩니다. 옛날에 내가 시골에 가서 서도(書道)의 대가라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양반이 어디서 볼펜을 하나 구해갖고 와서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 세상에 이렇게 간편하고 잘 써지는 게 있냐구! 그러면서 볼펜으로 글씨를 착착 쓰는데 완전히 붓글씨 쓰는 폼이지 뭐. 아무튼 우리가 공책에 볼펜으로 노트 필기하는 것도 훌륭한 서도(書道)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도(書道)는 붓·먹·벼루·종이로 이루어집니다.
붓, 팔의 연장
붓은 중국 문명의 가장 기발한 칼리그라피 도구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보편적인 칼리그라피 도구인 볼펜과 비교해보면 그 특성을 잘 알 수가 있죠.
우선 우리가 볼펜으로 노트 필기를 할 때는, 그것을 쥔 우리 손의 힘이 볼펜 대롱을 지나 맨 끝의 볼(Ball)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유지됩니다. 즉 우리 힘의 벡타(vector, 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양)량이 가감없이 전달되어 노트에 글씨로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서도(書道)는 행동반경이 매우 작습니다. 새끼손가락에서 팔꿈치에 이르는 선이 책상 위에 딱 붙어 있고 볼펜은 거기에 기대있는 형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이 볼펜 서도(書道)는 그 행동반경이 작은 대신에 필기의 안정성을 획득하는 겁니다. 그러니 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결국은 현대의 가장 보편적인 서도(書道) 형식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붓을 사용하는 서도(書道)는 그 자세부터 다릅니다. 붓대롱의 윗부분을 엄지와 검지, 중지로 잡고 팔꿈치를 드는데, 이렇게 하면 엄청나게 넓은 행동반경이 가능해져서, 볼펜의 행동반경이 5 센티미터 정도라면, 붓은 1 미터 이상을 종횡무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밀한 글씨부터 커다란 글씨까지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서도(書道)의 문제는 붓을 쓸 때 붓대롱까지는 나의 기(氣)가 그대로 전달되지만, 그 아래의 털 부분에서는 그것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대롱을 타고 쭉 내려간 나의 기(氣)가 털 부분에서 미묘하게 분산되는데, 바로 여기에서 붓을 사용하는 칼리그라피 아트의 절묘함이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붓글씨가 볼펜 글씨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유자재로 변하는 글자의 두께입니다. 심지어 하나의 글자 내에서도 그 변화가 참으로 다양한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처음에는 붓의 맨 끝 부분부터 종이와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글씨가 진행됨에 따라 뾰족했던 붓 끝에 기가 점차 백이면 백 가닥, 천이면 천 가닥으로 흐트러지고 붓이 그어대는 획의 굵고 힘차게 나아가다가 클라이막스를 지나서는 붓끝이 다시 가늘어져서 마침내 글자를 마무리할 때의 붓 끝의 모습은 원래의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붓은 반드시 꼿꼿하게 수직으로 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운필(運筆)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글씨의 진행을 위해, 또는 두껍게 쓰기 위해 붓을 옆으로 눕히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두껍게 쓰고자 할 때는 다만 붓을 위에서 아래로 눌러 주기만하면 되고, 이 상태대로 붓을 쥔 팔을 좌우로 움직여 주면 굵은 선이 나오는 것입니다. 붓은 상하 운동, 팔은 좌우 운동, 그리고 한 획을 시작할 때와 끝낼 때가 똑같이 붓끝이 뾰족하고 단정한 원래의 모습일 것. 이것이 바로 ‘중봉(中峰)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만 파악하면 되지, 서관(書館)에서 가르치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것들에 매달리는 것은 이런 원리적 파악을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해 버린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실 이 ‘중봉(中峰)의 원리’만 제대로 터득해 버리면, 무슨 필법, 누구누구 체(體) 하는 것은 깨끗하게 망각해 버릴수록 좋은 거예요.
18장 3. 먹과 벼루와 종이
먹
먹은 서양의 잉크(Ink)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먹의 영어로 번역도 역시 잉크라고 합니다. 먹은 탄소(carbon)입자를 아교로 굳힌 것인데, 옛날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검댕만큼 검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굴뚝 검댕이를 털어다가 먹 만드는 재료로 쓴 것입니다. 태우는 나무 종류에 따라 검댕이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요즘엔 나무를 태워 검댕이를 받질 않고 석유에서 나오는 카본 가루를 씁니다. 석유에서 나오는 카본 가루가 까맣긴 더 까맣지만, 고풍(古風)의 맛은 없어요. 중국에서 나오는 먹중에 아직 검댕이를 원료로 한 것이 있긴 하지만, 나무가 아니라 기름을 태워 얻은 검댕으로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색은 빛의 색과 염료의 색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차이는 빛의 모든 색은 다 합하면 흰색이 되고 염료의 모든 색은 다 합하면 검정색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검정색에는 모든 색들이 녹아들어가 있고 그것을 펼치면 온갖 색이 다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먹이라는 잉크의 매력이며, 수묵화가 가능해지는 이유인 것입니다.
벼루
어렸을 때 나는 벼루와 먹 양쪽에서 다 잉크가 생산되는 줄 알았어요. 벼루나 먹이나 모두 검정색이잖아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을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벼루란 게 단순한 돌멩이더라구. 물론 아무 돌멩이나 다 벼루가 되는 건 아닙니다. 벼루가 될 수 있는 돌은 두 가지 상반된 조건을 충족시켜야 되는데, 물을 흡수하지 않을 만큼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해야하면서도 먹이 곱게 잘 갈릴 정도로 거친 성질이 있어야 되거든요. 이런 조건에 맞는 돌이 많지는 않아요. 조직이 치밀하기만 하면 먹이 잘 안 갈리고, 먹이 잘 갈리게 조직이 성기고 거칠기만 하면 물을 다 빨아 먹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꼭 검정색이란 건 좋은 벼루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좋은 벼루일수록 대개 누리끼리한 색을 띠는데, 벼루 중에 최상의 벼루라고 하는 중국에서 나오는 단계연(丹鷄硯)이라는 벼루도 마치 닭다리에 붉은 피가 묻은 것 같은 색깔을 하고 있어요. 옛날에 인조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에게 무엇을 보고 왔는지를 물었는데, 단계연이 가장 탐나더라는 대답에 노해서 세자에게 벼루를 던졌다는 일화가 있죠? 물론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벼루도 질이 상당히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벼루를 사용한 뒤에는 항상 깨끗이 씻어 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먹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게 좋은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후레시한 상태에서 먹을 갈아야 최상의 잉크가 나오지 않겠어요? 먹을 갈 때는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갈되, 먹과 벼루가 만나는 각도가 수직이 되도록 쥐고 갈아줘야 합니다. 먹이 눕거나 하면 안 돼요. 그리고 벼루에 먹을 너무 꽉 눌러서 갈면 옷에 그 잉크가 튀는 경우가 많은데, 적당히 지그시 누르고 천천히 갈아야 합니다. 먹이 튈까 봐서 먹을 그냥 벼루 위에 얹어 놓은 듯이 슬슬 갈면 백날 갈아봐야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먹 가는 것 하나에도 중용지도(中庸之道)가 필요한 거예요. 반듯하고 의젓하게 자세를 잡고 먹을 가는데, 힘을 지긋이 주되 잉크가 튀어서 주변에 하등의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 선비들은 흰 옷에 먹이 튀는 걸 엄청난 수치로 알았어요.
