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도 없는 집에 사는 이가 ‘대나무 동산[竹園]’이란 호를 지은 이유
불이당기(不移堂記)
박지원(朴趾源)
대나무 없는 집의 죽원옹
士涵自號竹園翁, 而扁其所居之堂曰不移, 請余序之. 余嘗登其軒, 而涉其園, 則不見一挺之竹. 余顧而笑曰: “是所謂無何鄕烏有先生之家耶? 名者實之賓, 吾將爲賓乎?” 士涵憮然爲間曰: “聊自寓意耳.”
원령, 측백나무를 그려달란 부탁에 설부를 써서 주다
余笑曰: “無傷也. 吾將爲子實之也. 曩李學士功甫, 閒居爲梅花詩, 得沈董玄墨梅以弁軸. 因笑謂余曰: ‘甚矣! 沈之爲畵也. 能肖物而已矣.’ 余惑之曰: ‘爲畵而肖, 良工也. 學士何笑爲?’
曰: ‘有之矣. 吾初與李元靈遊, 嘗遣絹一本, 請畵孔明廟柏. 元靈良久, 以古篆書雪賦以還. 吾得篆且喜, 益促其畵, 元靈笑曰: ‘子未喩耶? 昔已往矣.’ 余驚曰: ‘昔者來, 乃篆書雪賦耳. 子豈忘之耶?’ 元靈笑曰: ‘柏在其中矣. 夫風霜刻厲, 而其有能不變者耶? 子欲見柏, 則求之於雪矣.’ 余乃笑應曰: ‘求畵而爲篆, 見雪而思不變, 則於柏遠矣. 子之爲道也, 不已離乎?’
유배 가며 측백나무를 만나다
旣而, 余言事得罪, 圍籬黑山島中. 嘗一日一夜, 疾馳七百里, 道路傳言, 金吾郞且至, 有後命. 僮僕驚怖啼泣. 時天寒雨雪, 其落木崩崖, 嵯砑虧蔽, 一望無垠. 而岩前老樹倒垂枝, 若枯竹. 余方立馬披蓑, 遙指稱奇曰: ‘此豈元靈古篆樹耶?’
이공 극도의 공포감 속에 오늘 밤 날 걸 생각하다
旣在籬中, 瘴霧昏昏, 蝮蛇蜈蚣, 糾結枕茵, 爲害不測. 一夜大風振海, 如作霹靂, 從人皆奪魄嘔眩. 余作歌曰: 「南海珊瑚折奈何, 秪恐今宵玉樓寒.」
元靈書報, ‘近得珊瑚曲, 婉而不傷, 無怨悔之意, 庶幾其能處患也. 曩時足下嘗求畵柏, 而足下亦可謂善爲畵耳. 足下去後, 柏數十本, 留在京師, 皆曺吏輩, 禿筆傳寫. 然其勁榦直氣, 凜然不可犯. 而枝葉扶疎, 何其盛也?’ 余不覺失笑曰: ‘元靈可謂沒骨圖.’ 由是觀之, 善畵不在肖其物而已.’ 余亦笑.
꿋꿋한 절개로 대나무 같이 산 이공
旣而, 學士歿, 余爲編其詩文, 得其在謫中所與兄書. 以爲‘近接某人書, 欲爲吾求解於當塗者, 何待我薄也. 雖腐死海中, 吾不爲也.’ 吾持書傷歎曰: ‘李學士眞雪中柏耳. 士窮然後見素志. 患害愍厄而不改其操, 高孤特立而不屈其志者, 豈非可見於歲寒者耶?’
