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1. 남방과 북방의 강함
子路問强. 자로가 공자에게 용기에 대해 물었다. 子路, 孔子弟子仲由也. 子路好勇, 故問强. 자로는 공자의 제자로 중유다. 자로는 용맹을 좋아했기 때문에, 강함에 대해 물은 것이다. |
자로는 말했듯이 우직하고 저돌적인, 용기의 상징이었죠. 그래서 관심도 용기에 있었겠지. 그래서 “What is courage?”라고 물은 것입니다.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공자가 말했다. “남방의 강(强)을 말한 것인가, 북방의 강(强)을 말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이 힘써야 할 강(强)을 말한 것인가?” 抑, 語辭. 而, 汝也. 억(抑)은 어조사다. 이(而)은 너란 뜻이다. |
여기 공자의 말은 일종의 변증법(Dialectic)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산파술이라고 하죠? 그러면 산파가 뭡니까? 자기는 애를 낳지 않으면서 남이 애를 낳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변증법(Dialectic) 자체가 애를 낳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말이예요. 이런 것은 동서고금이 같은 겁니다. 모든 문답법에는 필연적으로 변증법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윗 문장에서 보면 ‘남방지강(南方之强)’이 테제(these), ‘북방지강(北方之强)’이 안티테제(antithese) 거기에 대해 ‘이강(而强)’이 씬테제(synthese)가 되겠죠?
여기서, ‘남방’은 당나라 때의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의하면 ‘형양지남(荊陽之南)’, 즉 지금의 광동성 지역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춘추 전국시대에는 광동성까지는 안 내려갔을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더운 곳을 말하겠지요.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월남전에서 월남 사람들이 지독하게 항거하는 걸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지만, 대개 유순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마하트마 간디가 적절한데 그의 비폭력주의(Nonviolence) 같은 게 여기에 해당될 거예요. 그 다음,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너그럽고 부드럽게 함으로써 가르치고, 도(道)가 없는 것에도【간디의 경우, 영국 놈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해도】 보복하지 않는 것이 남방의 강함이다. 군자가 이곳에 처한다. 寬柔以敎, 謂含容巽順以誨人之不及也. 不報無道, 謂橫逆之來, 直受之而不報也. 관유이교(寬柔以敎)란 용납함을 머금고 공손하고 부드러움으로 남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불보무도(不報無道)는 나에게 무례하게 대우하며 오더라도 곧바로 그걸 감수하고 갚아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南方風氣柔弱, 故以含忍之力勝人爲强, 君子之道也. 남방의 풍토와 기운이 부드럽고 약하기 때문에 참음을 머금은 힘으로 사람을 이기는 것을 강함이라 여기니, 군자의 도인 것이다. |
우선 주자 주(註)를 봅시다. ‘불보무도(不報無道)’라는 것은 황당무계한 반역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받기 만하고 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방의 풍기가 유약하여 인내하는 힘으로 사람들을 이겨내는 것을 강함으로 여기니 군자의 도(道)다. 여기서 군자는 강자와 대비되는 것으로 그냥 호인을 의미합니다. 다음 문장의 ‘고군자화이불류(故君子和而不流)’에서의 군자와는 다른 뜻이예요.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금혁을 깔고 자면서 죽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북방의 강함인데, 강자가 거기에 머문다. 衽, 席也. 金, 戈兵之屬; 革, 甲冑之屬. 北方風氣剛勁, 故以果敢之力勝人爲强, 强者之事也. 임(衽)은 깔다란 뜻이다. 금(金)은 창과 병기류이다. 혁(革)은 갑옷과 투구의 종류다. 북방의 풍토와 기운은 굳세고 강경하기 때문에 과감한 힘으로 남을 제압함을 강함이라 여기니, 강한 자의 일인 것이다. |
임(衽)은 명사로 방바닥에 까는 ‘요’이고, 동사로는 ‘요를 깔다’의 뜻이며. 금(金)은 창과 병기류, 혁(革)은 갑옷류을 말합니다.