종이
종이는 기본적으로 나무죠? 나무를 절구에 찧어서 물을 타가지고 쫙 펴서 김처럼 말린 거니까. 그런데 이 종이를 자세히 보면 나무의 섬유질이 얼기설기 얽혀서 마치 아프리카 정글 같은 섬유질의 정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잉크를 붓에 찍어 종이에 묻힌다고 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말하자면 섬유질의 정글에 물이 확 쏟아져 들어가는 거예요. 탄소 입자들이 둥둥 뜬 물로 홍수가 나는 거지. 이 때 잘 갈린 먹물은 물속에 탄소 입자가 아주 촘촘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이 탄소 입자가 섬유질 정글의 나뭇가지에 모두 걸리고 물만 쫙 빠져나간 경우를 “번지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 먹을 갈아야 되는 거지요. 물론 발묵(發墨)이라고 해서 일부러 번지는 효과를 이용하는 기법도 있긴 합니다.
18장 4. 서도로 버무려질 삶
서도(書道)는 기본적으로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부분과 그것이 불가능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붓이 나의 몸의 연장태, 즉 나의 심성을 전달하는 주관적 도구의 세계라면, 묵(墨)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객관의 세계입니다. 붓은 내가 콘트롤하는 공부(工夫)의 세계, 묵(墨)은 정글에서 벌어지는 탄소 입자들의 춤의 세계, 즉 자연의 세계지요. 그곳은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재수(chance)의 오묘함이 깃든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종이 예술의 가장 위대한 점이자, 서구 예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일회성(一回性)! 개칠(改漆)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서도(書道)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거예요. 한번 잘못하면 그냥 가는 거라고. 회복이 안 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친구지간에도 한번 의가 상하면 두 번 다시 개칠이 안 되거든요. 모든 인간의 감정이 다 그래요. 그런데 서양 예술은 개칠(改漆)을 잘 할수록 좋은 그림이 된다는 겁니다. 캔버스 위에 어떻게 개칠을 잘해서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가 그들에겐 최대의 관심사거든. 그런데 동양 미술은 달라요. 개칠의 기회가 원칙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단 한 번에 모든 승부를 걸어라! 석도가 『석도화론(石濤畵論)』 맨 첫머리에 뭐라고 했습니까? 만법(萬法)이 일획(一劃)!
동양 예술은 일획(一劃)에서 시작해서 일획(一劃)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서도(書道)에는 종이와 필묵의 자연적 특성이 그대로 배어 있어요. 그 자연에 한번 그려진 건 반드시 족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도(書道)에는 아주 치열한 데가 있어요. 그 일회성(一回性)을 완벽하게 콘트롤하기까지 몸의 공부(工夫)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오늘 인사동 아무 데나(특정한 곳을 가르쳐주면 장사한다고 할 테니까) 가서 붓하고 벼루, 먹을 하나씩 장만하세요. 그래서 자꾸만 연습을 해봐요. 안진경이든 뭐든 교본 하나 놓고 그대로 그려 보라구. 그렇다고 그런 서체들을 그대로 따라 하란 말은 아니예요. 글씨란 결국 자기 개성의 표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쓰냐 못 쓰냐가 문제가 아니라 달(達)하냐 그렇지 못하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쓴다, 또는 예쁜 글자[體]를 쓴다고 해도 붓을 백번 그었는가, 한번 그었는가의 차이는 누가 봐도 알 수가 있고, 또 거기에는 거짓말이 통하지도 않습니다【따라서 쓸 본(本)을 옆에 놓고서 최대한 비슷하게 써 내려가는 지겨운 반복적 흉내내기를 임서(臨書)라고 하는데, 이 임서의 최종 목적도 완벽한 카피(copy)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손과 팔, 즉 내 몸의 상태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운필(運筆)의 도(道)와 묘(妙)를 터득하는 것이다. 100번 반복으로 깨닫는 몸과 붓의 상감(相感)과 1000번 반복함으로써 깨닫고 느끼는 상감(相感)은 비교 불가능한 질적 차이를 갖는다】.
중용(中庸) 제1장에 ‘천하지달도야(天下之達道也)’라고 한 것처럼 체(體)는 없고, 오직 달(達)의 경지만 있을 뿐인 거예요. 안진경체가 어떻고 왕희지체가 어떻고 구양순체가 어떻고 하는 놈들은 모두 본(本)의 의미를 모르는 미친 놈들이야. 절대로 그런 말을 듣지 말아요. 오직 여러분 자신들의 체가 있을 뿐입니다. 글씨는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됩니다. 그러나 그 기본 법칙만은 익혀야지. 그 다음부터 달(達)할 때까지 열심히 쓰면 되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이 정도 강의면 우리 도올서원 학생들에게 서도(書道)는 이제 끝난 겁니다. 도올서원 학생들은 최소한 붓을 잡을 줄은 알아야 해요. 물론 달(達)할 때까지 한 십년은 걸리지만, 붓을 십년도 잡지 않고 어떻게 서도(書道)했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십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잠깐입니다. 서도(書道)란 살면서 하는 거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글씨 쓰기가 다 서도(書道)가 되는 것이니, 여러분 노트 필기하는 것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십년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장 쓰는 거 이게 다 서도(書道)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안진경 글씨[本]를 갖다 놓고 쓴 게 아니라 단지 어릴 때 자세랑 법칙 정도를 배우고 나면 그 이상은 자기가 했던 겁니다. 나도 어릴 때 어머니에게 그렇게 배웠어요.
