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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자로 제십삼 - 21. 광자(狂者)와 견자(狷者)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자로 제십삼 - 21. 광자(狂者)와 견자(狷者)

건방진방랑자 2022. 12.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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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광자(狂者)와 견자(狷者)

 

 

13-2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중도(中道)를 행()하는 선비와 더불어 같이 걸어갈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더불어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행하지 아니 하는 바가 있는 확실한 사람들이다.”
13-21.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논어가 내 인생에 의미를 주었다면, 그 확실한 지침을 제시해준 하나의 말씀으로서 나는 이 장을 꼽을 수 있다. 인간을 대하는 데 나는 항상 이 장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었다. 여기 중행(中行)’이라는 말은 이미 중용(中庸)’의 개념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자로편과 중용(中庸)편이 동시대에 성립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용의 인간은 현실적으로 만나기가 어렵다. 현실적인 인간은 항상 과ㆍ불급이 있다. 그러나 여기 공자의 메시지의 위대함은 과불급이라는 따분한 언어를 사용치 아니 하고 광()과 견()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그 강렬한 의미가 우리 심장을 파고드는 것이다. 여기 을 과불급으로 말한다면 광이 과쪽이고 견이 불급쪽이 되겠지만 그러한 부정적 맥락이 아니라, 광ㆍ견은 매우 적극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과ㆍ불급인 것이다.

 

()’은 쉽게 말해서 미친놈이다.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 1926~1984)가 고발하고 있듯이 현대사회는 미친놈감금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감금이란 기본적으로 17세기 유럽에 고유한 제도적 창안이었다. 푸코의 다음과 같은 멋있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여기서 이성은, 광포한 비이성에 대하여 우위를 접하게 되는 승리의 개가를 노래하면서, 드디어 순결한 국가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자 광기는 르네상스의 지평 위에서까지 만개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던 상상력에 넘치는 자유를 상실하고 갈갈이 찢겨져 버리고 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광기는 리어왕이나 돈키호테에서 볼 수 있듯이 찬란한 대낮 햇빛 아래서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광기는 이성과 굳건히 결합된 감금의 요새로, 도덕성의 규칙에로, 그들에게 마련된 단조로운 밤에로 퇴각해갔다.

Here reason reigned in the pure state, in a triumph arranged for it in advance over a frenzied unreason. Madness was thus torn from that imaginary freedom which still allowed it to flourish on the Renaissance horizon. Not so long ago, it had floundered about in broad daylight: in King Lear, in Don Quixote. But in less than a half-century, it had been sequestered and, in the fortress confinement, bound to Reason, to the rules of morality and to their monotonous nights.

 

 

인간이 광기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그 인간의 정상적 심리상 태를 가늠할 수 있다. 광기에 대하여 광포하게 반응하는 이성적인간이야말로 오히려 광인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광기라는 것은 정상과 공존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정상(normality)을 풍요롭게 만드는 영감이었다. 소크라테스나 피타고라스나 이런 인물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요즈음 감각으로는 모두 감금의 대상이 되어야 할 광인들이었다.

 

왜 이들이 감금(the Great Confinement: 푸코 용어) 되어야만 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이성주의가 승리를 구가하고 수량적 과학의 진보에 의하여 기술이 폭 발적으로 발전하고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더 이상 획일주의적 가치관을 넘어서는 다양성을 용인할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양성의용인을 효율성의 저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세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이성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성이외의 모든 비이성을 감금시켜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이성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폭력성과 배타성이 강렬한 성향으로 나타난다.

 

여기 공자가 말하는 ()’은 분명 미친놈이다. 그러나 중행(中行)’을 실천할 수 있는 이상적 인물을 어차피 만나기 힘들다고 한다면 나는 광인들과 더불어 하겠다! 얼마나 개방적이고, 얼마나 비독단적이고, 얼마나 모험정신에 풍부한 성자의 모습인가? ? 최소한 그들은 범용한 인간들보다는 진취적이기 때문에! 여기 공자가 쓴 진취(進取)’라는 말을 직역하면 나아가 취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인생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미친 사람의 성향이 있다. 그러나 문명의 진보는 다 이러한 광인들이 이룩하는 것이다. 공자는 이 광인들과 더불어 살 줄 알았던 성인이었다.

 

다음에 ()’이란 무엇인가? ‘유소불위(有所不爲)’이다! 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범용한 인간이라면 생각 없이 하고 볼 일도 이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들이다. 쩨쩨하고 소극적이지만 확실하다. 역시 이런 유형의 인간에게도 광인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소극적으로 미친 사람들이다. 절대 넘어가는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은 거짓이 없고 하라는 것은 정확하게 해낸다. ‘나는 차라리 광견과 더불어 하리라!’ 그 얼마나 강렬한 메시지인가! 나는 한평생 공자의 이 말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광견(狂狷)’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안목 속에 광견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텍스트의 문제로서, 이 장의 내용이 맹자』 「진심(盡心)37에 자세히 부연설명하는 형태로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맹자』 「진심이 편집될 당시에 분명 자로편이나 그 유사한 자료가 하나의 텍스트로서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세히 해설할 계제는 아니나, 앞으로 문헌비평의 주요자료들이라는 것만 시사해 놓는다.

 

 

 

 

인용

목차

전문 / 본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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