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마음을 기르려면 욕심을 적게 하라
7b-35.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의 마음을 기르는 데는 과욕(寡欲)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 사람됨이 과욕(寡欲)하면, 비록 본래의 마음을 보존치 못하는 상황이 있더라도 그것은 잠깐에 그치고 만다. 그 사람됨이 욕(欲)하면, 비록 본래의 마음을 잘 보존하는 상황이 있더라도 그것은 잠깐에 그치고 만다.” 7b-35. 孟子曰: “養心莫善於寡欲.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雖有存焉者, 寡矣.” |
‘존(存)’의 의미를 ‘사람이 생존한다’는 뜻으로 새기었으나 맥락상 적당치 못하다. 주희가 ‘부실기본심(不失其本心)’으로 본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양심(養心)’의 ‘심(心)’을 너무 본래적인 것으로만 새기면 아니 된다. 맹자의 심은 인간의 총체적 의식활동일 뿐이다.
많은 자들이 유가는 ‘과욕(寡欲)’을 말하는데 도가는 ‘무욕(無欲)’을 말 한다 하여 유도의 차이는 과(寡)ㆍ무(無)에 있다고 주장한다. 근세유학을 창시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그의 획기적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주정(主靜)’을 자주하여 ‘무욕고정(無欲故靜)’이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주렴계를 도가적 성향을 띤다고 낙인찍는다. 그러나 ‘과욕(寡欲)’과 ‘무욕(無欲)’에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노자도 ‘무욕(無欲)’을 말하였지만, 동시에 ‘소사과욕(少私寡欲)’(19장)을 말하였고, 그 본의를 잘 씹어보면 ‘무욕(無欲)’의 의미는 욕망의 방향성에 관한 문제이지 결코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욕할 수 없다.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욕(欲)’의 에너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노자가 ‘무지무욕(無知無欲)’을 말하지만 무지도 ‘무지(ignorance)’를 말한 것이 아니고, ‘지(知)’가 제거된 상태를 말하는 것 도 아니다. 우리는 ‘지(知)’ 즉 인식의 성립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다. 걷는다는 행위가 이미지 ‘지(知)’에 의하여 ‘도(道)’를 파악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무지(無知)’라 할 때의 ‘지(知)’는 문명의 교사(巧邪)와 결부되어 인간의 불필요한 욕망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그릇된 지이며, 그것은 유위적 조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유위적 조작이 없는 순결한 삶을 무지라고 부르는 것이요,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대처하는 앎의 흐름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은 노자의 ‘무욕(無欲)’의 궁극적 의미는 맹자의 ‘과욕(寡欲)’과 근원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맹자는 문명의 건설현장을 떠나지 않을 뿐이요, 노자는 그 건설현장을 멀리서 관망하며 조소하고 있을 뿐이다.
주렴계도 ‘무욕(無欲)’을 해설하여 ‘정허동직(靜虛動直)’이라 하였다. ‘정허(靜虛)’하면 오히려 명(明)해지고, 명(明)하면 통(通)한다고 하였다. ‘동직(動直)’이란 마음의 발동이 일체의 공리적 계산이 없이 직한 것이니,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 같은 것이 곧바로 발동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직(動直)하면 공(公)하고, 공(公)하면 부(溥)하게 된다고 하였다. 공소이란 공적(public)이고, 개방적(open)이란 뜻이며, 부(溥)란 보편적(universal)이란 뜻이다. 결국 ‘무욕(無欲)’이란 밝고 화통하고 공적이며 보편적인 가치관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이다[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乎! 『通書』 「聖學」]. 이런 실제적 의미를 취하지 않고 유가니 도가니 운운하는 것은 가소로운 것이다.
본 장의 취지는 매우 짤막하지만 맹자사상을 압축한 것이다. 그리고 34장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고 고수한 거의 ‘비결(秘決)’에 가까운 삶의 자세를 노출시켰다. 그리고 32장에서는 선언(善言)과 선도(善道)를 말하면서 인간은 자기존재에 대하여 궁극적 책임이 있다는 ‘자임(自任)’을 말하였고 33장에서는 ‘군자행법이사명(君子行法以俟命)’을 말하였다. 모두 맹자가 생각하는 삶의 근원적 가치와 관계된 풍요로운 파편이다. 「진심」편의 편집자는 『맹자』라는 거대한 텍스트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에 관하여 매우 심각한 고민을 하며 그 자료를 압축시켜간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위대한 편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앞으로 남은 세 장도 그러한 대단원의 막으로서 의도적으로 편집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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