서도(書道)를 익혀야 합니다. ‘아트(Art)’가 없으면 인생이 재미가 없어. 인생을 무궁무진 재밌게 살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에 많지가 않아요. 오직 내 건강이 감당을 못해 야단이지 나는 심심해서 괴로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아트(Art)’를 몸에 익히세요. 디즈니랜드 백번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때 나도 이태원 디스코텍이다 뭐다 많이 가봤지만 그런 거 다 잠깐이예요. 그런 거 할 땐 하더라도 중요한 건 내 몸에 ‘아트(Art)’를 축적하는 겁니다. 서도(書道)를 어려운 거라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지필묵(紙·筆·墨)’을 항상 곁에 두십시요. 누가 와서 지필묵 있냐? 했을 때 딱 내놓을 정도는 되야지. 도대체 지필묵도 구비해놓지 않은 놈들은 지식인으로 쳐 줄 수가 없어요. 이제 서도의 원리를 알았으니까, 오늘부터 집에 앉아서 잘 쓰든 못 쓰든 하루 한 시간씩이라도 써보세요. 앉아서 한 시간을 그러고 있으면, 처음에는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같이 아프지만, 하루 이틀 지나 습관이 되어서 몸에 익으면 편해집니다. 아시겠죠? 중봉(中峰)을 유지하고, 마치 지난번에 황병기 선생에게 배운 시조창을 하듯이 리드미컬하게 띠리∼ 이∼ 이∼
18장 5. 심미적 감수성
아! 그러니까 또 생각이 나는데, 서원을 청소할 때 학생들이 하는 걸 보면 참 문제가 많아요. 한 사람도 제대로 하는 걸 못 봤습니다. 청소란 게 알고 보면 공간 처리 기술이라서 공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서원의 이 넓은 공간을 빗자루로 다 쓸자면, 먼지도 날리고 시간도 꽤 걸리기 때문에 이런 대걸레를 마련해뒀는데 이걸 쓸 줄을 몰라. 이렇게 대걸레를 잡고 구석구석을 챙겨 가면서 쫙 밀고 나가서 코일처럼 왔다 갔다 하면 금방 끝나잖아? 단, 주의할 점은 코너를 돌 때 걸레를 번쩍 들지 말고 그대로 바닥에 붙인 채로 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흘려버리는 쓰레기 없이 깨끗이 청소가 되거든. 이것도 시조창이랑 마찬가지예요. 음을 쭉 늘여주잖아? 딱딱 끊어지지 않고 말이야. “동차앙∼ 아∼ 아∼”(선생께서 노래부르시며 몸소 시범을 보여주심) 두 사람도 필요 없어요. 한사람이면 충분해. 강릉 선교장같은 델 가보면 옛날 목수들이 어떻게 건물을 지었는가를 볼 수가 있는데, 잘 보면 제일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음매예요. 서까래와 대들보, 처마와 용마루가 끊기지 않고 절묘하게 이어져 있는데, 그런 게 그대로 시조창 악보란 말이야. 바로 그런 부분에서 공력(功力)이 드러나고, 멋이 나타나는 거예요.
매사가 인터그레이션(Integration, 융합)! 사물을 볼 때 따로따로 떼어내서 보면 핵심이 안 보입니다. 걸레질·비질·가위질·젓가락질 이런 것 모두가 중용(中庸)의 도(道)를 닦기 위한 내 몸의 훈련이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사는 걸 한번 보고나면 알 수가 있어요. 먹는 것부터 소제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섬세한 감각이 들어 있다구. 나는 이런 생활의 감각을 어려서 붓끝에서부터 배웠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현대적 삶을 살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조선조의 전통적 생활 규범을 차근차근 알게 모르게 배웠거든요. 전통 문명의 훈도를 받은 마지막 세대지요.
그런 점에서 난 참 안타까운 게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는 걸 보면 도대체가 생활에 예술이 없어요. 난 우리 집 애들에게 연필 깎는 기계를 절대로 못쓰게 합니다. 연필은 반드시 칼로 깎아야죠. 나무를 깨끗이 칼로 밀어서 동그랗게 모양을 잡고 연필심을 고르게 깎아 내는 기예를 손에 익히는 데만도 최소한 십년 세월은 걸립니다. 이게 되야 손재주란 게 생겨요. 이런 것도 안 되는 애들이 나중에 어떻게 컴퓨터를 만지고, 무슨 좋은 예술이 나오겠어요. 연필 하나 깎는 데에도 공간 처리 기술, 심미적 감수성(Aesthetic Sensitivity)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젓가락질도 마찬가지예요. 포오크로 푹 찌르는 것과 젓가락 두 끝을 딱 맞춰 정확히 목표물을 집어내는 것과는 천지차이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도올서원 학생들은 이런 걸 배워야 됩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 비해 이런 예술적 감각이 평균적으로 더 발달해 있는데, 이번 코오베 지진 때만 해도 그 질서정연하게 대피하는 거라든지, 신속한 복구 작업이라든지, 이런 게 결국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익혀온 감각이 발현된 것이지, 그게 아무렇게나 된 게 아닙니다. 우리 조선 문명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이렇게 아주 일상적인 문제에서부터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18장 6. 한순간의 불꽃 같은 인간문명
지난 시간에 공부한 17장은 ‘순기대효야(舜其大孝也)’라고 해서, 그 내용이 순(舜)임금을 찬양한 것이었는데, 이 18장은 ‘무우자기유문왕호(無憂者其惟文王乎)’라고 해서 문왕(文王)을 찬양한 글입니다. 그리고 19장을 보면, ‘무왕주공 기달효의호(武王周公, 其達孝矣乎)’라고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찬양한 글임을 감안할 때, 17ㆍ18ㆍ19장이 순(舜)·문(文)·무(武)·주공(周公)에 대한 한 묶음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동일한 성격의 프라그먼트(fragment)로 볼 수 있어요. 이것은 유교의 정통적 파라곤(Paragon), 유교를 만들어간 네 인물(character)에 대한 품평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서로 비교해서 보시도록!
