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백리해, 자기를 팔아서 벼슬자리를 구했나?
5a-9.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백리해(百里奚)【백리(百里)가 씨(氏)이고, 해(奚)가 명이다. 우(虞)나라의 현인】가 자신을 양가죽 5장 값에 진 나라에서 희생 가축을 기르고 있는 목장주에게 팔아 그곳에서 소를 기르면서 춘추5패 중의 한 사람인 진목공(秦穆公)에게 접근하는 길을 텄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5a-9. 萬章問曰: “或曰: ‘百里奚自鬻於秦養牲者, 五羊之皮, 食牛, 以要秦穆公.’信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호 사자가 지어낸 말일 뿐이다. 백리해는 원래 우(虞)나라【주(周)나라와 동성(同姓)의 나라였으며 춘추시대에 진(晋)에게 멸망하였다. 『좌전』 희공 5년의 일이다. 우(虞)는 산서성 평륙현(平陸縣) 동북에 있었다】 사람이었다. 진나라 사람이 수극지벽(垂棘之璧)【수극(垂棘)이라는 진(晋)나라 땅에서 산출되는 유명한 미옥(美玉) 제품. 벽(壁)은 둥근 원반형에 가운데 작은 구멍이 있다. 구멍의 사이즈가 전체 직경의 3분의 1을 넘으면 환(環)이라고 한다】과 굴산지승(屈産之乘)【조기는 굴산(屈産)을 지명으로 보고, 주희는 굴(屈)만을 지명으로 본다. 주희를 따르면 굴(屈) 땅에서 생산된 양마(良馬) 네 마리로 만든 수레를 의미한다】을 우(虞)나라에 뇌물로 바쳐 우나라에 길을 양보케 하여 이웃의 괵(虢)나라【곽나라도 주나라와 동성의 나라로서 서괵ㆍ남괵ㆍ동괵ㆍ북괵의 4나라가 있었는데 이것은 북괵이다.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平陸縣)】를 쳤다. 그러나 결국 우나라는 길을 빌려줌으로써 멸망케 된다. 이때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奇)는 나라의 군주에게 길 빌려주는 것을 거절할 것을 강력히 하였지만 백리해(百里奚)는 간(諫)하지 않았다. 孟子曰: “否, 不然. 好事者爲之也. 百里奚, 虞人也. 晉人以垂棘之璧與屈産之乘, 假道於虞以伐虢. 宮之奇諫, 百里奚不諫. 백리해는 이미 우나라의 군주가 간해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우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70이었다. 그런데 70세의 노인이 그렇게 피신 간 상황에서 소치기가 되어 진목공에게 벼슬길을 모색한다는 것이 얼마나 추저분한 일인지를 몰랐다고 한다면 그를 과연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공에게 아무리 간해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간하지 않은 것을 어찌 지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知虞公之不可諫而去之秦, 年已七十矣, 曾不知以食牛干秦穆公之爲汙也, 可謂智乎? 不可諫而不諫, 可謂不智乎? 우공이 이미 망국의 길을 자초한다는 것을 알고 먼저 우나라를 떠나버린 것을 지혜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나라에서 때마침 등용되었을때 진목공이 더불어 큰 사업을 도모할 수 있는 그릇의 군주라는 것을 알고 그를 도와준 것이 어찌 지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진나라에서 재상이 되어 그 군주를 천하에 이름을 현창하는 인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한 것이, 슬기롭지 않다면 과연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을 비굴하게 노예로 팔아서까지 군주의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이야기는 명예욕에 불타있는 촌놈들도 하려고 하는 짓이 아니다. 그래도 역사에 이미 현자로서 이름을 남긴 백리해가 과연 그런 짓을 했겠는가?” 知虞公之將亡而先去之, 不可謂不智也. 時擧於秦, 知穆公之可與有行也而相之, 可謂不智乎? 相秦而顯其君於天下, 可傳於後世, 不賢而能之乎? 自鬻以成其君, 鄕黨自好者不爲, 而謂賢者爲之乎?” |
여기 또 만장은 춘추시대의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국시대에 매우 많이 회자되었던 한 캐릭터, 백리해(百里奚)를 해부함으로써 맹자에게 반론을 제기한다. 제환공(齊桓公)에게 관중이 있었고 진효공에게 상앙(商鞅)이 있었다면, 오패 중의 한 사람인 진목공(秦穆公)에게는 백리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백리해가 진나라를 부강하게, 그리고 질서있게 만든 현인(賢人)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자 피곤해도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더워도 수레덮개를 씌우지 않았다. 국중(國中)에서 행차할 때도 뒤따르는 수레가 없었고, 무기를 지닌 호위병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공로와 명예는 역사의 창고에 숨겨두었고, 덕행만을 후세에 남기었다. 오고대부(五羖大夫) 백리해가 죽자 진나라의 남녀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절구질 할 때도 음탕한 민요인 저가(杵歌)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백리해가 진목공을 만나는 과정에 관한 설화가 전국시대 문헌으로부터 서한 시대의 문헌에 이르기까지 엄청 많이 등장하는데 그 설화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를 들면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 속에서도 백리해설화는 「진본기(秦本紀)」와 「상군열전(商君列傳)」에 두 번 등장하는데 동일인에 의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그 양식이 서로 다르다. 「진본기」에는 목공 5년, 진공이 나라와 나라를 멸망시키고, 우왕과 그의 대부인 백리해를 포로로 잡아왔다. 그런데 이것은 진헌공(晉獻公)이 백옥(白玉)과 양마(良馬)를 우왕에게 뇌물로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진헌공은 백리해를 잡아온 후, 자신의 딸이 진목공에게 시집갈 때에, 그 딸을 시중드는 남자 노복으로서 백리해를 딸려 보냈다. 그런데 백리해는 진나라에서 도망쳐서 완(宛)【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경계】으로 갔으나 초(楚)나라 변경 사람에게 붙잡혔다. 백리해가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진목공은 많은 재물로 그의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려고 했으나, 초나라 사람들이 내주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초나라에 보내어 말하였다: “나의 잉신(媵臣) 백리해(百里奚)가 귀국에 있는데, 검정 숫양의 가죽 다섯 장[五羖羊皮]으로 그의 몸값을 치르고자 한다.” 이에 초인들이 응낙하고 백리해를 놓아주었다. 이때 백리해의 나이는 이미 70세를 넘었다. 목공은 백리해를 석방시켜 그와 함께 국사를 논하였다. 그러자 백리해는 사양하며 “신(臣)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하문(下問)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목공은 “우왕이 그대를 등용치 않아 망한 것이니, 그대의 죄가 아니오”라고 하며, 계속 하문하며 백리해와 삼일간 담론하였다.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국정을 맡기고 그에게 오고대부(五羖大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상이 「진본기」 9의 기술이다.