10장 2. 포레스트 검프와 서울
포레스트 검프에 나타난 남방과 북방의 강함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는 최근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 중에서 아주 위대한 영화입니다. 두 번 요절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영화는 꼭 보시도록! 어디, 이 영화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음, 많은데. 그럼 얘기가 되겠구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백치인 포레스트 검프는 남방지강의 전형적인 사람이죠? 이런 백치를 등장시킨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해 미국 중산층의 가장 건전한 삶의 측면을 대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미국 사람의 보통 삶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자연적이거든요. 그들이 인위적인 사람인 줄 알지만 오히려 순박한 사람이 많아요. 알라바마촌놈, 이것은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의 상징예요.
이 영화의 주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노자 사상이에요! 『도덕경(道德經)』에서 ‘생이불유(生而不有, 자기가 生하고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한다고 했죠? 그래서 모든 것을 이루어도 포레스트 자신은 소유하지 않았고, 또 그래서 더욱 이룰 수 있었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백치라 마음이 허하기 때문예요. 이런 사람을 보면 누구든지 나도 한번 그럴 수 있다면 하는 동경을 느낍니다. 그런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며 이상주의적 측면이며 또 기만성이에요.
근데 포레스트에 대해서 어떤 중위가 한 명 있었죠? 댄 중위였죠? 기억나시죠? 대대로 무사 집안으로 전쟁에 나가 죽는 게 집안의 명예라고 생각하는 그를 포레스트가 살려냈는데 그 사람은 불구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 중위가 비관해서 자기를 구해준 은인인 포레스트의 목덜미를 잡고 왜 날 살려냈냐고 욕설을 막 해대죠. 참 처절한 장면이었지! 이 사람은 포레스트와는 정반대인 북방지강의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금혁(金革)을 깔고 자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북방지강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다 결국은 포레스트에게 감사를 하게 되죠? 강(强)이 유(柔)에 굴복하죠? 그래서 이 영화에는 노자가 깔려 있어요.
서울은 거대한 코미디 영화세트장
내가 10여 년간 유학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눈에 거슬렸던 게 길거리에서 쌈박질하는 겁니다. 외국에는 그런 풍경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한국인을 상당히 유순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여러 문명을 쭉 여행해 본 경험으로 볼 때 한국 사람은 굉장히 맹폭한 사람이예요. 북방지강에 해당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성수대교가 무너져도 까딱 안 해! 가스관이 터졌다고 해도 마찬가지! 난 이리에 살면서 성수대교 사고도 가스폭발 사고도 몰랐습니다. 종합 뉴스를 몇 달 만에 접하니까. 나는 자질구레한 인간세의 정보에 내 고귀한 정신을 타락시키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나중에 그런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에 서울에 자동차를 타고 입성을 하는데, 한강변에는 네온등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서울의 장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한강변을 쭉 타고 오면서 성수대교를 딱 쳐다보았는데, 앗, 너무도 엄청난 충격 속에서 차에 내려 멍하니 서서 우리 역사, 나 자신의 모습을 회고해보았어요.
그때 불현듯 스치는 거대한 느낌이 있었어요. “아항~ 이 서울이라는 곳이 거대한 코메디 영화의 세트구나!” 한국 민족은 지난 50년간 코메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거대한 세트를 만들어 놓았구나! 그러니까 다리가 쑥! 빠지고 가스가 뻥 터지고 해도 그냥 웃고 말아! 야~ 우리민족은 코메디 영화의 주인공들이었구나! 아~ 우리는 코메디 영화 한편을 제작하기 위하여 대평원에 말발굽을 달린 선구자들로부터 피땀 흘려 노력했구나! 이것이 하나의 코메디 영화였구나! 나는 일개 코메디안에 불과했구나! 내가 성수대교를 보면서 유명한 말! 한국은 거대한 코메디 영화세트다! 이 말을 기억해 두세요. 이건 현실이예요. 코메디 영화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니까. 근데 한국 민족은 북방지강이라서 그 속에서도 잘 살아. 그래서 강자나 거기에 거할 수 있단 말입니다. 자, 다음 문장 봅시다.