子曰: “無憂者, 其惟文王乎! 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父作之, 子述之. 공자가 말씀하셨다 “문왕(文王)은 걱정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왕계(王季)로서 아버지로 삼았고, 무왕(武王)을 아들로 삼았으니” 此言文王之事. 『書』言‘王季其動王家,’ 蓋其所作, 亦積功累仁之事也. 여기서는 문왕의 일을 말했다. 『서경』에 ‘왕계가 왕실의 일을 부지런히 했다.”라고 되어 있다. 대체로 문왕이 창조하였다는 것은 공을 쌓아 인을 누적시킨 일이다. |
‘文王은 걱정이 없는 사람일 거라고 공자가 말씀하셨다[子曰 無憂者 其惟文王乎].’ 순(舜)·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 이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영어에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재미난 개념입니다.
도토리나무가 생태계를 만든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의 문화·문명(culture & civilization)이라는 것이 그다지 오래된 게 아닙니다. 지구상의 생물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굉장히 최근의 현상이예요. 식물의 경우에 그 지역의 풍토에 따른 식물군(植物群, flora)이라는 것이 있듯이, 모든 생명현상은 기후조건(climate)에 따라서 그 서식지(locality)가 결정되어 있어요. 활엽수는 활엽수가 자라나는 지역에서만 자랍니다.
나는 내 이름을 영어로 ‘Young-Oak’이라고 번역해서 쓰는데, 이 ‘오크(Oak)’이라는 게 도토리나무입니다. 그래서 김용옥은 ‘젊은 도토리나무’죠. 왜 이렇게 쓰냐면, 우리나라가 도토리나무 지대(Oaktree belt)이거든요. 도토리가 있어야 다람쥐가 있고, 다람쥐가 있어야 멧돼지같은 것들이 살 수 있고, 그런 게 있어야 호랑이가 사는 것이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나라에 도토리가 없어지면서 호랑이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 자연상태에서는 ‘에코 체인(eco-chain)’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는 겁니다. 생물의 서식지역이라는 것은 흔히 ‘어디어디가 그 동물의 서식지이다’라고 결정되어 있습니다. 돌고래가 분포되어 있는 곳은 어느 해역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로컬리티(locality)’가 결정되어 있는 거지요.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건설하며 산다
그런데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 등 고대 인류의 해골은 지구상의 어디에서든지 나타납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유골이 어디에든지 나타난다는 사실은 다른 동물의 경우에서는 볼 수 없는 굉장히 특이한(unique) 점입니다. 기후조건(climate)에 관계없이 지금 인류의 조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브로노프스키(Jacob Bronowski, 1908~1974)가 하는 말인데, 인간만이 지구상에서 가능한 모든 조건 그 어디에서도 사는 유니크한 동물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문명을 건설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겁니다. 문명이라는 보호(shield)가 없으면, 인간도 기후 등의 자연조건에 완전히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고, 생존가능한 지역이 한정돼버려요. 아프리카 등지의 더운 지방에서는 의상이 없었는데, 의상보다 문신(tatoo)이 더 빨리 발달했지요. 북상하면서 의상이 발달한다든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하여튼 인간은 문명과 문화라는 것을 만들면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문명(civilization)과 문화(culture)의 문제도 조금 혼동을 일으키는 문제인데,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우선은 문명이라는 것은 대단위로 보고, 문화는 문명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하여튼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최근의 현상입니다. 가깝게는 오천년, 기껏 잡아야 한 만년. 이것은 고고학에서 말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와 비교하면 우스운 것이죠. 소 같은 것의 화석을 보면 수백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모양이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진화의 폭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정말 눈부시게 진화했지요. 유독 인간만이 희한한 생물학적 진화를 한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 해부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해골의 제일 밑에 있는 척추와 해골을 끼는 구멍, 즉 ‘흐라맨 마그넘(foramen magsum)’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서 점점 변합니다. 구멍의 위치가 해골의 뒷부분에서 지금의 위치로, 즉 해골의 밑 부분으로 그 구멍의 위치가 이동해요. 각각의 서로 다른 두개골의 시대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빨리 인간이 진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립한 인간의 두개골을 척추에 끼어 얹으려면, 그 구멍의 위치가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해골만 보아도 직립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삶에 있어서 문화라는 것은 그런 생물학적, 해부학적(anatomical) 진화의 가장 말단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발생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최근의 현상이예요. 기껏해야 한 오천년 정도의 내력밖에는 갖고 있질 않죠. 갑골문이라고 해봐야 불과 삼천여년 전의 것입니다. 대강 B.C 1300년부터 1100년 사이의 일이지요.
인간의 등장과 활약은 24시간 중 1~2초의 시간
‘빅뱅(Big Bang)’으로부터 우주의 나이, 즉 150억년의 기나긴 세월을 생각한다면(요즘은 새로운 학설이 나와서 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인류문명의 출현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눈 깜짝할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나이 150억년을 1년의 ‘캘린더(calendar)’로 쳤을 때, 5천 년전 인류문명의 발생이라고 하는 것은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 정도에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인간들의 지랄이라는 게 1,2초 사이에 지랄한 거지, 대단한 게 아니예요. 그리고 지진 같은 게 나면 제아무리 위대한 문명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끝장나는 거예요.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론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간단한 현실이예요. 종말이라는 게 목사들이 말하듯이 대단하게 하늘나라에서 막 꽹과리치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야. 그럴 겨를도 없어! 이번 고오베 지진의 경험으로도 알았겠지만 순간에 가는 거니까. 죽는 것은 너무 걱정할 게 없어요. 죽을 때는 다 같이 죽으니까. 종말을 걱정해서 못 사는 어리석은 휴거파(携擧派)들은 한심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렇지만 종말을 부정할 필요는 없는 거야, 항상 가능하지! 태양도 100억년 정도 되면 끝난다고 하니까, 앞으로 50억년 남았다고 하는 건지. 하여튼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최근에 만들어진 거예요. 지각 위에다가 잠깐 건설해 놓은 것이 문명입니다.
18장 7. 작자성인(作者聖人)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최초로 만든 놈이 있다 이겁니다. 그것이 누구냐? 그게 바로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입니다. 불을 발명했다, 신농씨(神農氏)가 뭘 했다, 복희씨(伏羲氏)는 또 저걸 했다 등 이런 것이 다 문명을 최초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일본 유학(儒學)에서는 소라이(荻生徂來) 등이 ‘작자위성(作者謂聖)’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있는 말인데, “문명을 최초로 만든 놈들이 바로 성인(聖人)이다”라는 것입니다. “They are makers of civilization”이라는 것이지요. 예악(禮樂)을 작(作)했다, 예악(禮樂)을 지었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작(作)’의 주체가 바로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입니다.
