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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하 - 1. 공자, 시중하여 집대성(集大成)하다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하 - 1. 공자, 시중하여 집대성(集大成)하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28.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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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장장구(萬章章句) ()

 

 

1. 공자, 시중하여 집대성(集大成)하다

 

5b-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伯夷)2a-2에 기출, 백이의 행동패턴에 관해서는 2a-9에 비슷한 논조가 이미 기술되어 있다. 백이는 상나라 말기의 고죽국(孤竹國)의 장자(長子)로서 왕위를 사양하고 나라로 갔는데 주무왕(周武王)이 상왕조를 토벌하려고 하자 적극 말리었다. 공자도 그를 고지현인(古之賢人)’(논어(論語)7-14)이라 하였고,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기에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5-22)고 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생각을 비굴하게 낮추지도 않았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도 않았다’(18-8)고 평했다는 눈으로 오색(惡色)나는 이라는 글자를 대체적으로 로 읽는다. 이것은 악한 색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색이다. 조기는 행실은 추악하면서 모양은 아름다운 여자라고 하였는데, 색을 꼭 여자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눈으로는 혐오스러운 꼬라쟁이를 보지 않는다정도의 의미일 것이다을 보지 아니 하고, 귀로 오성(惡聲)조기는 정성(鄭聲)과 같은 음탕한 노래라고 했는데 성을 노래나 음악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모든 혐오스러운 소리를 가리킨다을 듣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엄격하게 청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섬길 만한 그릇이 되는 임금이 아니면 아예 섬기지를 않았고, 자기가 진정으로 다스릴 만한 품성을 갖춘 백성이 아니면 아예 다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질서가 있으면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고, 세상에 질서가 없고 어지러우면 물러나 전야(田野)에 은둔하였다. 횡포한 정치가 판을 치는 조정이나, 횡포한 인민들이 모이는 곳에는 한 순간도 머무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예의를 벗어난 야비한 향촌의 무리들과 더불어 사는 고 통은 조정에 나아갈 때 착용하는 깨끗한 의복이나 관을 정제한 채 진흙이나 석탄의 더러운 구덩이에 앉아있는 듯한 끔찍한 느낌과도 같은 것이었다.
5b-1. 孟子曰: “伯夷, 目不視惡色, 耳不聽惡聲. 非其君不事, 非其民不使. 治則進, 亂則退. 橫政之所出, 橫民之所止, 不忍居也. 思與鄕人處, 如以朝衣朝冠坐於塗炭也.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나라의 마지막 왕. 1b-8에 기출이 폭정을 행하여 세상이 혼란하여졌을 때에도 백이는 북해(北海)1a-7에 기출의 해변가에 살면서백이가 북해의 해변가에 살았다는 이야기는 4a-13, 7a-22에도 나온다. 설화의 기본요소가 공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하가 다시 혼란을 가라앉히고 태평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후세에 백이의 풍도를 듣는 자는 감화를 받아 탐욕스러운 인간은 청렴해지고, 겁약한 자들도 불굴의 의지를 세우게 되었다.
當紂之時, 居北海之濱, 以待天下之淸也. 故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
 
백이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인물로서 우리는 이윤(伊尹)2a-2에 기출. 탕왕을 도와 은나라의 혁명을 이룩한 인물을 들 수 있다. 이윤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어떠한 군주라도 섬기지 못할 수야 있겠는가? 섬기면 내 군주가 되는 것이다. 어떠한 백성이라도 다스리지 못할 수야 있겠는가? 다스리면 내 백성이 되는 것이다같은 논점이 2a-2에 있다.’ 이윤은 치세(治世)라도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고, 난세(亂世)라도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이 백성을 내실 때는 선지(先知)로 하여금 후지(後知)를 깨우치도록 하시었고, 선각(先覺)으로 하여금 후각(後覺)을 깨우치도록 하시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신 인간 중에서 선택받은 선각자이다. 나는 이 도()로써 이 백성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있다.’같은 논점이 5a-7에 있다. 천하의 백성, 이름없는 필부필부라도 요순(堯舜)의 은택(恩澤)을 입지 못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게 되면 이윤은 마치 자기가 그를 밀어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도록 만든 것처럼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천하라고 하는 막중한 책임을 나홀로 걸머진 듯하였다.
伊尹: ‘何事非君? 何使非民?’治亦進, 亂亦進. : ‘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 ,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此道覺此民也.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與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也.
 
