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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애노희락의 심리학,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 10. 성정(性情)에 관한 보충설명 본문

책/철학(哲學)

애노희락의 심리학, 제1부 사상인의 기본 성정, 제3장 애노희락과 사상인의 성정 - 10. 성정(性情)에 관한 보충설명

건방진방랑자 2021. 12. 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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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정(性情)에 관한 보충설명

 

 

앞에서는 체질별로 개별적인 성정(性情)의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성()과 정()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이 좀 있다. ()은 천기(天機)를 느끼면서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고 정()은 사람이 애써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은 세상 사람들의 일에서 느끼는 것이고 정()은 내가 관련된 일에서 느끼는 점에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성()보다는 정()이 수준이 낮은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로 정()이 성()보다 수준이 낮은 것이거나 천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
자연스레 나오는 것 사람이 애써서 하는 것
세상 사람들의 일에서 느끼는 것 내가 관련된 일에서 느끼는 것

 

 

필자의 세대가 죄수같이 머리 깎고, 군복 같은 교복 입고, 교련 훈련하며 자란 세대라서 필자 역시 전체주의적 사고에 많이 절어 있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성()이 정()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같은 천기(天機)나 인사(人事) 중에도 천시(天時)사무(事務) 같은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지방(地方)이나 거처(居處)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무(東武)는 아니라고 말한다. ()과 정()은 둘 다 지극히 옳아서 성정(性情)에 있어서는 중인(衆人)이 요순(堯舜)과 비교해서 터럭 한 올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堯舜與人同耳].

 

그럼 중인과 요순의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가? 자신이 약한 영역을 할 때 비로소 생긴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중에 해야 할 이야기니까, 그 부분을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자. 양인(陽人)은 음적인 영역에서, 음인(陰人)은 양적인 영역에서 약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사상의 기운을 고르게 가지려 노력하니까, 그 부분에도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그 노력이 둘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장점을 계속 연마해서 이를 통해 자신이 약한 영역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박통(博通: 널리 통함), 독행(獨行: 홀로 행함) 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원래 그 부분에 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못 느끼는 다른 기운을 자기 식으로 넘겨짚고, 어설프게 흉내 내는 방식이다. 그러면 사심(邪心: 편벽된 마음), 태행(怠行: 게으른 행동)에 빠져서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심(邪心), 태행(怠行)이란 놈이 워낙 막강해서 중인이 요순과 같은 경지에 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나올 이야기니까, 일단은 정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글에서 읽었던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럽에 사는 어느 베두인(Bedouin)의 후손이 밤에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깬다. 물론 물을 아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물 한두 방울이 샌다고 깜짝 놀랄 일이거나, 그것이 꼭 잠가지지 않는다고 밤을 꼬박 새울 일은 아니다. 주인공은 왜 그 정도 상황에 그렇게 민감한지를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베두인의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은 유럽에서 태어나 유럽에서만 살았지만, 자신의 핏속 어딘가에 물 한 방울이 생명처럼 소중했던 사막 베두인족의 감각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물 한 방울에 대한 집착을 주변의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공연히 유난 떤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각, 개인적인 본능이란 그런 것이다. 이해 못하는 타인이 보기에는 어긋난 것이거나 공연한 것이기 쉽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은 사막에서의 물 한 방울과 이어진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물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속에 자연에 대한 공경이 있다. 지극히 옳은 감각인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개인적인 것이라도 그 뿌리 자체는 지극히 옳은 것에 이어져 있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다만 그 드러남이 과도하거나, 드러나지 말아야 할 때 드러나기에 문제가 될 뿐이다.

 

사무(事務)락정(樂情)으로 하면 이는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거처(居處)에 있어 락정(樂情)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당여(黨與)노정(怒情)으로 하려 하면 나와 남을 다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교우(交遇)에 있어 노정(怒情)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 사용할 때이다. () 그 자체는 성()만큼이나 지극히 옳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과 정()은 둘 다 모두 적용해야 할 영역이 어긋나지 않는 한 옳게 적용되는 능력이다. ()은 노력에 의해 발동된다고 하지만, ()을 발동시킬 것인가 아닌가에서 의지가 개입되고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 방향 자체는 자연스레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2부에서 설명할 박통(博通)이나 독행(獨行)은 꾸준한 노력과 자신이 약한 영역에 도달하려는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방향이 옳은가에 대해 꾸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이 발동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성()과 정()은 모두 본능적인 능력이며 옳은 방향을 지향한다. ()과 정() 사이의 차이는, ()은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 주로 작용하고, ()은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으로 주로 작용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성과 정 사이의 문제를 이야기했으니 같은 정끼리의 문제도 이야기해보자. 어느 소음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아이만 바르게 키우면 세상은 훨씬 살 만해질 것이다.” 참으로 맞는 이야기이다. 내가 비록 부족한 것이 있어 완벽하게 키울 수는 없어도, 아이를 바로 키우고자 지성으로 노력하면 아이는 나보다는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또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세상은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사무(事務)가 아니라 거처(居處)가 세상을 바로 잡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른 이야기이기도 한다. 각자 그렇게 바르게 키운 아이들끼리 서로 부딪혀 싸우고 죽인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다. 집단 간에 서로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때, 한쪽 집단에서 바르게 키우려는 노력은 다른 쪽에서 보면 아이를 타락시키는 일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노력이, 가족 관계에서 동지 관계로, 또 더 큰 모듬살이의 관계로,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더 큰 질서로 이어져 나간다. 여기에서 당여(黨與), 교우(交遇), 사무(事務)의 원리들이 나오는 것이다.

 

, 이제는 반대로 사무(事務) 쪽에서 시작해보자. 옳은 원칙이나, 갈등 집단 사이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바로 세계가 좋아질까? 이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키고, 머리로만 느끼는 수준을 넘어 가슴속까지 정서화하고, 그 뜻을 기준으로 뭉치게 하느냐 하는 과정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넘어서면 어떻게 하면 자라는 아이들이 이 바른 원칙에 젖어 살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나타난다. 거기까지 되었을 때 이를 비로소 문화라 부를 수 있다. 사무(事務)라는 측면에서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할 만한 수없이 많은 종교와 문명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도 야만적인 전쟁,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원리로 두루 꿰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에 맞는 다양한 원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뤄서 이뤄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맞게 돌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세상이다.

 

 

 

 

인용

목차

사상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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