희랍에서는 이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희랍신화의 주인공들로 나와요. 예를 들어, 거미가 신(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미처럼 옷감 짜는 일(weaving)을 기막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나중에 천벌을 받고 거미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신화화되요. 그것은 처음으로 옷을 짜 입은 사람들의 얘기겠지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신화의 주인공으로 된 것입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문명을 최초로 ‘시작(始作)’한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시작(始作)’이라는 말에 ‘작(作)’이 들어가지요?
그런데 동양에서도 예외 없이 ‘컬춰럴 히어로’는 신화로 나타납니다. 요(堯)임금·순(舜)임금, 문(文)·무(武)·주공(周公)이 역사적 실존인물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역사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몇년 몇 월 몇 시에 이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믿었어요. 요(堯)임금·순(舜)임금에 대한 얘기들도 사실은 ‘픽션(Fiction)’일 뿐입니다. 다만 공자(孔子)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예요. 왜냐? ‘내가 지금 이어 받고 있는 이 문명을 최초로 만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때야말로 문명의 발생과 그들의 시간적 거리가 상당히 짧아서(몇 백 년 밖에 안됐거든요), 그래서 ‘作’이라는 말이 매우 구체적이지요. 17, 18, 19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중국문명이 최초로 만들어진 모습에 대한 예찬들입니다.
소라이는 이 말을 정확하게 지키고자 합니다. 이것이 에도(江戶) 유학(儒學)의 특성입니다만, ‘작자위성(作者謂聖)’이라고 하는 것은 거꾸로 “작(作)하지 않은 놈은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후대에는 성인(聖人)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과연 최초에 문명을 만든 놈만이 성인(聖人)이냐?”라는 것이 소라이학(學)의 최대의 논쟁점입니다. 문명은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가? 사실, 완전히 쌩으로 다시 만들기는 이미 어렵지요.
내가 요순시대에만 태어났어도, 나 같이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이 정도 언변으로 구라를 풀고 다녔으면, 대단한 성인(聖人)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려워요. 주공(周公)과 비교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공(周公)시대는 아무 것도 없었을 때였고, 무엇이든 일단 만들면 사람들이 그대로 따랐을 것이니까. 내가 지금 아무리 만든다고 해봤자 기존에 있는 것을 다 뜯어 고치고 나의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되겠어요? 지금 우리는 이미 작(作)할 챈스(Chance)가 없는 문명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라이학(學)을 굉장히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작(作)이라는 것이 후대에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소라이의 지나친 시각일 뿐이라고 해석하고, 요즘은 후대에도 가능하다고 해석하는 학파들이 있습니다. 동경대학(東京大學) 학파들의 싸움이지요.
여기서 ‘무우자기유문왕호(無憂者其惟文王乎)’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문명을 최초로 만든 새끼들이니까, ‘해피(Happy)’한 새끼들이다! 이 말이예요. 이놈들은 참 행복하실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왕(文王)이라는 사람은 사실은 위(位)가 없었던 사람이죠? 문왕(文王)의 아들인 무왕(武王)이 주(紂)임금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세운 거잖아요. 그러니까 문왕(文王)은 아들 무왕(武王)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기연만 딴 사람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무왕(武王)에 비유하면, 문왕(文王)은 저 거제도에 살고 있는 멸치장수 할아버지입니다. 문왕(文王)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문왕(文王)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멸치장수 같은 사람일 뿐이예요. 그런데 나중에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르니까, 무왕의 아버지인 멸치장수도 올라가고, 그뿐만 아니라 멸치장수의 아버지, 할아비까지 올라가는 것이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도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왕계(王季)로서 아버지로 삼았고, 무왕(武王)을 가지고서 아들로 삼았으니[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문왕(文王)은 멸치장수인데, 멸치장수격인 “문왕(文王)은 왕계(王季)로서 아버지로 삼았다.” 그러니까, 왕계(王季)는 실제로 누구인지 더더욱 모르지요. 멸치장수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이었는지 어쨌는지 알 게 뭐냐고.
‘부작지 자술지(父作之 子述之)’라고 하였습니다. 『예기(禮記)』에 ‘작자위성 술자위명(作者謂聖 述者謂明)’이라고 나옵니다. 소라이는 여기의 ‘성(聖)‘이 형용사일 수 있다고 하는 등, 사실은 해석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지만, 하여튼 작(作)과 술(述)의 명백한 차이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작(作)했고, 아들이 그것을 술(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작(作)은 문왕(文王) ‘레벨(Level)’에서 그쳤어요. 그런데, 무왕(武王)이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 여든여섯 살 때였고, 재위(在位)한 것이 칠년 밖에 안 됩니다. 또한, 무왕(武王)의 아들이 성왕(成王)인데,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이 애가 열 살 밖에 안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이삭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죠. 따라서 성왕(成王)이 어리기 때문에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했습니다. 문왕(文王)이 멸치장수이고, 무왕(武王)이 영삼(永三)이니까, 영사(永四)라든가 영이(永二)가 있었을 거 아냐. <폭소>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섭정(攝政)했으니까, 주공(周公)은 술(述)의 ‘레벨(Level)’에 머물 뿐이지만, 그런데 사실은 작(作)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 주공(周公)을 칩니다. 주공(周公)이 작(作)의 진짜 모범(Paragon)이예요. 그리고 진짜 술(述)한 사람은 공자(孔子)죠. 작(作)이라는 것은 문명을 최초로 만든 행운을 누린 행복한(lucky & happy)한 놈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고, 아무나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을 술(述)한 대표적 인물을 공자(孔子)로 보는 것이 후대의 유교적 모델입니다.
