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8. 그가 어울리는 사람을 보라
5a-8.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위(衛)나라에 계실 때는 위나라 군주의 총애를 받던 환관이며 시의(侍醫)였던 옹저(癰疽)【옹저는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옹거(雍渠)’로 되어 있는데 위나라 영공이 데리고 다니는 환관의 이름이다. 조기는 ‘옹저(癰疽)’는 종기를 치료하는 외과의사라고 했다. 그러면 위령공의 시의가 된다. 나는 이 두 설을 종합하였다. 『한비자(韓非子)』 「난사(難四)」에는 ‘옹조(雍鉏)’로 되어있고, 『설원」 「지공(至公)」 8편에는 ‘옹저(雍雎)’로 되어있는데 동일인을 가리킨다고 보 아야 할 것이다. ‘옹저(癰疽)’는 우리가 지금 보통 ‘종기’라고 부르는 것의 총칭인데, 옛날에는 종기 부위에 따라 경락을 따졌다. 이름상으로 볼 때 외과의사였던 것이 분명하다】의 집에 의탁하여 머물렀고【‘主+A’는 ‘A에게 의탁하여 기숙한다. 즉 A를 주인으로 하여 기숙한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외지에 가게 되면 누구 집에 머무느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 집 주인과의 관계에 따라 모든 인적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와 같은 선비가 환관이나 종기의사 집에 머물러 그 커넥션으로 위나라 군주에게 접근하려 했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다. 옛날에는 환관과의 교제는 선비가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겼다】, 제나라에 계실 때는 제나라 군주의 총애를 받았던 시인(侍人)【시인은 ‘시인(寺人)’이라고도 쓴다. ‘엄인(奄人)’, 즉 환관(宦官)이다】인 척환(瘠環)【이름에서부터 풍기는 뉘앙스가 비루하다. 척(瘠)이 성이고, 명이 환(環)이다】의 집에 의탁하여 머물렀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입니까?”【沃案: 기실 공자는 벼슬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닌 사람이고, 공자는 그렇게 인간 관계의 명분을 치열하게 따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가능한 사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루하게 보이는 공자의 모습은 맹자의 삶의 철학과 신념에 극렬하게 위배된다. 맹자의 입지를 매우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장의 질문은 하나하나가 모두 맹자의 신념체계에 반론을 제기하는 역사의 예증을 테마로 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탁월하게 오케스트레이트 된 것이다】. 5a-8. 萬章問曰: “或謂孔子於衛, 主癰疽, 於齊, 主侍人瘠環, 有諸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호사자(好事者)【남의 말하기 좋아하고 아무 말이나 잘 둘러쳐대는 인간】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위나라에 계실 때는 수제자 자로의 처형(妻兄)이며 위나라 의 현대부(賢大夫) 안수유(顔讎由)【「공자세가」에는 ‘공자는 드디어 위나라에 도착하여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孔子遂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라고 기술되어 있으므로, 거로(去魯) 후 처음 위나라에 갔을 때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안수유와 안탁추는 동일인이다. 그런데 『좌전』 『장자(莊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존사(尊師)」에는 ‘안탁취(顔涿聚)’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제인이며 안탁추와 동일인은 아니다】에게 의탁하여 머무르셨다. 당시 위령공이 가장 총애했던 신하였던 미자하(彌子瑕)【이 사람에 관해서는 『한비자(韓非子)』 「설난(說難)」편, 『여씨춘추(呂氏春秋)』 「신대람(愼大覽)」,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결코 공자를 공명정대하게 그리고만 있지 않다. 맹자는 이러한 논의를 모두 싸잡아서 묵살하고 새로운 공자의 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의 처와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의 처와는 자매지간이었다. 그래서 미자하가 자로에게 이르기를, ‘공자가 나의 집에 와서 기숙하면 위나라의 경상의 지위를 얻게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공자와 같은 큰 인물을 자신의 집에 기숙시키면 자기의 명성도 높아진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자로는 이 미자하의 말을 공자에게 전했다. 孟子曰: “否, 不然也. 好事者爲之也. 於衛, 主顔讎由. 彌子之妻與子路之妻, 兄弟也. 彌子謂子路曰: ‘孔子主我, 衛卿可得也.’ 子路以告. 그러자 공자는 말했다: ‘그런 대사는 천명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공자가 미자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공자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도 예(禮)로써 하였고, 물러나는 것도 의(義)로써 하였다. 지위를 얻고 못 얻고의 문제에 관해서는 ‘천명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옹저의 집에 머물고, 환관 척환의 집에 기탁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도 없는 것이요, 명도 없는 것이다. 어찌 공자가 그런 짓을 했겠는가! 孔子曰: ‘有命.’ 孔子進以禮, 退以義, 得之不得曰 有命 . 而主癰疽與侍人瘠環, 是無義無命也. 공자는 이러한 훌륭한 삶의 자세 때문에 노나라에서도 위나라에 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송나라로 갔는데, 송나라에서는 사마(司馬)【군대를 관장하는 관직명】인 환퇴(桓魋)【『논어』 7-22】가 공자를 죽이려고 하는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공자세가(孔子世家)」 참조】. 이 환난 속에서 공자는 미천한 자로서 변장을 하고서 송나라를 빠져나갔다. 이때 공자께서는 진(陳)나라 제후인 주(周)의 신하였던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을 택하여 기숙하였다【이 구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소개치 않는다】. 孔子不悅於魯ㆍ衛, 遭宋桓司馬, 將要而殺之, 微服而過宋. 是時孔子當阨, 主司城貞子, 爲陳侯周臣. 내가 듣기로는 조정에 가까이 있는 근신의 사람됨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손님으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좋고, 먼 지역에서 벼슬을 하기 위하여 오는 원산의 사람됨을 평가하려면 그 사람이 기숙하고 있는 집의 주인을 살피는 것이 좋다. 만약 공자가 옹저의 집에서 기숙하고, 환관 척환의 집에서 기탁했다고 한다면 어찌 공자를 성인 공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吾聞觀近臣, 以其所爲主; 觀遠臣, 以其所主. 若孔子主癰疽與侍人瘠環, 何以爲孔子?” |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문제들은 이미 본문에서 다 설파하였으므로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이러한 『맹자』의 기술을 읽으면서 얼마나 공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리얼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실감한다. 공자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 그 기본골격이 동일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실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신화적 논란이 아닌 사실의 해석에 관한 논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마치 다산이 강진에서 살 때의 일화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거나, 다산의 기독교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를 해석하는 논쟁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와 다산의 시대적 거리와, 맹자와 공자의 시대적 거리가 비슷하다.
공자는 맹자의 디펜스를 통하여 그 신성한 역사적 가치를 확보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맹자가 확립해놓은 공자상은 맹자가 생각한 전국시대의 이상형이라는 것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인용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고전 > 맹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하 - 1. 공자, 시중하여 집대성(集大成)하다 (0) | 2022.12.28 |
---|---|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상 - 9. 백리해, 자기를 팔아서 벼슬자리를 구했나? (0) | 2022.12.28 |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상 - 7. 이윤은 출세지향형 인물인가? (0) | 2022.12.28 |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상 - 6. 선양(禪讓)과 승계(承繼) (0) | 2022.12.28 |
맹자한글역주, 만장장구 상 - 5. 선양의 조건 (0) | 202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