이상의 두 사람과 또다른 하나의 인물로서 노나라의 현자 유하혜(柳下惠)를 들 수 있다沃案: 유하혜는 2a-9에 기출하였다. 유하혜는 별명이고 그의 본명은 전금(展禽)이다. 전씨((展氏)이고 자가 금()이다. 노나라의 대부로서 나라를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 26년조에 보면, 제나라 효공이 노나라의 북쪽 변방을 쳤는데, 유하혜가 효공과 만나 담판을 벌인다. 예로부터 제나라와 노나라는 주나라의 적통을 이은 두 나라로서 개국공신인 강태공(姜太公)과 주공이 각각 분봉된 곳인데 성왕은 자자손손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를 도우며 번창하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이렇게 노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설득을 시킨다. 그래서 제효공이 군대를 철수하고 돌아간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서희(徐熙, 942~998)가 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희공 26년이 BC 634년이므로 대략 공자보다 한 130년 정도는 앞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선배인 유하혜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유하혜의 어짊을 알고서도 그를 발탁하여 같이 조정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재상 장문중(臧文仲)을 폄하한다[15-13]. 논어(論語)』 「미자(微子)편에 유하혜에 대한 공자의 평론이 두 번 나오는데[18-2, 18-8], 다 호의적이다. 유하혜는 아무리 오명이 있는 군주라도 부끄럽게 생각치 아니 하고 섬겼으며, 아무리 비천한 관직이라도 비천한 관직이라 생각치 아니 하고 받아들였다. 조정에 나아가면 자기의 재능과 덕성을 숨기지 않고 발휘하였으며, 반드시 사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도를 행하였다. 임금이 자기를 버리면 벼슬 자리를 떠날 뿐 원망하지 않았으며, 곤궁한 생활에 처해도 걱정근심이 없었다. 향촌의 야인들과 더불어 살아도 그들과 즐겁게 지내며, 그 들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였다.
柳下惠, 不羞汙君, 不辭小官. 進不隱賢, 必以其道. 遺佚而不怨, 阨窮而不憫. 與鄕人處, 由由然不忍去也.
 
이러한 기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이렇게 뇌까리곤 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내 곁에서 웃통을 벗거나 전 나체로 개지랄을 한들, 그것은 너의 무례일 뿐, 그것이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으랴!’이상의 논지는 2a-9에도 실려있다. 같은 양식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세에 유하혜의 풍도를 듣고 감화를 받는 자는 비루하고 속좁은 자라도 관대해지고, 경박하고 각박한 자라도 돈독해졌다.
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故聞柳下惠之風者, 鄙夫寬, 薄夫敦.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상의 세 유형의 인물과 대비되는 공자를 이 야기해야 한다. 공자는 제나라를 떠날 때는 밥 짓기 위해 불려놓은 쌀에 불을 지필 틈도 없이 물만 따라 버리고 짐을 꾸려 미련 없이 여로를 재촉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고국 노나라를 떠날 때는, ‘떠나는 발 길이 무거워 잘 떨어지지 않는구나!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길이니 어련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빨리 떠나야 할 때라면 미련 없이 빨리 떠나고, 오래 머물러야 할 때라면 오래 머물고, 물러나 은거해야 할 상황이라면 은거하고, 나아가 벼슬해야 할 상황이라면 벼슬한다. 이렇게 때에 따라 자유자재로운 처신의 실천자가 공자였다.’공자의 처세방식에 관해서는 2a-2에도 언급되어 있다.
孔子之去齊, 接淅而行; 去魯, : ‘遲遲吾行也.’去父母國之道也. 可以速而速, 可以久而久, 可以處而處, 可以仕而仕, 孔子也.”
 
맹자께서 다시 총평하여 말씀하시었다: “네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백이(伯夷)는 성의 순결함을 구현한 자이고, 이윤(伊尹)은 성의 적극적 책임감을 구현한 자이고, 유하혜(柳下惠)는 성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구현한 자이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이 세 사람의 순결함[]과 책임감[]과 조화감[]을 때[]에 맞추어 모두 구현하는 시중(時中)의 성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자를 집()하여 대성(大成)하였다고 일컫는 것이다.
孟子曰: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 孔子之謂集大成.
 
집대성(集大成)이라 하는 것은 마치 아악에 있어서 쇠로 된 편종(編鐘)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옥으로 된 편경(編磬)의 소리가 그 울려 퍼진 소리들을 품안에 다 주워 담는 것과도 같다沃案: 여기 금성이옥진지야(金聲而玉振之也)’ ‘()’은 쇠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기술하였고, ‘()’떨친다는 뜻이 아니라, 중용(中庸)26에서 진하해이불설(振河海而不洩)’이라 할 때와 같이 황하와 황해의 드넓은 물을 품에 안듯이, 울려 퍼진 소리를 수렴한다는 뜻이다. 여기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는 표현은 진실로 조선의 아악의 오묘한 맛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금성(金聲)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하는 조리(條理, 질서감)이고 옥진지(玉振之)라고 하는 것은 그 울려 퍼진 소리를 품에 안는 마무리의 조리(條理)이다. 시작하는 조리는 지혜의 사건이다. 이고, 마무리짓는 조리는 성()의 사건이다.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
 
지혜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교라 말할 수 있고, ()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백보 떨어진 곳에서 활을 쏜다고 해보자! 화살이 과녁이 있는 곳까지 힘차게 도달하는 것은 기력의 덕분이다. 그러나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는 것은 기력의 덕분이 아니라 기교의 덕분이다. 그러니까 활을 쏘는 데는 반드시 기력과 기교가, ()과 지()가 구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는 이 양면을 다 구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집대성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 譬則巧也; , 譬則力也. 由射於百步之外也, 其至, 爾力也; 其中, 非爾力也.”

