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근본적 해결책을 찾아라
4b-2. 춘추시대 정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자산(子産)【정(鄭) 나라의 공족(公族)의 중심적 인물로서 개혁정치를 감행한 탁월한 집정(執政). 그가 죽었을 때가 공자의 나이 30세였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옛부터 내려오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자산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극히 높은데, 맹자의 평가는 낮다. 보통 ‘정자산(鄭子産)’이라고 부르지만 그의 이름은 공손교(公孫僑)이다. 공손이 그의 성이다. 명이 교(僑), 자(字)가 자산이다】이 정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는데, 진수(溱水)【하남성 밀현(密縣) 동북의 성수욕(聖水峪)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흘러 유수와 만나 쌍기하(雙洎河)가 된다. 결국 동류하여 가로하(賈魯河) 들어간다】와 유수(洧水)【하남 등봉현(登封縣) 동양성산(東陽城山)에서 발원하여 동류하여 밀현(密縣) 진수(溱水)와 합해진다】 지역의 사람들이 발목을 걷어부치고 어렵게 강물을 건너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수레, ‘여(輿)’는 본시 바퀴를 뺀 차체만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수레 전체를 가리킨다】를 활용하여 진수와 유수를 건너도록 해주었다. 4b-2. 子産聽鄭國之政, 以其乘輿濟人於溱ㆍ洧. 맹자께서 이에 관해 평론하시었다. “정자산은 백성들에게 작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백성들이 내를 건너는 데 불편이 있다고 한다면 농한기에 들어서는 11월【맹자가 주력(周曆)으로 말한 것인지, 하력(夏曆)으로 말한 것인지에 관해 이설이 있다. 현재 음력 9월】에 우선 외나무다리를 하나 세우고 12월【현재 음력 10월】에 마차들이 통과할 수 있는 여량(輿梁)【재목을 많이 깐 넓은 다리】을 마저 완성한다면 그곳 주민 모두가 강 건너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孟子曰: “惠而不知爲政. 歲十一月徒杠成, 十二月輿梁成, 民未病涉也. 위정자가 훌륭한 정치를 공평주도하게 실천한다고 한다면 행차할 때 나팔을 불고 사람들을 비켜나게 하여 존비의 위엄을 세워도 보기가 나쁘지 않다. 어찌하여 한 사람, 한 사람씩 내를 건너는 일을 도와주고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대국을 조직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정치를 행하는 자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환심을 사는 그런 짓을 한다면 매일매일 시간이 너무도 부족할 뿐일 것이다.” 君子平其政, 行辟人可也. 焉得人人而濟之? 故爲政者, 每人而悅之, 日亦不足矣.” |
맹자의 논의는 너무도 정당하다. 미국과의 FTA를 본질적으로 잘못 설정해놓고, 즉 그 법률적 근거의 대국을 자국에 불리하도록 설정해놓은 마당에, 농민들의 환심을 사는 작은 조치들을 아무리 해본들 농촌은 피폐해져만 가는 것이다. 제도보다는 ‘성선(性善)’의 내면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맹자에게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일 수도 있으나, 정치의 본질이 작은 인간적 혜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모두에게 실리를 줄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제도의 정당성에 있다는 맹자의 주장은 그의 왕도론의 리얼한 측면을 보완하는 소중한 언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비판한 정자산(鄭子産)은 실제로 위대한 재상이었다. 공자 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청년 공자의 마음에 흠모의 정을 담뿍 안겨준 위대한 정치가였다. 그가 집정이 된 후 불과 1년만에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이 얄궂은 장난을 하지 않게 되었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는 일이 없었고, 미성년자들이 밭을 가는 광경이 사라졌다. 2년만에 시장에선 에누리가 사라졌고 3년만에 밤에도 문을 걸어잠그는 일이 없으며 길거리에 물건을 떨어뜨려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없어졌다. 정자산의 치세기간에는 강제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법령이 지켜졌다. 정자산은 법가의 원조로도 알려지는 사람이지만, 그는 법과 도덕을 융합시키는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철저한 합리주의자로서 모든 종교적 허구를 배격하고, 실제로 공자의 인본사상의 원형을 실천적으로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맹자가 자산을 씹어대는가? 혹자는 맹자가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논어(論語)』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의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공자는 한 번도 자산을 비판한 적이 없다. 공자도 전대의 인물의 평가에 있어서는 매우 각박한 사람이었지만, 자산에게 대해서만은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논어』5-15, 14-9, 14-10. 『공자가어』 「정론해」에 나오는 자산에 대한 공자의 평어도 참고해 볼 만하다】.