10장 3. 추구해야 할 강함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를 이루어도 휩쓸리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가운데 서서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막혀 있던 시절의 뜻을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니, 강하구나 그 굳셈이여! 此四者, 汝之所當强也. 矯, 强貌. 『詩』曰: “矯矯虎臣,” 是也. 倚, 偏著也. 塞, 未達也. 이 네 가지는 자로 네 녀석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강함이다. 교(矯)는 강한 모양이다. 『시경』에선 ‘굳세고 굳센 호랑이 같은 신하’라고 쓰여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의(倚)는 치우쳐 붙은 것으로 편당 짓는 것이다. 색(塞)은 영달하지 못함이다. 國有道, 不變未達之所守; 國無道, 不變平生之所守也. 此則所謂中庸之不可能者. 非有以自勝其人欲之私, 不能擇而守也, 君子之强, 孰大於是? 국유도(國有道)엔 벼슬하지 않던 때의 지키던 것을 바꾸지 않으며, 국무도(國無道)엔 평생의 지조를 바꾸질 않으니, 이것이 ‘중용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긴 것이 아니면, 선택하여 지킬 수 없으니, 군자의 강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夫子以是告子路者, 所以抑其血氣之剛, 而進之以德義之勇也. 右第十章. 부자께서 이것으로 자로에게 알려준 것은 혈기의 강함을 억눌러 덕과 의의 용맹으로 나아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오른쪽은 제10장이다. |
이 문장 앞에서 남방지강(南方之强)과 북방지강(北方之强)을 테제와 안티테제로 제시해 놓고서 이제 비로소 이강(而强)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네가 힘쓸 강은 여기서부터다.” 하고 공자가 자로에게 결론적으로 얘기하는 것이죠.
화이불류(和而不流)에 관해서는 『논어(論語)』 「자로(子路)」을 펴 보세요. ‘군자는 <어떤 집단에>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인은 같아지기는 잘하는데 조화를 못 이룬다[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이 문장의 뉘앙스가 재미있죠? 이 문장도 『중용(中庸)』의 문장과 비슷한 맥락이예요. 육군 중위 녀석이 경마장에 가서 경마꾼들과 동(同)을 해버려! 그래서 강도질을 해! 육사를 나오고 서울 법대에 위탁교육을 받은 엘리트 녀석이 경마에 빠지고 지 애인하고 놀기 위해 강도질을 했단 말이야.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하여튼 이런 사건이 자주 터지면, 감추질 말고 적나라하게 까발려져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극이 되서 한국군대는 필연적으로 지원병 제도(volunteer system)로 가야 해. 국민개병제는 이제 재고되어야 할 제도라고 생각되요. 군사독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 원인이 국민개병제란 말이요.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세금을 국방예산에 쏟아 붓고, 세계화니 경쟁력 강화를 운운하면서 그 창조적 시기의 소중한 이 땅의 젊은이들을 몽땅 무차별 군대로 쓸어 넣느냐 말예요?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모집된 장정들을 가지고 정예군대를 만들어야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청년들을 죄다 잡아다가 군인 만드는 것이 꼭 국방과 애국의 최선의 방책인 것 같지 않아요. 건강한 청년들이 눈 내리는 데 쓸데없이 연병장 빗질하고 있는 게 우리 국민의 에너지효용입니까? 지원병제도로 안가고 관리할 수 없는 해이한 인력을 붙들고 있으면 계속 이런 유사한 사건들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문 사설에는 이런 것까지는 얘기를 안 하던데, 어쨌든 이런 사건이 더 터져야 돼. 그래야 군대가 제 길을 잡아요. 이번 육군 중위 사건은 얼마나 한국 군대가 썩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물론 분단상황이라는 이 불행한 현실이 청산될 때까지는 하기 어려운 말이겠지만 국민개병제가 아닌 일본, 미국에 유학하면서 그것이 절대적 옵션이 아니라는 생각에 충격이 오더군요. 하여튼 군대가 정신 차려서 우리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교육만 시켜줘도 좋겠어요. 대아를 위해 소아를 희생시킬 줄 알고 불합리한 상황도 슬기롭게 인내할 줄 알고 규율을 지킬 줄 아는 덕성을 군복무시기에 함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화이불류 강재교(和而不流 强哉矯)” 그 다음에 강재교(强哉矯)라고 계속 후렴구처럼 나오죠. 이것은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篇에 ‘교교호신(矯矯虎臣)’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교(矯)는 강한 모양을 나타내는 형용사인데, 강재교(强哉矯)는 강하도다 단단함이여! 이런 느낌의 말이죠.
