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작은 것을 길러 큰 것을 잃다
6a-1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이 자기 몸을 대하는 데 있어서, 어느 부분이 되었든지간에 아끼지 아니 하는 곳이 없다【沃案: 동방언어에 있어서 ‘사랑한다[愛]’는 ‘아낀다’는 뜻이 그 원초적 의미이다】. 아끼지 아니 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잘 기르지 아니 하는 곳이 없다. 한 척, 한 촌의 피부라도 아끼지 아니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한 척, 한 촌의 피부라도 잘 기르지 아니 하는 바가 없다. 우리가 한 인간이 선한가, 불선한가를 고찰하려고 한다면, 그 인간이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을 기르기를 선택하는가 하는 것을 고찰하는 것 외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沃案: 대부분의 주석이 ‘고기선불선(考其善不善)’을 기름의 방식의 좋음과 나쁨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보다 포괄적인 인간의 평가로서 해석한다】. 6a-14. 孟子曰: “人之於身也, 兼所愛. 兼所愛, 則兼所養也. 無尺寸之膚不愛焉, 則無尺寸之膚不養也. 所以考其善不善者, 豈有他哉? 於己取之而已矣.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귀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천한 부분이 있고, 작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큰 부분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쳐서는 아니 되고, 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쳐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 작은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小人)이 되기 마련이고, 큰 것을 잘 기르는 자는 대인(大人)이 되기 마련이다. 體有貴賤, 有小大. 無以小害大, 無以賤害貴.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 지금 여기 한 정원사[場師]가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오동나무나 가래나무와 같은 양질의 재목을 패어 내버리고, 멧대추나무나 가시나무와 같은 하질의 잡목을 키운다면 우리는 그를 천장사(賤場師), 즉 천한 정원사라고 말할 것이다. 한 손가락을 치료하는 데만 전념하여 어깨와 등짝 전부가 썩어가고 있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자는 곧 돌팔이 의사일 수밖에 없다【沃案: 보통의 해석과 다르다. ‘질인(疾人)’을 나는 의사로 해석했다. ‘낭(狼)’은 돌팔이의 뜻. 물론 손가락 하나를 기르는 데만 전념하고 어깨와 등짝 전부가 썩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는 자는 천치바보 같은 녀석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今有場師, 舍其梧檟, 養其樲棘, 則爲賤場師焉. 養其一指而失其肩背, 而不知也, 則爲狼疾人也. 무엇이든지 처먹는 데만 마음이 빼앗겨 있는 인간을 우리는 천하게 여긴다. 작은 것을 기르느라고 큰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먹고 마신다는 것은 생명의 기본조건이다. 먹고 마시는 데 마음이 빼앗겨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만약 큰 것을 기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을 줄만 안다면, 그의 구복(口腹)의 쾌락이 결코 한 척, 한 촌의 피부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飮食之人, 則人賤之矣, 爲其養小以失大也. 飮食之人無有失也, 則腹豈適爲尺寸之膚哉?” |
맹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몸(Mom)이라는 유기체의 전체에 대한 홀리스틱한 비젼(holistic vision)을 가지고 있다. 선진사상은 후대의 도학(道學)과는 달리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입장을 고수한다. 애심(愛心)은 곧 애신(愛身)의 문제이며, 양심(良心)은 곧 양신(良身)의 문제이다. 신(身)을 떠나 심(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심(心)을 신(身)으로부터 특수존재화하는 것은 모두 신화적 사유의 잡사(雜事)일뿐이다. 플라톤으로부터 헤겔에 이르는 모든 서양철인들과 유대-기독교적 사유전통이 스며든 모든 사상가들이 이러한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주희는 천이소자(賤而小者)를 구복(口腹)이라 하고, 귀이대자(貴而大者)를 심지(心志)라 하여, 몸(Mom) 하나된 속에서도 소ㆍ대의 이원론(bifurcation)을 견지하였지만, 이것은 오치된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일 뿐이다.
몸은 선(善)과 불선(不善), 대(大)와 소(小), 귀(貴)와 천(賤)의 복합체이며 그것은 이원화된 가치적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적 규정이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놓여있다. 따라서 대체를 기른다 해서 소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소체를 위하여 대체가 희생되는 것만이 허용되지 않는 가치의 방향성이 있을 뿐이다. 맹자의 유기체적 사상을 또다시 기독교적, 서구적, 불교적 이원성으로 환원한 것이 주희의 도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안일한 입장을 거부한다. 이러한 유기체론적 정합성의 관점을 상실하면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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