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다른 처지 속 같은 취지Ⅱ
4b-31. 공문의 적통을 이은 증자는 노나라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원래 고향인 무성(武城)【산동성 비현(費縣) 서남 90리】에서 국부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월나라의 군대가 침입하여 왔다【『좌전』 애공 27년에 보면 노나라의 애공이 월나라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삼환(三桓)을 제거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의 침공이라는 설도 있다. 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로 월나라의 강역이 넓어져 노나라와 그 경계가 들쑥날쑥 직접 맞물리게 되면서 비현(費縣) 동남 일대의 지역은 월구(越寇)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그 중의 한 사건일 것이다】. 혹자가 권유하여 말하였다: “월나라의 군대가 침입하여 오니, 피난하셔야겠습니다.” 4b-31. 曾子居武城, 有越寇. 或曰: “寇至, 盍去諸?” 그러자 증자는 집을 지키는 사람에게, “내 방에는 사람이 못 들어오게 하고, 정원의 풀과 나무를 훼상하지 못하도록 해라”라고 말하고 난을 피했다. 曰: “無寓人於我室, 毁傷其薪木.” 그리고 월나라의 군대가 물러나자, 곧 증자는 말했다: “우리집 담과 가옥을 수리해놓거라. 내 곧 가겠다.” 寇退, 則曰: “修我牆屋, 我將反.” 그리고 월나라의 군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증자는 돌아왔다. 그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우리 무성 사람들이 증자 선생님을 이토록 충직하고 공경스럽게 모셔왔는데, 월나라의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고 그렇게 제일 먼저 도망가면 백성들도 다 같이 도망가게 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적이 다 물러난 후에나 몸사리다가 안전하게 돌아오니, 그것은 해서는 아니 될 짓같이 느껴진다.” 寇退, 曾子反. 左右曰: “待先生, 如此其忠且敬也. 寇至則先去以爲民望, 寇退則反, 殆於不可.” 이에 증자의 제자인 심유행(沈猶行)【성이 심유(沈猶), 이름이 행(行), 심유라는 성은 노나라의 저명한 가문이다. 그리고 심유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노나라에 많이 살았었다】이 자기 선생님을 옹호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너희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의 일이다. 예전에 우리 심유 성씨 마을에 부추(負芻)【꼴을 등에 짊어지다는 뜻이니 천민 무리일 것이다】라는 자가 난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선생은 70인의 제자를 거느리고 우리 마을에 사셨는데 아무도 그 난에 간여하여 휘말려들지 않았다.” 沈猶行曰: “是非汝所知也. 昔沈猶有負芻之禍, 從先生者七十人, 未有與焉.” 그런데 그의 제자인 자사는 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제나라의 군대가 위나라를 침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혹자가 말했다: “제나라 군대가 침공해오고 있습니다. 선생은 어찌하여 피하지 않으십니까?” 子思居於衛, 有齊寇. 或曰: “寇至, 盍去諸?” 이에 자사는 대답하였다: “만약 내가 도망가 버린다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자사는 남아서 같이 싸웠다. 子思曰: “如伋去, 君誰與守?” 이 두 가지 선현의 사례에 관하여 맹자께서는 평론하시었다: “증자는 사회참여를 회피하였고 자사는 적극적으로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였다. 두 사람의 행동양식이 정반대인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길을 걸은 것이다. 증자는 그 나라의 스승이었고 국부(國父)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자기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자사는 그 나라의 신하였고 미소(微小)한 관직에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행동방식이 달랐다. 그러나 증자와 자사가 입장을 바꾸었다면 서로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孟子曰: “曾子ㆍ子思同道. 曾子, 師也, 父兄也; 子思, 臣也, 微也. 曾子ㆍ子思易地則皆然.” |
어려서부터 『맹자』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장 중의 하나가 본 장이었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말하는 맹자가 어찌하여 그렇게 치사하게 도망가는 증자를 옹호하는가? 난을 피했다는 사실 하나라면 또 모르지만, 자기 방에 사람이 못 들어가게 하라느니, 정원의 나무를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라느니, 도무지 전쟁통에 상식적으로 부탁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집과 담을 다 보수해놓게 한 연후에나 돌아왔다는 것도 도무지 지도적 위치에 있는 한 인간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니다. 증자의 특별하게 까다로운 성격을 나타내는 괴담(怪談)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문헌상으로 궐문이 있을까 의심해보아도 그 동네사람들의 반박도 매우 명료하고 전체구성상 궐문이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 상식으로 이해 안 되는 당대의 특별한 관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석연치 않다.
전체적으로 보면 29장에서 우임금과 후직과 안회의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을 말한 논리 패턴의 연장으로 본 장도 이해될 수밖에 없겠으나 예로 든 사례가 적절치 못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증자의 경우는 객이었고 침공의 상태가 국가의 안위와 관계없는 가벼운 것이었고 자사의 경우는 신하였고 침공의 상태가 국가의 안위에 결정적이었다는 주석이 많지만, 이런 주석도 우리의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다.
여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맹자를 증자와 자사의 직전 계열의 사람으로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후대사람들이 맹자를 사상사적으로 그렇게 규정할 수는 있겠으나 맹자 본인은 증자와 자사에 대하여 각별한 사제지정을 표시하고 있질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노나라 유학시절에 풍문으로 들었던 인물군에 속해있을 뿐이다. 그리고 증자는 매우 이기적인 자기 삶의 관리가 철저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을 때도 자기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고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효를 다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모범으로 보인 인물이었다(『논어(論語)』 8-3).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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