 

 

이 장의 내용은 여태까지 산만하게 이야기되었던 것을 한 군데 모아 정리한 것으로 고대 인물평으로서는 가장 잘 구비된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인물평의 포커스는 공자예찬에 있다.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세 성인의 이데아 티푸스를 부각시키고 그 일면성을 말한 후에, 그에 대비하여 성지시자(聖之時者)’로서의 공자의 위대함을 말하는 맹자의 레토릭의 수법은 참으로 치열하고 정채(精彩)롭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금성(金聲)=시조리(始條理)=()=()=()’을 한 세트로 보고, ‘옥진(玉振)=종조리(終條理)=()=()=()’를 한 세트로 본 것에 관하여 약간의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공자(孔子)
금성(金聲) 옥진(玉振)
시조리(始條理) 종조리(終條理)
() ()
() ()
() ()
집대성(集大成)

 

()와 성()의 대응으로서 교()와 력()이 바뀌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성스러움(the Holy)’이라는 지고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화살을 과녁까지 이끌고 가는 근원적인 에너지를 총칭하고 있다고 할 때, 단순한 기교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힘으로서의 ()’이라는 개념의 포괄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하여튼 금성과 옥진의 양면이 다 구비되어야만 집대성이 가능케 된다는 이 언급은 아악(雅樂)의 오케스트레이션에 관한 심오한 성찰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기역자 모양의 돌조각에 지나지 않는 편경(編磬)의 소리의 오묘한 기능을 잘 이해하는 자만이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의미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역시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이 한마디에 있다. 그것은 대강의 뜻을 말하자면 긁어모아 크게 이룬다는 뜻이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스스로 자평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7-1)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이 말은 겸사에 지나지 않으며, 공자는 실제로 술을 통하여 작을 성취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나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그의 말대로 존중해주어야 할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자의 자평에 대한 존중이 맹자에게서는 집대성(集大成)’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평소 집대성이라는 말을 오묘하고 야릇한 말로 생각해왔다. 퍼뜩감이 잘 와닿지 않는 말로서 내 머리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연륜이 좀 쌓여 깊게 생각해보니 그것은 동방문명의 원류와 흐름을 총칭하는 위대한 멘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유교는 결코 공자 아니다. 이 말은 유가교의 전승이자 이전에 있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창안일 수가 없다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병폐가 어느 한 사람의 교주의 창안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창안의 주체에 대한 신앙이 교단의 내용을 이룬다고 하는 오만에 있는 것이다. 진실로 한 사람의 개창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는 사기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의 절대적 신비화ㆍ신격화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의 술이부작이라는 이야기는 이러한 창안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문명은 거대한 흐름일 뿐이며 모든 개인은 그 흐름에 참여하여 부분적인 ()’을 감행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는 집()하여 대성(大成)하기는 하였지만 작()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서양철학사가 범하기 쉬운 가장 근원적인 오류를 정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제각기 ()’한다고 자신의 창조성을 뽐내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모두 과도한 에 불과한 것이다. ‘이란 과도한 레토릭의 장난이다. 그들의 창안이라는 것이 진실로 가벼운 일상언어의 한 줄에 지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장치는 철학사에 있지 아니 하고, 과학사에 있다. 철학은 과학을 리드하여 온 것이 아니라, 과학을 뒤쫓아왔을 뿐이다. 철학은 아직도 우주와 인간과 언어에 관하여 신화적 단계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기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대부분이 신화적 유치함에 대한 안티테제이거나 신화 자체로 함몰된 레토릭일 뿐이다.

 

인문문명의 홍류(洪流)를 일찍 확립한 중국문명은 이미 선진시대로부터 술이부작을 넘어서는 작위의 허구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자도 기존하는 인문문명의 정도를 하여 대성하였을 뿐이다. 어설픈 창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집대성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동방 문명이 기발한 창안들의 대결이 부족한 듯이 보이지만, 문명의 깊이는 끊임없이 집하여 대성하는 자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소리 없이 흔들리지 않는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공자사당의 본전에는 항상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곡부의 공묘를 위시하여 우리나라의 성균관, 향교에 다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이라는 이름은 바로 맹자의 집대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송나라의 휘종(徽宗) 때에(숭녕崇寧 3, 1104) 국자감승(國子監丞) 조자역(趙子櫟)의 건의에 의하여 처음으로 대성전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의 모습에 관해서는 6b-6에도 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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