今吾士涵, 性愛竹. 嗚呼, 士涵其眞知竹者耶? 歲寒然後, 吾且登君之軒, 而涉君之園, 看竹於雪中, 可乎? 『燕巖集』 卷之三
해석
대나무 없는 집의 죽원옹
士涵自號竹園翁, 而扁其所居之堂曰不移,
사함(士涵)이 ‘죽원옹(竹園翁)’이라 자호하고 거처하는 당에 ‘불이’【사함이 누구의 자(字)인지 알 수 없다. ‘불이(不移)’는 사철 내내 푸른 대나무처럼 절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滕文公)」에 “빈천이 그의 절조를 변하게 할 수 없는[貧賤不能移]”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라 편액을 걸고서
請余序之.
나에게 서문을 지어주길 청했다.
余嘗登其軒, 而涉其園, 則不見一挺之竹.
내가 일찍이 마루에 올라 정원을 거닐었지만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지 못했었다.
余顧而笑曰: “是所謂無何鄕烏有先生之家耶?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말했던 무하향【무하향(無何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莊子』 「逍遙遊」】의 오유선생의 집인가?
이름이란 실제의 손님이니 내가 장차 손님이 되라는 것인가?【『장자』 소요유에서 요(堯) 임금이 은자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고찰하는 명실론(名實論)은 묵가(墨家) 등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름이 실질의 손님이란 말은, 이름이 실질에 대해 종속적ㆍ부차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士涵憮然爲間曰: “聊自寓意耳.”
사함이 무안해하며 뜸을 들이다가 “장난삼아 스스로 농지거리했을 뿐이네.”라고 말했다.
원령, 측백나무를 그려달란 부탁에 설부를 써서 주다
余笑曰: “無傷也. 吾將爲子實之也.
내가 웃으며 말했다. “기분 나빠 말게. 내가 장차 자네를 위해 실제를 갖출 테니.
曩李學士功甫, 閒居爲梅花詩,
접때에 학사 이공보(李功甫)【이공보(李功甫): 이양천(李亮天, 1716~1755)으로, 공보는 그의 자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므로 학사라 칭한 것이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권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께서 한가하게 지내며 매화시를 짓고
得沈董玄墨梅以弁軸.
화가 심사정(沈師正)【심동현(沈董玄): 화가 심사정(沈師正, 1707~1769)으로, 동현은 그의 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畫業)에 정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훼(花卉)ㆍ초충(草蟲)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어 시축(詩軸)에 화제(畫題)를 얹었다네.
因笑謂余曰: ‘甚矣! 沈之爲畵也.
그러고선 웃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네. ‘심하구나. 심사정이 그린 그림이여.
能肖物而已矣.’
실물을 닮게만 했을 뿐이니.’
余惑之曰: ‘爲畵而肖, 良工也.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해서 말했다. ‘그려 닮게 했다면 솜씨 좋은 화공일 것입니다.
學士何笑爲?’
학사께선 어째서 웃는 것입니까?’
曰: ‘有之矣. 吾初與李元靈遊,
학사께서 말씀하셨지. ‘있지. 내가 처음에 이원령(李元靈)【이원령(李元靈): 화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으로, 원령은 그의 자이다. 호는 능호(凌壺)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ㆍ서ㆍ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과 교유할 때
嘗遣絹一本, 請畵孔明廟柏.
일찍이 비단 한 벌을 보내어 제갈공명 사당의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 청하니【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에 “촉 나라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울창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였다. 여기에서 측백나무는 변치 않는 제갈공명의 절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두보의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元靈良久, 以古篆書「雪賦」以還.
원령(元靈)이 잠시 있다가 전서로 「설부(雪賦)」【설부(雪賦): 진(晉) 사혜련(謝惠連, 397~433)이 지은 부(賦)의 제목이다.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양원(梁園)이라는 호사스러운 원림(園林)에서 당대의 문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시를 주고받았던 고사를 노래하였다. -『文選』 卷14 「雪賦」】를 써서 돌려보냈네.
吾得篆且喜, 益促其畵,
내가 전서를 얻고 기뻐하며 더욱 그려주길 재촉하니
元靈笑曰: ‘子未喩耶? 昔已往矣.’