18장 8. 문명 창조자들의 업적
武王纘太王ㆍ王季ㆍ文王之緖, 壹戎衣而有天下, 身不失天下之顯名. 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 무왕(武王)은 대왕(大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서(緖), 즉 그 실마리, 그 내력을 이어서[纘] 융의(戎衣)를 한 번 착 걸치니 천하를 얻었다. 그래서 그 몸은 천하(天下)의 드러난 이름을 잃지 아니했다. 此言武王之事. 纘, 繼也. 大王, 王季之父也. 『書』云: ”大王肇基王迹.“ 『詩』云: ”至于大王, 實始翦商.“ 여기서는 무왕의 일을 말했다. 찬(纘)은 잇는다는 말이다. 태왕은 왕계의 아버지다. 『서경』에 “태왕이 왕의 자취를 마련했다.”라고 했다. 『시경』엔 “문왕에 이르러 실제로 처음으로 상나라를 쳤다.”라고 되어 있다. 緖, 業也. 戎衣, 甲冑之屬. 壹戎衣, 「武成」文, 言壹著戎衣以伐紂也. 서(緖)는 업이다. 융의(戎衣)는 갑옷의 종류다. 일융의(壹戎衣)는 「무성」의 문장에 ‘한번 전투복을 입고서 주를 정벌했다.’라고 말했다. |
‘무왕 찬태왕왕계문왕지서(武王 纘大王王季文王之緖)’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이라는 것은 해석에 어려울 게 없고, 여기서 보면, 원래 다들 왕(王)이 아닌데, 무(武)가 왕(王)이 되고 나서 왕호(王號)를 받은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도 자식이 잘 되면 조상이 잘 되지요. 우리나라 무덤을 돌아다녀 보면 그 비석에 새겨져 있는 말이 죄다 벼슬했다는 사람들뿐입니다. 나도 비문을 간혹 쓰는 사람인데, 우리나라 비문을 보면 90%가 신빙성이 없어요. 우리 집도 나의 증조부(曾祖父)가 벼슬을 하는 바람에 고조부(高祖父)까지 다 가라로 올라갔지요.
‘일융의(壹戎衣)’라는 것은 『서경(書經)』 「무성(武成)」 편(篇)에 똑같은 용법이 나오지만, 융의(戎衣)라는 것은 갑옷ㆍ군복ㆍ전투복이고, 일(壹)은 주자주에 ‘언일저(言壹著)’이라고 하듯이 한번 딱 입었다는 것입니다. “융의(戎衣)를 한번 싹 걸치니까 천하(天下)를 유(有)한다.” 여기서 유(有)라는 것은 소유한다(possess)는 뜻이지요.
그런데, 무왕(武王)과 순(舜)임금에 대한 서술의 수준을 서로 비교해 보면, 순(舜)임금에 대한 말이, 17장에서 ‘순기대효야여 덕위성인(舜其大孝也與 德爲聖人)’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순(舜)과 무왕(武王)을 비교할 때, 서술해 놓은 수준을 보면 순(舜)이 높아요.
‘신불실천하지현명(身不失天下之顯名)’이라는 것은 평가가 박절하지 않습니까? 적극적 긍정이 아니라, ‘불실(不失)’이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상당히 인색한 표현입니다. 왜, 이 두 인물에 대한 서술이 이렇듯 차이가 나느냐? 유교의 문치주의에 배치했단 말입니다. 무왕(武王)은 비록 이 세계를 개혁해서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사람이나, 창칼과 융의(戎衣)로 일으켰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가 높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인물평과 그에 관련된 가치기준이 이 문장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유교의 평가기준과 그 기본정서는 무서운 것입니다. 후대에 기록이기 때문에 포폄이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이조창건에 대한 것도 제대로 되었으면, 이성계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는 없는 거예요. 항상 세종을 높이지요. 쿠데타를 일으킨 놈들은 재수가 좋아서 천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가치서열에 있어서는 떨어진다는 겁니다.
『논어(論語)』 「팔일(八佾)」 편(篇)에 ‘소(韶)음악은 진미(盡美)고 진선(盡善)이다. 그런데 무왕(武王)의 음악은 진미(盡美)하지만 미진선(未盡善)이다[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벨이 하나 낮지요. 또 『맹자(孟子)』 「진심(盡心)」 편(篇)에 ‘孟子曰 堯舜性之也 湯武身之也 五覇假之也’라는 말이 있는데, “요(堯)ㆍ순(舜)은 타고난 그대로 위대한 성품을 갖춘 사람들”이고, ‘탕(湯)ㆍ무(武)는 신지(身之)’라는 것은 “후천적으로 몸에 익혀서 억지로 된 놈들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패(五覇)는 가지(假之)’라는 것은 “가짜다”라는 것이죠. 평가가 정확해요. 탕(湯)ㆍ무(武)은 확실히 요(堯)ㆍ순(舜)보다 한 급이 낮습니다. 이처럼 중용(中庸)을 읽을 적에도 사서(四書)의 다른 프라그먼트(Fragment)와 항상 비교해서 봐야 뜻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 위(位, position)가 천자에 이르렀고, 부(富)는 ‘사해지내(四海之內)’를 다 가지고 있다[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그래서 ‘존위천자(尊爲天子)’한다. 존(尊)이란 지위(position)의 높이를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부(富)’라는 것은 요새처럼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떤 ‘영향력’ 같은 그런 것입니다.
‘종묘(宗廟)가 그를 향음하고 자손(子孫)이 그를 보존한다[宗廟饗之 子孫保之].’ 이것은 순(舜)의 경우와 같아요.
‘존위천자 부유사해지내 종묘향지 자손보지(尊爲天子, 富有四海之內, 宗廟饗之, 子孫保之)’는 17·18장에 동일하게 들어가 있는 구절로서 기술의 형식에서 후렴과 같은 겁니다.