그러나 나는 맹자가 공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 맹자가 자산을 평가하여 ‘혜이부지위정(惠而不知爲政)’이라고 한 것의 ‘혜(惠)’와 공자가 자산을 평가하여 ‘혜인야(惠人也)’(14-10)라고 말한 것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맹자가 아무리 공자를 존경한다 해도 공자에게 감명을 준 인물에 대하여 똑같은 감명을 받는다고 하는 보장은 없다.
정나라는 희(姬)성의 나라이다. 즉 주나라의 왕실이 분화된 나라이다. 서주 말기, 주나라의 선왕(宣王)의 동생인 환공(桓公) 희우(姬友)가 왕기(王畿) 내의 괵(虢)ㆍ회(鄶) 지역의 10개의 읍【지금 하남성 신정현(新鄭縣) 일대】을 분봉받아 세운 나라로서 주실의 위기상황을 같이 극복해가면서 동천(東遷)에 공을 세웠다. 그리고 춘추기에 들어서면서 주(周)의 경사(卿士)로서 주실의 정치를 보좌하고 중원(中原)의 웅국(雄國)이 되었다. 은나라 귀족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송(宋)나라와 인접하면서 중원의 요지를 점하고 있는 정나라는 북으로는 진(晋)나라 남으로는 초(楚)나라, 양대세력의 접점(接點)이 되어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정국은 희성의 제국의 대변자적 입장을 취하면서 국제정세에 대처ㆍ대항하면서 괴로운 줄타기의 여정을 계속해야만 하는 운명을 걸머진 나라였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공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의 복잡한 갈래가 세력을 형성하여 진ㆍ초 사이에서 복잡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정나라 목공(穆公, BC 628-606)의 자손들로서 칠목(七穆)이라 부르는 공족의 세력이 있었는데 자산은 목공의 아들인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이 목공의 아들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세력다툼이 일어나는데, 자산은 뜻있는 공족들과 함께 3차에 걸쳐 일어난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자신은 물러나 간공(簡公)ㆍ헌공(獻公)ㆍ성공(聲公) 4대를 섬기면서 실제로 정나라를 26년간 통치하였다. 그가 죽자 들은 호곡하였고 노인들은 어린애처럼 슬퍼하면서 ‘자산이 우리를 버리고 죽었구나! 백성들은 장차 누구를 따른다는 말인가[子産去我死乎! 民將 安歸]?’라고 탄식하였다. 자산은 진실로 민중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산의 개혁정치는 공족(公族)과 귀족의 강대화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그의 활동범위가 주로 공족 내의 세력균형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정자산은 공족파벌체제(公族派閥體制) 하에서 팽창하는 귀족세력을 억압함으로써 국가권력의 강화를 꾀한, 다시 말해서 전통적 귀족정치를 재편성하는 정책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자 산은 평생 공족 귀족들의 반발에 시달렸다. 그는 씨성(氏姓)중심의 정치를 국가라는 공권력의 강화로써 억제시켰던 것이다. 정자산은 강력한 형법을 제정하여 관철시켰으며 귀족의 반발을 무마하는 데 성공한다.
정자산의 입각처는 어디까지나 귀족 내부였다. 그러나 정자산의 시대의 바톤을 이은 공자의 입각처는 어디까지나 사(士)였으며, 사(士)는 성내(城內) 국인(國人)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입각처는 국인을 초월하는 드넓은 성밖 민중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맹자가 자산을 비판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감각의 차이에 서 비롯하는 것이다. 즉 자산은 민중을 위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민중을 직접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 이념의 틀이 없었다. 따라서 맹자의 자산 비판은 자산의 생각이 못 미치는 어떤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민중에 대한 국소적 혜택의 제스처로서는 이미 전국시대의 문제는 해결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정자산(鄭子産) | 공족ㆍ귀족 정치의 재편성 | 공실(公室) |
공자(孔子) | 사(士)를 대변 | 국인(國人) |
맹자(孟子) | 민중(民衆)을 대변 | 서인(庶人) |
인용
'고전 > 맹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하 - 4. 신하가 나라를 떠날 수 있는 상황 (0) | 2022.12.17 |
---|---|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하 - 3. 임금의 신하 대우법 (0) | 2022.12.17 |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하 - 1. 순임금과 문왕은 부절(符節) 같다 (0) | 2022.12.17 |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상 - 28. 크나큰 효도 (0) | 2022.12.17 |
맹자한글역주, 이루장구 상 - 27.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형을 따르는 것 (0) | 2022.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