“중립이불의 강재교(中立而不倚, 强哉矯)!” 전후좌우를 살펴서 의지적 선택에 의한 중도를 고수한다는 말이지요.
10장 4. 중용적인 삶을 산다는 것
“국유도 불변색언(國有道 不變塞焉)” 주자 주(註)를 보면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달성하지 못했던 때에 지키던 것을 변치 않는다[國有道 不變未達之所守].”라고 했는데, 이게 상당히 중요한 말입니다.
80년대 전두환 집권시절에 사회가 꽉 막혔었죠[塞]? 그렇게 무도(無道)했던 시점에서 문민정부로 오면서 유도(有道)하다고 그러잖아? 정말로 유도한 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외면적으로 볼 때는 그때에 비하면 도(道)가 있죠. 그렇지만 무도(無道)한 시절에 느꼈던 문제점이나 개선하려 했던 점들에 대한 마음가짐을 쉽게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구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0년대 문제의식이 몇몇 얼굴이 바뀌었다고 해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그것을 끊임없이 중용(中庸)적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다 90년대에 들어서서 허탈감에 빠져 가지고, ‘나는 이제 두 손 들었다’라고 생각하면 이건 잘못된 겁니다. 중용(中庸)을 모르고 하는 처사란 말야. 그들 자신이 지향하고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목표가 맑시즘을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지향하는 과제는 똑같이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시점에서 이념적으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 좌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이념이 없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중용(中庸)을 몰랐다는 거죠. 거기에 80년대 활동했던 지성인들의 비극이 있고, 여기에 김용옥이라는 존재의 강점이 있는 것입니다. 난 80년대고 90년대고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거든. 80년대와 똑같은 래디칼리즘(radicalism, 급진주의)이 지금 나에게 있고, 똑같은 사회의식이 있고, 그래서 나의 이데올로기는 변화가 없어요. 80년대 투쟁으로 날렸던 사람은 다 날라 갔는데, 김용옥은 갈수록 세지잖아. 앞으로 모든 사람이 나한테 귀를 기울일 때가 올 겁니다. 난 어떤 한 시점에서의 역사에 문제의식을 둔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금 막말로 하는 것 같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사회의 근본문제가 어디 있고,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몰랐어. 중용(中庸)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할 줄 안단 말이야. 그러니까 막혀 있던 시절에 초지일관하던 태도를 변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강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리얼하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유도(有道)에서 무도(無道)로 가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기 지조를 변하지 않아. 이것이야말로 강한 것이다” 이 말이야!
주주(朱註)는 ‘국무도 불변평생지소수야(國無道 不變平生之所守也)’라 했으니 나라에 도가 없다 하더래도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키던 바를 변함없이 고수할 줄 알아야 그것이 참다운 중용(中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바로 중용(中庸)이야! ……. 우리는 마치 밥을 천 원짜리 먹을까 삼천 원짜리 먹을까 고심할 때 “야, 이천 원짜리 먹자” 고 하는 사람들을 중용(中庸)적인 사람이라고 하기 쉬운데(재생폭소), 동양철학의 중용(中庸)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죽음에 이르러도 초지일관 자기지조를 잃지 않는 그것이 바로 중용(中庸)입니다. 자아! 마지막으로 한 장만 더 합시다.
▲ 광주에서 피를 보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여의도에서 국풍81이란 대대적인 화합의 장을 마련해 국민을 기만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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