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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11장 - 1. 동양문명 최고의 메시지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11장 - 1. 동양문명 최고의 메시지

건방진방랑자 2021. 9. 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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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동양문명 최고의 메시지

 

 

子曰: “素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숨어있는 오묘한 세계만을 찾아다니고 괴이한 것을 실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후세에 잘 돋보여서 그에 대해 기술되는 바가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 漢書當作索, 蓋字之誤也.
()한서를 살펴보면 마땅히 ()’으로 쓰여 있으니, 대개 글자의 오류이다.
 
索隱行怪, 言深求隱僻之理, 而過爲詭異之行也. 然以其足以欺世而盜名, 故後世或有稱述之者.
색은행괴(索隱行怪)는 숨겨진 궁벽한 이치를 깊숙이 구하고 괴이한 행동을 지나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훔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후세에 혹 칭술되는 것이다.
 
此知之過而不擇乎善, 行之過而不用其中, 不當强而强者也, 聖人豈爲之哉!
그러나 이것은 앎이 지나쳐 선을 택하지 못하고 행동이 지나쳐 중용을 잃은 것이니 마땅히 강하지 않아야 할 것에 강한 것이다. 그러니 성인이 어찌 그것을 하랴?

 

()는 색(, 찾다)의 오기(誤記)”라고 주주(朱註)에 쓰여 있습니다. 대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이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사람이죠. 그러나 공자는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것은 중용(中庸)의 대전제입니다. 역사에 비록 휘날릴 일이라도 그것이 희한한 기괴한 행동이라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은 일상성이죠. 역사에 기발한 행동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울리는 공자의 경종(警鐘)입니다. 그 다음 봅시다.

 

 

 

君子遵道而行, 半途而廢, 吾弗能已矣.
군자라는 사람이 도()를 따라 행하면서도 중도에 그만두는데,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遵道而行則能擇乎善矣. 半塗而廢則力之不足也. 此其知雖足以及之而行有不逮, 當强而不强者也.
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선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에 그만 둔다는 것은 힘이 부족한 것이니, 이것은 그 앎이 미치기엔 넉넉하나 행동이 미치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야 할 곳에 강하지 않은 것이다.
 
, 止也. 聖人於此, 非勉焉而不敢廢, 蓋至誠無息, 自有所不能止也.
는 그친다는 뜻이다. 성인은 이에 억지로 힘써 감히 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대개 지성무식(至誠無息)하여 그칠 수 없다는 말이다.

 

도올 서원에서 결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항상 모든 일에 꾸준해야 된단 말이죠.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시절에 4년 동안 단 하루 한 시간을 빼먹지 않고 완벽한 개근을 했습니다. 개근상은 없었지만 나는 내 마음의 개근상을 졸업 때 얻었지요. 이런 게 도올서원의 정신이예요. 1장에서, 잠시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죠?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그리고 이 말과 관련되는 맥락이 논어(論語) 옹야(雍也)옹야왈 비불설자지도 력부족야 자왈 력부족자 중도이폐 금여획(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에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군자는 중용(中庸)에 의거하여 세상에 은둔하여 알려지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니, 오직 성자(聖者)만이 이것에 능할 뿐이다.

 

()은 수동형이므로 불견지(不見知)알려지지 않는다의 의미입니다.

 

둔세불견지이불회(遯世不見知而不悔)’라고 했는데, 이것은 은자의 사상이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동양사상은 은자의 철학이다라고 오해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중용(中庸)을 지키기 때문에 드러나기 어렵다는 겁니다. 중용(中庸)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밋밋한 일상적인 행위에 깃드는 것이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1장에 신기독야(愼其獨也)’라고 했죠? 신독하는 사람들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하는 경향성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김용옥처럼 한문을 잘해서 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세상에 좀 알려진 편이지만, 난 참으로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의 신념이 있어요. 매일 주말에 새마을호에 올라타도 요즈음은 알아보고 알아주는 사람은 물론 한명도 없습니다. 그냥 그런 게 내 삶이에요. 매스컴에 나가길 하나 신문에 함부로 글을 쓰길 하나. , 그딴 것 해서 뭐해? 나와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 누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누가 보도를 합니까? 진실한 노력이라고 독지가가 후원을 해줍니까? 이 세상에 돈 많은 자들은 모두 눈이 먼 것 같애요. 충무할매 김밥장사 같은 사람들도 그 공들여 모은 돈을 기껏해야 썩은 대학에 무의미하게 바쳐 버리고! 여러분과 나는 다 같은 심정예요. 항상 중용(中庸)을 지킨다는 것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입니다. 도올 서원에 내가 들이는 공력을 이 시점에서 누가 알아줍니까? 그러나 결국 중용(中庸)을 지키는 사람들은 둔세불견지(遯世不見知)’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다음을 보면, ‘이불회 유성자능지(而不悔 唯聖者能之)’ 이 얼마나 강렬한 메세지입니까! 이게 피눈물 나게 어려운 겁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짓을 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부끄럼이 없고 후회가 없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경지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리ㆍ전주에서 살고 있지만, 외로워도 외로워도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어요! (도올 선생님은 강의도중 이런 대목에서 자주 눈물이 글썽하셨다. 재생주) 논어(論語)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는 공자의 말씀은 내 인생을 반추해보아도 솔직히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나도 항상 내속에 타인이 알아주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참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든요. 그리고 나와 경쟁상대라고 간주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인들이 알아주는 눈 부시는 일을 했다고 신문에 나면 샘이나요. 부끄러워지거든요. 그런데 요즈음 나이가 쉰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들이 갑자기 없어지더라구요. 갑자기 경쟁대상이라고 느낄만한 사람들이 없어져버리고 누구든 잘하면 기쁨뿐이에요. 잘했다고 격려해주고만 싶어져요. 아무도 몰라줘도 슬플 건덕지가 없어지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할일이 뚜렷이 생겨서 그런가 봐요. 세상 사람들이 알아준다 이것 참 허망한 것인데 이것하나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요즈음에나 깨닫게 되었어요.

 

나는 중국 고전을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이 중용(中庸) 일서(一書)를 뛰어넘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언젠가 대장경(大藏經)만근이 중용(中庸)한 근에 못 미친다고 했더니(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83) 불교학 하는 학생들이 항의를 하는데, 내가 대장경(大藏經)을 무시해서 그런 비유를 든 게 아니라, 결국은 이 짧은 중용(中庸)의 메세지가 동양문명 최고의, 지고의, 더 이상 없는 클래식 중의 하나란 것을 강조해서 한 말일 뿐입니다. 인간이 문명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한은 이 중용(中庸)’의 한 마디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제 점점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각론으로 접근해 들어가는데, 중용(中庸)이 단지 언어로써만 주저앉아 있을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반드시 삶 속에서 그걸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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