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체(大體)와 소체(小體)
6a-15. 공도자(公都子)【2b-5, 3b-9, 4b-30, 6a-5, 6a-6 등에 기출】가 인간에 관한 궁금증이 생겨 맹자에게 여쭈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이오니이까? 뭔 이유에서일까요?” 6a-15.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대체(大體)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그 소체(小體)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느니라.”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공도자가 또 여쭈었다: “결국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대체(大體)를 따르고, 왜 어떤 사람은 소체(小體)를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曰: “鈞是人也, 或從其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목지관(耳目之官, 귀와 눈과 같은 감각기관)은 사(思)라고 하는 통합적 기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외계 대상물에 의하여 이끌리고, 지배당한다. 외계 대상물은 끊임없이 이목지관(耳目之官)과 교섭하면서 그 감각작용을 촉발시킬 뿐이다【沃案: ‘물교물(物交物)’의 해석이 어렵다. 외계의 대상물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교섭하면서 인식을 촉발하고 지배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가장 정당하지만, 인식주체를 도외시한 외물과 외물의 교섭을 얘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교물物交物)’의 두 번째 ‘물(物)’을 연자(衍字)로 보아 삭제할 수도 있고, 그 두 번째 ‘물(物)’을 주희처럼 이목지관이라는 ‘물(物)’로서 해석할 수도 있다. 보통 ‘물교물物交物)’을 외물이 끊임없이 이목지관에 육박해온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려 해석한다. 주희의 해석이 비교적 명료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曰: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그러나 ‘심지관(心之官)’【‘마음’이라는 기관을 ‘이(耳)’나 ‘목(目)’과 같은 동차원의 한 기관으로서 설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이라는 것은 이목지관이 가지고 있지 못한 사(思)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思)하면 얻을 수 있고, 사(思)하지 아니 하면 얻을 수 없다【여기 ‘득지(得之)’란 말에 있어서, ‘득(得)’의 대상으로서의 ‘지(之)’가 무엇인 지에 관해 구체적 언급이 없다. 주희는 ‘득지(得之)’를 ‘득기리(得其理)’라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되면 주자의 ‘리(理)’는 ‘기(氣)’와 대립되는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될 것이다. 주희의 이원론적 생각은 취하기 어려우나 ‘얻는다’는 말이 대체로 도덕적 본심(本心)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것은 명확하다】.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여기서 말하는 이목지관이든 심지관이든 이 기관들은【‘차(此)’를 구본에 ‘비(比)’라고 써놓았고, 조기도 ‘비방(比方)’으로 해석했다. 왕인지(王引之)는 ‘비(比)’를 ‘개(皆)’로 훈했다. 그러나 그냥 ‘차(此)’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런데 ‘차(此)’는 ‘심지관(心之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목지관(耳目之官)과 심지관(心之官)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모두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몸의 다양한 기관의 기능 중에서 그 큰 것[大者]을 먼저 확립해놓으면 그 작은 것[小者]들이 그 큰 것의 통합적 기능을 망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대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此天之所與我者, 先立乎其大者, 則其小者弗能奪也. 此爲大人而已矣.” |
아주 간략하지만 맹자의 심학의 도덕인식론(moral epistemology)의 핵심을 요약해놓은 명언이라고 할 것이다. 「공손추」 상2와 호상발명(互相發明)하는 내용으로서 같이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 또다시 중요한 것은 맹자의 사상을 소인ㆍ대인, 소체ㆍ대체의 이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대인(大人) | 소인(小人) |
대체(大體) | 소체(小體) |
심지관(心之官) | 이목지관(耳目之官) |
사(思) | 페어물(蔽於物) |
사즉득지(思則得之) | 불사즉부득(不思則不得) |
차천지여아자(此天之所與我者) |
심지관(心之官)이나 이목지관(耳目之官)이나 다 같은 몸의 관(官)이다. 다 같이 몸(Mom)이라는 유기체의 정체(整體)에 참여하는 기관이다. 그 결정적 차이는 사(思)라는 기능의 유ㆍ무일 뿐이다. 심지관(心之官)은 사(思)의 능력이 있고, 이목지관(耳目之官)은 사(思)의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목지관(耳目之官)’이란 귀와 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계와 직접 교섭하는 우리 몸의 감각 기능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와 눈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을 도려내어 책상 위에 놓는다고 눈이 보지는 않는다. 눈이 ‘보는’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이목지관이 불사(不思)한다는 말을 천박한 상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에 맹자가 사용하는 ‘사(思)’라는 기능의 특수성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눈이 ‘보기 위해서’ ‘생각하는’ 그 ‘생각’은 맹자가 말하는 ‘사(思)’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편린적 판단작용이다. 눈은 보는 작용만을 수행하고, 귀는 듣는 작용만을 수행하고, 입은 맛보는 작용만을 수행하고, 코는 냄새 맡는 작용만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용은 대상성의 한계가 명료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그 자체의 한계에만 머물러 있을 때는 외계의 사물에 이끌리는, 즉 육욕(肉慾)의 충족이라는 단순한 방향성만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것을 맹자는 ‘폐어물(蔽於物)’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폐(蔽)’라는 말은 ‘휘덮인다’ ‘지배당한다’ ‘이끌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그것은 능동적 자발성을 결여한 인식의 수동성(passivity)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세계인식에는 이러한 수동적 감각인식을 통섭하는 총체적 통각(統覺, 通覺, apperception)이 필요하다. 이 통각작용을 맹자는 여기서 ‘사(思)’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말하는 통각은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혹은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subject)와도 비슷한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대상세계의 인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칸트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뉴톤 물리학적 물리적 인과 세계의 합리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에게는 그러한 과학적 세계관의 전제가 없다. 맹자의 인식론은 애초로부터 왕도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인식론은 인식 자체가 도덕인식론이다. 그는 나무 한 그루를 과학적 탄소동화작용의 유기체로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도덕적 생성의 주체로서 쳐다본다. 따라서 ‘사(思)’라는 통각적 기능은 합리적(rational)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moral)이며 능동적(active)이며, 주체적(subjective)이며, 구성적(constructive)이다. 맹자에게 있어서는 합리적인 것은 도덕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지관(心之官)이나 이목지관(耳目之官)의 관계는 주희에게 있어서처럼 일자가 타자를 부정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대체가 소체에 선립(先立)하는 상생상보의 관계에 있다. ‘선립(先立)’이란 그것이 주체가 되어 부속적인 기능들을 콘트롤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체(大體)가 설립하면 대인(大人)이 되고, 소체(小體)가 설립하면 소인(小人)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관찰된다. 가장 돈 많은 사람이 가장 쩨쩨한 발언만을 일삼는다든가, 가장 권력이 많은 사람이 가장 시시한 물욕(物欲)에 사로잡혀 모든 공적 자산을 사유화하려는 경향만을 보이며 일체 개선이나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것은 소체(小體)가 너무도 확고하게 선립(先立)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재(哀哉)라! 이 민족의 불운일 뿐이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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