그런데 「상군열전」 11에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있다. 상군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10년이 되자 상앙(商鞅)을 원망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때 진나라의 현인인 조량(趙良)이 상앙을 만나 옛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대저 오고대부(五羖大夫)는 형(荊) 땅【초(楚)나라의 다른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목공이 현명한 군주라는 소문을 듣고 꼭 한번 만나보기를 자원하였으나, 가려고 해도 여비조차 없는 가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진나라의 나그네에게 팔아, 남루한 갈포를 걸치고 소를 치게 되었습니다. 1년이 지나서야 목공은 이 일을 알게 되어, 백리해를 소치는 자의 신분에서 끌어올려 일약 백관의 최고자리에 오르게 하였지만 진나라에서는 감히 불만을 품은 자가 없었습니다.
夫五羖大夫, 荊之鄙人也. 聞秦繆公之賢而願望見, 行而無資, 自粥於秦客, 被褐食牛. 期年, 繆公知之, 擧之牛口之下, 而加之百姓之上, 秦國莫敢望焉.
이와 같이 『사기(史記)』 내에서도 그에 관한 기술이 다르다. 백리해의 호칭이 오고대부(五羖大夫)였고, 그것은 분명 ‘양가죽 다섯 장[五羊之皮]’과 관련이 있다. 「진본기」는 ‘오고양피(五羖羊皮)’를 속금(贖金)의 맥락에서 말하였고, 『맹자』에서는 ‘오양지피(五羊之皮)’ 백리해가 자신을 팔아넘긴 매가(賣價)로 말하였다. 『전국책(戰國策)』 『한시외전』 『설원(說苑)』은 모두 양가죽 다섯 장을 매가로 규정하고 있어 『맹자』의 기술과 같다.
맹자의 집요한 주제는 자신을 비굴하게 굽혀서 정치의 대사를 도모한다는 것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설화의 재구성 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당당한 대장부 기질에서 볼 때, 모든 현인들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도덕적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세태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성을 촉구하는 양심의 소리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는 해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壬辰)년이다. 본 장에 ‘가도(假道)’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98)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명분이 ‘가도입명(假道入明)’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자문』에도 ‘가도멸괵(假道滅虢)’이라는 성어가 있는데 히데요시는 ‘가도멸명(假道滅明)’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히데요시의 꿈은 명제국을 복속시키는 것이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조선의 길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망상은 실로 황당한 것 같지만, 일본사람들이 그 꿈을 불과 3세기반 이후에 정확히 실천에 옮겼음으로 결코 황당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히데요시는 가도(假道)를 위하여 조선국왕의 래일(來日)을 요구하는 등 도무지 상상을 초월하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국내 센코쿠(戰國) 제다이묘오(諸大名)의 통일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출병의 기획을 구체적으로 진행시켰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그 이튿날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왜군이 남문 밖에 목패를 세웠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걸랑 길을 내놔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다음과 같은 목패를 내걸었다: ‘싸워 죽기는 쉬운 일이나, 길을 내주는 것은 힘든 일이다[戰死易, 假道難].’ 송상현은 처절하게 항전하였다. 그는 조복을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는데 그의 시신에 왜장도 경의를 표하고 장례를 치르었다고 한다.
불과 60갑자 일곱바퀴 전의 일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안일하게 국제정세를 바라보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검정교과서에 명기하는 것을 한국정부가 방조하다시피하고 신자유주의와 뉴라이트를 구가하는 유수대학 교수들이 일본통치가 한국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공로를 세운 정당한 프로세스였다고 부추기고 있다. 과연 이 나라의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그들은 어떤 종족이길래 독도를 다시 내주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다시 받는 것이 이 민족사의 진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분노하라! 이 땅의 지성이여! 임진왜란을 상기하자! 송상현의 항전(抗戰)을 기억하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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