18장 9.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武王末受命, 周公成文ㆍ武之德, 追王大王ㆍ王季, 上祀先公以天子之禮. 斯禮也, 達乎諸候ㆍ大夫, 及士ㆍ庶人. 父爲大夫, 子爲士, 葬以大夫, 祭以士. 父爲士, 子爲大夫, 葬以士, 祭以大夫. 期之喪, 達乎大夫. 三年之喪, 達乎天子. 父母之喪, 無貴賤一也.” 무왕(武王)은 말년에 명(命)을 받았고 주공은 무왕(武王)의 덕을 완성하였다. 저 멀리 윗 대(代)에 있는 선조분들에게 천자(天子)의 예(禮)로써 제사를 드렸으니 이러한 예(禮)는 제후(諸侯)와 대부(大夫)와 사(士), 서인(庶人)에까지 미친다. 아버지가 대부(大夫)이고 아들이 사(士)일 경우, 장(葬)은 대부(大夫)의 예(禮)로 하고, 제(祭)는 살아 있는 아들이 하니까 사(士)의 예(禮)로 한다.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대부(大夫)일 경우는 장(葬)은 사(士)의 예(禮)로 하고, 제(祭)는 대부(大夫)의 예(禮)로써 한다. 1년상은 대부(大夫) 작위까지 적용되고, 3년상은 천자(天子)에게 적용되는데, 부모상의 경우는 작위가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동일하다. 此言周公之事. 末, 猶老也. 追王, 蓋推文ㆍ武之意, 以及乎王迹之所起也. 여기서는 주공의 일을 말했다. 말(末)은 늙어서란 말이다. 추왕(追王)은 대개 문무의 뜻을 미루어 왕의 자취가 일어난 것까지 이르는 것이다. 先公, 組紺以上至后稷也. 上祀先公以天子之禮, 又推大王ㆍ王季之意, 以及於無窮也. 선공(先公)은 고공단보의 아버지인 조감으로부터 윗대인 후직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상사선공이천자지례(上祀先公以天子之禮)’라는 것은 태왕과 왕계의 뜻을 확충하여 무궁한 조상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制爲禮法, 以及天下, 使葬用死者之爵, 祭用生者之祿. 조공이 예법을 제정하여 천하에 미치게 하여 장례엔 죽은 이의 벼슬을 이용하고 제례엔 살아있는 자식의 벼슬을 이용한다. 喪服自期以下, 諸侯絶, 大夫降; 而父母之喪, 上下同之, 推己以及人也. 右第十八章. 상복은 1년상 이하부터 제후는 입지 않고 대부는 기간을 축소하며, 부모의 상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같으니,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다. |
‘무왕말수명 주공성문무지덕(武王末受命 周公成文武之德)’
무왕(武王)은 86세가 돼가지고 쿠데타에 성공하고 명(命)을 받았습니다. 늙은이가 다 되어가지고 혁명에 성공한 것이죠. 그런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덕(德)을 종합한 사람입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꿈에서 항상 周公을 보는데 요즘은 周公이 나타나지 않는다[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했지요. 여러분도 어떤 학문분야에서 이왕 전공을 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나는 왕부지(王夫之)를 한때 전공했는데, 역시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합니다.
왕부지(王夫之)는 40년 동안 혼자 돌산에서 살면서 그 위대한 저술을 했거든요.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든지 간에, 역시 그런 사람의 삶, 경건함, 위대함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개 숙여지는 바가 있거든요. 인생의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왕부지(王夫之) 생각나서, 이 이상 더 행복할 게 있냐고 나를 추스리고는 진리탐구에 몸을 바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그러한 삶의 파라곤(Paragon)을 제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김영삼이나 김종필 같은 사람들을 파라곤(Paragon)으로 삼는 그런 수준에서 우리나라의 정치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큰 겁니다. 패라곤, 즉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본(本) 받고 싶은 인간’이 너무 없다는 반증일 거예요. 그러나 공자(孔子)에게는 주공(周公)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문명의 운영에 대한 향심(向心)이 있었지요.
최근, 나한테는 다시 교수로 복귀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 많아요. 내가 교수로 못갈 건 없습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어디든 교수로 갈 수는 있는데, 여러 가지 진로를 생각하게 되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다가 보니, 스피노자(Spinoza)가 암스테르담의 다락방에 앉아가지고 안경의 렌즈를 갈면서 『에티카(Ethica)』를 쓰고 있는데,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와달라고 초빙을 했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스피노자는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절했어요. 화란에서 파문당하고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의 스피노자, 렌즈 쪼가리나 갈고 있는 이런 사람을 교수로 모셔가려고 하는 자세는 유럽지성계의 훌륭한 점이지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거절합니다. 그런 내용을 담은 편지가 남아 있어요.
이런 일화를 떠올리면서, ‘과연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가만히 생각을 해본 거예요. 내가 세칭 일류대학 교수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될 수도 있어요. 배제는 안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본질적인 삶의 가능성,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가를 깊게 깊게 고민할 수밖에. 이것이 성인(聖人)의 길이고, 문화창조의 하나의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정하기를, “나는 당분간 그저 도올서원이나 하자! 그리고 유유작작 유유자적하게 뒷산을 산보나 하고 살자!” 이게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성급하게 빨리 움직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가능성을 너무 좁히지 말자! 이거예요. 김용옥이 한 번 사서(四書)를 번역했다고 하면 기똥차지 않겠어요? 여태까지 한민족이 맛볼 수 없었던 고전의 맛 하나만 남겨놔도 보람이 있는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프라이드(Pride)가 있어야 사는 거예요. 그런 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요새 아주 마음이 편하고 여유가 있어요. 어디 소속되어 있는 놈들은 개혁바람에 자리가 날라갈까 전전긍긍하질 않나, 정년퇴임 후에는 어떡하나 이러고 저러고. 걱정꺼리가 늘 뒤따라 다닙니다. 나는 정년퇴임을 30대에 해 버렸으니까, 무엇에 연연할 게 없어요.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난 부교수도 아니고 고려대학 정교수까지 다 해 본 놈인데, 내가 지금 와서 또 어딜 간다고? 어디 총장으로 오라고 해도 나는 갈 수 없다!
나는 하루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기쁘고 뿌듯합니다. ‘컬츄럴 히어로(Cultural Hero)’ 성인(聖人)들이 한 것과 같은,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전에 말했듯이,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돈도 벌고 하면 도올서원을 멋들어지게 같이 짓자고! 거기서 소림사(少林寺)에서처럼 쿵후를 하자 이거야. 그게 제일 진실한 삶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추왕태왕왕계(追王大王王季)’
주공(周公)은 무엇을 했느냐? 태왕(大王), 왕계(王季)를 추왕(追王)했지요. 왕(王)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드린 것입니다. 저번에 귀신이 생김으로써 역사의 지속(continuity)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듯이, 주공(周公)은 이런 식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해 나가는 거예요. 그전에는 그런 관념들이 없으니까.
‘상사선공 이천자지례(上祀先公 以天子之禮)’
이것은 주자 주를 보면, ‘선공 조감이상지후직야(先公 組紺以上至后稷也)’라고 했는데, 후직(后稷)이라는 것은 농사짓는 신(神)이든가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선공(先公). 즉 조감(組紺)·후직(后稷)이라는 것은 아주 새까맣게 올라가는 선조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천자(天子)의 예(禮)로써 제사를 지냈지요.