원령이 웃으며 ‘그대 아직 모르나? 옛날에 이미 보냈네 그려.’라고 말했지.
余驚曰: ‘昔者來, 乃篆書「雪賦」耳.
내가 놀라서 말했지 ‘옛날에 온 것은 곧 전서의 「설부」일 뿐이네.
子豈忘之耶?’
그대는 아마도 그걸 잊은 듯 하이.’
元靈笑曰: ‘柏在其中矣.
원령이 웃으며 말했네. ‘측백나무는 그 가운데 있었네.
夫風霜刻厲, 而其有能不變者耶?
대저 바람과 서리가 심하고 매서운데도 변할 수 없는 게 있던가.
子欲見柏, 則求之於雪矣.’
그대가 측백나무를 보고자 했다면 눈 속에서 구해야 할 걸세.’
余乃笑應曰: ‘求畵而爲篆,
내가 곧 웃으며 응답했네. ‘그림을 구했지만 전서를 써주고
見雪而思不變, 則於柏遠矣.
눈을 보고서 변치 말길 생각하라 한다면 측백나무와는 거리가 멀구려.
그대가 도를 실천하는 것이 너무나 먼 게 아닌가【『중용(中庸)』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중용장구』 제 13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힘든 일에서 도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이다】.’
유배 가며 측백나무를 만나다
旣而, 余言事得罪, 圍籬黑山島中.
이윽고 나는 상소를 올린 것【언사(言事): 나랏일에 관한 상소】으로 죄를 얻어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지【실록에 의하면 영조 28년(1752) 10월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이듬해 6월 위리(圍籬)가 철거되고 육지로 나왔으나, 영조 31년(1755)에야 관직에 복귀했다가 이내 사망했다】.
嘗一日一夜, 疾馳七百里,
일찍이 하루 동안에 700리를 잽싸게 달렸는데
道路傳言, 金吾郞且至, 有後命.
길에서 전하는 말에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또한 도착하여 사약을 내릴 거라 하니【후명(後命): 유배형을 받은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僮僕驚怖啼泣.
하인들이 놀라 눈물을 떨궜다네.
時天寒雨雪, 其落木崩崖,
그때 날은 차고 비와 눈이 내려 낙엽들과 무너진 벼랑이
嵯砑虧蔽, 一望無垠.
들쭉날쭉 이지러지고 가려져 한 번 바라보면 끝이 없었지.
而岩前老樹倒垂枝, 若枯竹.
바위 앞 늙은 나무의 거꾸러진 가지가 드리워졌는데 마른 대나무 같았지.
余方立馬披蓑, 遙指稱奇曰:
나는 곧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다 멀리 가리키며 기이함을 칭송하며 말했네.
‘此豈元靈古篆樹耶?’
‘이것이 아마도 원령이 전서로 쓴 나무이리라.’
이사함, 극도의 공포감 속에 오늘 밤 날 걸 생각하다
旣在籬中, 瘴霧昏昏,
이미 위리안치된 중에 촉촉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창기(瘴氣)의 안개로 어둑어둑한데
蝮蛇蜈蚣, 糾結枕茵,
독사와 지네가 베개나 자리에 엉겨
爲害不測.
피해는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네.
一夜大風振海, 如作霹靂,
어느 날 저녁 거센 바람이 바다를 진동하니 벼락이 치는 것 같아
從人皆奪魄嘔眩.
머슴들은 모두 넋이 나가 어지러워했지.
余作歌曰: ‘南海珊瑚折奈何, 秪恐今宵玉樓寒.’
나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네.
