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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104장 -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금식하고 기도하라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04장 -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금식하고 기도하라

건방진방랑자 2023. 3. 26.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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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금식하고 기도하라

 

 

104

1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오소서! 오늘 같이 기도합시다. 그리고 같이 금식합시다.” 2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또한 내가 어떻게 파멸되었단 말인가? 3차라리,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사람들로 하여금 금식하고 기도케하라.”

1They said to Jesus, “Come, let us pray today and let us fast.” 2Jesus said, “What sin have I committed, or how have I been undone? 3Rather, when the bridegroom leaves the wedding chamer, then let people fast and pray.”

 

 

이 로기온 역시 예수의 오리지날한 내면적 담론이 어떻게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종말론화되고 또 종말론적 알레고리 해석으로 둔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병행한다.

 

 

(2:18~20)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니라.”

 

(9:14~15)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니라.”

 

(5:33~35)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만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하여금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게 되는 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그들도 금식할 것이니라.”

 

 

이 세 자료를 비교해보면 마가자료가 원형이고, 이 마가자료를 마태와 누가가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후반부의 예수의 말은 이미 마가가 도마자료를 래디칼하게 변형시킨 것인데, 마가의 형태를 마태와 누가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마가는 질문자들을 사람들이라고 하여, 불특정인들로 나타내었다(impersonal plural construction), 그러나 마태는 그들을 요한의 제자들로 한정시켰다. 마태는 요한이 감옥에 갇혀있는 역사적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마태는 역사적인 리얼한 정황에 대한 관심이 많다. 누가도 질문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맥락으로 볼 때 바리새인들과 저희 서기관들’(5:30)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질문 속에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므로 질문자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가와 마태는 금식만을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는 금식기도를 같이 말하고 있어 도마자료에 근접하고 있으나, 이 사실만으로 양 자료의 친화성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을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발성을 강화시키는 드라마적 변용이다.

 

원래 금식이란 유대인들에게 있는 풍속이었지만 강제적이거나 제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개별적 선택에 의한 자발적 행위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시대에 이것을 제도화시키고 의무화시켰다. 매 월요일과 목요일, 그러니까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적 열정의 표시로 생각했다(18:12).

 

세례요한은 본시 매우 금욕적인 사나이였다. 광야에서 항상 금식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였던 것이다5:33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 시대에 금식하면 가장 두드러지는 두 그룹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마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논쟁대화(아포프테그마의 한 양식)를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도마에는 이러한 배경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대화가 마가에는 예수 제자들의 행동양식에 대한 예수의 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도마에선 대화의 내용이 예수 자신의 행동에 관한 것이다.

 

혼인은 잔치이며 즐거운 자리이며 축복의 자리이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자리이지 금식해야 할 자리가 아니다. 금식은 슬픔의 표현이다. 따라서 혼인잔치집에서 신랑의 친구들이(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같이 있는 동안에 금식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여기서 혼인잔치는 메시아의 시대라는 것을 알레고리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랑은 예수이고 혼인집 손님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메시아의 잔치(the messianic banquet)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신랑을 빼앗길 그 날이 오리라(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는 표현은 신랑이 강압적으로 혼인잔치 손님들로부터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인 잔치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폭력에 의한 격렬한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명료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절 이후의 초대교회의 금식의 습관을 정당화하기 위한 아포프테그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금식을 정례화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공동식사의 즐거운 잔치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 아포프테그마가 초대교회에서 세례요한파들의 막강한 잔존세력들과 기독교도들과의 관계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었을 때에 날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불트만의 논의는 도마자료와 비교해보면 전혀 근거없는 추론에 불과하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야훼를 신랑에 비유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호세아 2:18, 이사야 54:5~8, 62:5 등을 보라). 그러나 메시아를 낭군이나 신랑으로 표현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생명력(the life-giving power of God)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에게 적용된 표현이지만 예수에게로 무리없이 옮겨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에서는 그러한 은유나 비유는 전혀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의 도반들이다. 그들이 예수에게 같이 기도하고 같이 금식하자고 졸라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근원적으로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의 원죄(Original Sin) 의식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예수는 인성(human nature)에 대한 윤리적 규정을 거부한 사람이었다. 근원적으로 성선·성악적 논의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6, 14, 그리고 53(할례에 관계됨)에서 보았듯이 근원적으로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와 같은 외면적·제식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의식만을 조장할 뿐이며, 인간의 구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예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금지시켰다: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Th.14).

 

따라서 예수는 같이 기도하고 금식하자고 졸라대는 도반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파멸에 이르렀단 말인가?”

 

나사렛사람들복음서(Gospel of Nazoreans)(2)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보라! 주님의 엄마와 그의 형제들이 예수에게 권유하여 말하였다: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죄사함을 위하여 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단다. 예수야! 같이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자꾸나.”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대체 내가 뭔 죄를 저질렀길래, 그에게 빨리 달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단 말이요? 글쎄, 내가 지금 말한 이것이 순전히 내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모를까.”

 

 

하여튼 예수는 그러한 제식적 행위로 인하여 인간이 구원된다는 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걸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차라리,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면, 그제서야 사람들로 하여금 금식하고 기도케하라.”

 

여기 신랑이 혼방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이미 75에서 충분히 토론되었다. 그것은 반야와 방편이 하나가 된 합체불(合體佛)의 경지이며, 남자와 여자가 분화되기도 전의 혼융된 존재이며, 유와 무가 분별되기도 전의 ()의 상태이다. 그것은 단독자이며 방랑자이며 고독자이며, 하나된 자이다. 여기 신랑이 혼방을 떠난다는 표현은 새로 맞이한 아내를 버리고 떠난다는 뜻이 전혀 아니라, ‘단독자됨을 포기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한 사람의 상황에만 적용되는 사태가 아니라, 예수의 도반이면 누구든지 다 단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단독자됨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무분별의 카오스에서 분별의 세상으로 나온다면 물론 너희는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 단독자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금식하고 기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혼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의 도반들은 금식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있는 예수와 함께 혼방에 들어가야 한다. 살아있는 예수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융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메시지를 메시아의 잔치로 변모시킨 마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왕국 에데사(Edessa)의 수도 산리 우르파(Şanliurfa), 이미 지금으로부터 대략 3,500년 전에 거대한 성이 지어졌다. 박물관 도시라 불리울 정도로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다. 2·3세기에는 교회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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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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