‘사례야 달호제후대부급사서인(斯禮也 達乎諸侯大夫及士庶人)’
여기서 예(禮)라는 것은 지금 주공(周公)이 최초로 중국문명의 기초를 만들어간 그 예(禮)를 말하는 겁니다. 이 문장에서, 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이라는 것으로 중용(中庸)이 성립한 시대의 정확한 신분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은 중앙(中央)의 위계질서를 제외한 지방의 제후국(諸侯國) 내에서의 위계질서입니다. 중앙에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작(男爵)의 작위(爵位)가 있고, 제후국(諸侯國)의 경우에는 노(魯)나라면 노나라의 제후(諸侯)가 있고, 제후(諸侯) 밑에 대부(大夫)들이 있고, 대부(大夫) 밑에 사(士)가 있고, 사(士) 밑에 서인(庶人)이 있지요.
여기서 사(士)라는 것은 ‘선비[士]’라고 번역하면 안 됩니다. 이 ‘사(士)’는 당시의 특수한 신분을 일컫는 호칭이거든요. ‘선비 士’는 ‘조선시대의 사(士)의 용법’에 따라 규정된 의미일 뿐입니다.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훈(訓)이라는 것은 조선조의 용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예요. 이것을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士’로 읽습니다. 전혀 달라요. 여기서 사(士)는 선비가 아니라 서인(庶人) 위에 있는 어떠한 위계를 말합니다. 사(士)를 백 명 내지 천 명 거느리는 사람을 대부(大夫)라고 한다고 했어요. 따라서 사(士)는 굉장히 낮은 신분임을 짐작할 수가 있죠. 우리가 사졸(士卒)·병사(兵士)라고 할 때의 용법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요즘 군대에서의 하사(下士) 정도가 되는 거지요. 서인(庶人)은 일등병 정도고. 조선조에서 말하는 선비는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위계로 본다면, 최소한 대부(大夫) 정도가 될 겁니다.
‘달호(達乎)’라는 것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universally applied to these people)’는 이야기입니다(父爲大夫 子爲士 葬以大夫 祭以士 父爲士 子爲大夫 葬以士 祭以大夫 期之喪 達乎大夫 三年之喪 達乎天子 父母之喪 無貴賤一也).
이미 얘기했지만, 고례(古禮)에는 사람의 죽음을 하늘[魂]과 땅[魄]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인식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자마자 지붕으로 흰옷을 던지는 풍습은, 말하자면 하늘로 가는 길에 하얀 카펫트를 깔아주면서 편안히 올라가라는 의미였던 거죠. 더 오래된 풍습은 시체를 그 자리에, 즉 땅바닥이나 방구들 밑에 직접 파고 묻는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전라도나 황해도 해변가의 마을에는 ‘초분’이란 게 있었는데, 죽은 사람을 마당에 뉘고 가랑잎을 덮어서 썩혔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란 반드시 ‘집‘이라는 일정한 공간의 조건을 가진다고 생각했어요【현대인의 삶은 이런 문명의 기본정서를 상실해 버렸다. 요즈음의 신도시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면, 그게 완전히 ‘베드 타운(bed town)’, 즉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지 도저히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도록 조건화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단박에 받을 수밖에 없도록 꾸며져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정신력 하나만 가지고 버틴 신기한 삶을 산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상식적인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자연과 문명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도록 애썼으며, 또한 문명 속에서 살면서 후손들이 그 문명의 조건에 알맞도록 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터전을 성실하게 일구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집의 구조와 질서, 공간의 처리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는 ‘배움’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물리적 조건을 기본적으로 닦아 놓고 살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그 사람이 평소에 살던 그 땅에 묻어서 죽은 사람의 신기백(神氣魄)가 구들 밑이나 마당의 흙으로 환원되었다가, 다시 아이가 태어날 때 계속 이어지게 했던 겁니다. 이처럼 백(魄)을 그 집안에서 순환시킨다는 생각이 이 같은 풍습으로 정착된 겁니다. 옛 사람들한테는 ‘이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아파트’같이 공중에 붕 떠있는 ‘하늘의 집’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반드시 땅의 조건 위에서, 집안 대대로 백(魄)을 순환시켰습니다. ‘삼일장(三日葬)’은 3일 동안 시체를 집안에 놔뒀다가 장지(葬地)로 가는 걸 말하고, ‘9일장’은 9일 동안 그렇게 한다는 건데, 이처럼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간단한 거예요. 서민들이야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금방 장사를 끝낼 수 있지만, 천자(天子)가 죽었는데 저 멀리 광동지방의 제후가 찾아오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이므로 높은 사람일수록 상(喪)의 기간이 길어질 것 아닙니까?
사람이 바로 죽고 난 다음 지내는 예식(禮式)을 상례(喪禮)라고 하고, 상(喪) 기간이 지나고 정해진 ‘묘지’에 묻는 것을 상례(葬禮)라고 하고, 그 뒤에 집에서 신주(神主)만 놓고 지내는 예식(禮式)을 제례(祭禮)라고 합니다. 이렇듯, 상(喪)ㆍ장(葬)ㆍ제례(祭禮)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바로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사(死)했다고 하고, 장례를 치른 뒤라면 망(亡)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망(死亡)’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의미가 다른 두 글자의 조합이지요.
다시 원문의 풀이로 돌아가서, 장례까지는 죽은 사람의 작위에 걸맞게 하고, 제례는 백(魄)이 없어진 상태에서 신주(神主)만 놓고 산 사람이 지내는 것이므로 산 사람의 작위에 맞게 례(禮)를 차리라는 것입니다. “1년 상(喪)은 대부(大夫)에까지 미치고, 즉 서인(庶人)ㆍ사(士)ㆍ대부(大夫)에까지 미치고, 3년 상(喪)은 천자(天子)에게 적용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부모의 상’은 귀천 없이 한결같은 것[無貴賤一也]이라 했는데, 이것은 주공(周公)이 자신의 개인적 아픔의 경험을 전 인민에게 보편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자 주에, “부모의 상(喪)은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똑같은데,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친다는 말이다[父母之喪 上下同之 推己以及人也].”라고 했거든요. 이처럼 유교는 천자니 대부니 그런 작위(爵位)에 중요성을 두는 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1대 사이를 굉장히 중시(重視)하고 있어요. 부(父)와 자(子)를 중심개념(center concept)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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