南海珊瑚折奈何 | 남해의 산호 꺽은 들 어쩌리오. |
秪恐今宵玉樓寒 | 다만 오늘밤 옥루【옥루(玉樓): 상제(上帝)가 산다는 곳인데, 여기서는 궁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임금께서 평안하신지 염려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걸작으로 알려져, 그의 벗 이윤영(李胤永)이 지은 만시(輓詩)에도 인용되었다. -『丹陵遺稿』 卷10 「挽功甫」】 찰까 걱정인걸 |
元靈書報, ‘近得珊瑚曲,
원령이 편지를 써서 답했네. ‘근래에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니,
婉而不傷, 無怨悔之意,
말이 완곡하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아 원망하고 후회하는 뜻이 없으니,
庶幾其能處患也.
거의 환란을 대처할 수 있겠습니다.
曩時足下嘗求畵柏,
지난날 족하께서 일찍이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 요구했는데,
而足下亦可謂善爲畵耳.
족하께서 또한 잘 그린다고 할 수 있을 뿐이오.
足下去後, 柏數十本, 留在京師,
족하께서 떠난 후로 측백나무를 그린 그림 수십 본이 서울에 남아 있는데
皆曺吏輩, 禿筆傳寫.
모두 도화서 화원들【조리(曹吏):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이 해진 붓【독필(禿筆): 예리하지 못한 붓이라는 뜻으로, 그림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으로 베낀 것입니다.
然其勁榦直氣, 凜然不可犯.
그러나 강직한 줄기와 곧은 기상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고
而枝葉扶疎, 何其盛也?’
가지와 잎은 엉성함을 보충하니 얼마나 성대하던지요.’
余不覺失笑曰: ‘元靈可謂沒骨圖.’
나도 모르게 실소하며 ‘원령은 몰골도(沒骨圖)【몰골도(沒骨圖): 붓으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하는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이른다. 몰골도에는 붓 자국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인상이 편지에서, 화원들이 모방한 측백나무 그림이 사이비(似而非)임을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은근히 풍자했다는 뜻이다】라 할 만하구나.’라고 말했네.
由是觀之, 善畵不在肖其物而已.’
이런 내용으로 보자면 잘 그린 그림은 실물을 닮게 하는 데 있지 않을 뿐이네.’
余亦笑.
나는 또한 웃었다.
꿋꿋한 절개로 대나무 같이 산 이학사
旣而, 學士歿, 余爲編其詩文,
이윽고 학사가 돌아가시자 나는 시와 문을 편집하다가
得其在謫中所與兄書.
위리안치 중에 형에게 보낸 편지를 얻었지.
以爲‘近接某人書,
그 편지에선 말했다.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보니,
欲爲吾求解於當塗者,
나를 위해 요직을 맡은 이에게 해결【실록에 의하면 영조 29년(1753) 3월과 4월에 언관(言官)들이 이양천의 해배(解配)를 건의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개적인 노력 말고도, 이양천의 벗들 중에 당시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을 요구한다 하였는데
何待我薄也.
어째서 나를 대함이 얍삽한 것입니까.
雖腐死海中, 吾不爲也.’
비록 썩고 병든 바다 가에 있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吾持書傷歎曰: ‘李學士眞雪中柏耳.
나는 편지를 잡고서 격정적으로 탄식하며 말했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 측백나무일 뿐이구나.
선비란 곤궁해진 후에야 평소의 지조가 드러나네.
患害愍厄而不改其操,
재해를 근심하고 곤액을 조심하되 지조를 고치지 않고
高孤特立而不屈其志者,
고고하게 주관있게 서서 지조를 굽히지 않는 것이
豈非可見於歲寒者耶?’
어찌 계절이 추워져서야 드러나는 게 아니리오.’
今吾士涵, 性愛竹.
지금 우리의 사함은 성품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嗚呼, 士涵其眞知竹者耶?
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歲寒然後, 吾且登君之軒,
계절이 추워진 후에 나는 또한 그대의 마루에 올라
而涉君之園, 看竹於雪中, 可乎? 『燕巖集』 卷之三
그대의 정원을 거닐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으리라.
인용
3. 위급한 위리안치 중에도 임금을 걱정한 이양천의 절개
4.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보면 눈 속 잣나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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