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후세에 남겨지길 바라는 꺾이지 않는 바람을 지닌 김홍연의 이야기
발승암기(髮僧菴記)
박지원(朴趾源)
금강산을 유람하다 새겨진 이름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다
余東遊楓嶽. 入其洞門, 已見古今人題名, 大書深刻, 殆無片隙, 如觀場疊肩, 郊阡叢墳. 舊刻纔沒苔蘚, 新題又煥丹硃.
至崩崖裂石, 削立千仞, 上絶飛鳥之影, 而獨有金弘淵三字. 余固心異之曰: “古來觀察使之威, 足以死生人, 楊蓬萊之耽奇, 足跡無所不到, 猶未能置名此間. 彼題名者誰耶? 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
어느 산에 가도 있던 그 이름, 왜 이리 반갑던지
其後余遊歷方內名山, 南登俗離ㆍ伽倻, 西登天摩ㆍ妙香. 所至僻奧, 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 然常得金所題. 輒發憤罵曰: “何物弘淵, 敢爾唐突耶?”
大凡好遊名山者, 非犯至危排衆難, 亦不得搜奇探勝. 余平居追思往䠱, 未甞不慄然自悔也. 然而復當登臨, 猶忽宿戒, 履巉巖, 俯幽深, 側身于朽棧枯梯, 往往默禱神明, 惴惴然尙恐其不能自還. 而大字硃塡, 如鹿脛之大, 隱約盤挐於老槎壽藤之間者, 必金弘淵也. 乃反欣然如逢舊識於險阨危困之際, 爲之出力而扳援先後之也.
왈짜 김홍연의 내력
或有素知金行跡爲道, 金乃濶者, 葢閭里間浪蕩迂濶之稱, 如所謂釖士俠客之流.
方其少年時, 善騎射, 中武科, 能力扼虎, 挾兩妓, 超越數仞牆, 不肯碌碌求仕進, 家本富厚, 用財如糞土, 傍蓄古今法書名畵, 劒琴彛器, 奇花異卉, 遇一可意, 不惜千金, 駿馬名鷹, 動在左右.
今旣老白首, 則囊置錐鑿, 遍遊名山, 已一入漢挐, 再登長白, 輒手自刻石, 使後世知有是人云.
바위에 이름 새긴 것의 허망함
余問: “是人爲誰?” 曰: “金弘淵.” “所謂金弘淵爲誰?” 曰: “字大深.” 曰: “大深者誰歟?” 曰: “是自號髮僧菴.”
“所謂髮僧菴誰歟?” 談者無以應, 則余笑曰: “昔長卿設無是公烏有先生以相難, 今吾與子, 偶然相遇於古壁流水之間, 相答問焉. 他日相思, 皆烏有先生也, 安有所謂髮僧菴者乎?”
客勃然怒於色曰: “吾豈謊辭而假設哉? 果眞有是人也.”
余大笑曰: “君太執拗. 昔王介甫辨「劇秦美新」, 必谷子雲所著, 非楊子雲, 蘇子瞻曰: ‘未知西京果有楊子雲否也.’ 夫二子之文章, 烟蔚當世, 流名史傳, 而後之尙論者, 猶有此疑, 而况寄空名於深山窮壑之中, 而風消雨泐, 不百年而磨滅者乎?” 客亦大笑而去.
노쇠한 김홍연은 여전히 이름이 후세에 남겨지길 바라네
其後九年, 余遇金平壤, 有背指者, 此金弘淵也. 余字呼曰: “大深, 君豈非髮僧菴耶?” 金君回顧熟視曰: “子何以知我?” 余應之曰: “舊已識君於萬瀑洞中矣. 君家何在? 頗存舊時所蓄否?” 金君憮然曰: “家貧賣之盡矣.” “何謂髮僧菴?” 曰: “不幸殘疾形毁, 年老無妻, 居止常依佛舍, 故稱焉.” 察其言談擧止, 舊日習氣猶有存者. 惜乎! 吾未見其少壯時也.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且爲之說偈曰: “烏信百鳥黑, 鷺訝他不白. 白黑各自是, 天應厭訟獄. 人皆兩目俱, 矉一目亦覩. 何必雙後明, 亦有一目國. 兩目猶嫌小, 還有眼添額. 復有觀音佛, 變相目千隻. 千目更何有, 瞽者亦觀黑. 金君廢疾人, 依佛以存身. 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 大深旣異衆, 以玆相訝惑.” 『燕巖集』 卷之一
해석
금강산을 유람하다 새겨진 이름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다
余東遊楓嶽.
내가 동쪽으로 풍악산【『과정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에 유언호ㆍ신광온(申光蘊) 등의 벗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것으로 되어 있다】을 유람했었다.
入其洞門, 已見古今人題名,
골짜기의 문에 들어가니 이미 예나 지금의 사람이 이름을 새겼는데
大書深刻, 殆無片隙,
큰 글씨에 깊이 파고들어가 거의 조그마한 틈도 없었으니,
如觀場疊肩, 郊阡叢墳.
장터에 보러 나와 어깨가 부딪히거나 교외에 솟은 무덤들이 빽빽한 거 같았다.
舊刻纔沒苔蘚, 新題又煥丹硃.
옛날에 새긴 건 겨우 이끼에 파묻혀 있었지만 새로 새긴 건 또한 주사【주사(朱砂): ‘단사(丹砂)’라고도 하는데, 붉은색의 염료다. 부적이나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한다. 명승지 같은 데 가면 바위에 이름을 새긴 뒤 붉은색을 칠해 놓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붉은색이 바로 주사이다】가 빛났다.
至崩崖裂石, 削立千仞,
무너진 벼랑과 갈라진 바위가 깎아져 천 길이나 서 있는 곳에 이르니
上絶飛鳥之影, 而獨有金弘淵三字.
위로 날던 새의 그림자도 없지만 유독 ‘김홍연(金弘淵)’ 세 글자만이 있었다.
余固心異之曰:
내가 짐짓 마음으로 그걸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古來觀察使之威, 足以死生人,
“예로부터 관찰사의 위엄은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할 수도 있는데
楊蓬萊之耽奇, 足跡無所不到,
양봉래는 기이한 걸 즐겨【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을 말한다. ‘봉래’는 그 호다. 큰 글씨의 초서를 잘 썼으며, 산수에 노니는 것을 몹시 좋아한 인물로 유명하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을 유람하며 만폭동(萬瀑洞) 바위에다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여덟 자를 새겼다는 일화를 널리 알려져 있다】 발걸음으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猶未能置名此間.
오히려 이런 사이에 이름을 새길 수는 없었다.
彼題名者誰耶?
저 이름을 새긴 사람은 누구인가?
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
이에 석공이 날다람쥐와 원숭이와 함께 성명을 다툴 만하구나.”
어느 산에 가도 있던 그 이름, 왜 이리 반갑던지
其後余遊歷方內名山,
그 후로 나는 우리나라 명산을 두루 다녔으니
南登俗離ㆍ伽倻, 西登天摩ㆍ妙香.
남쪽으론 속리산과 가야산에 올랐고 서쪽으론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다【연암은 35세 때인 1771년(영조 47) 과거(科擧)를 포기한 후 송도와 평양을 유람하며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속리산, 가야산, 화양동(華陽洞), 단양 등지를 유람하였다. 연암이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을 답사하여 그곳을 은거지로 정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所至僻奧, 自謂能窮世人之所不能到,
후미진 곳에 이르러 스스로 ‘곤궁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然常得金所題.
항상 김홍연이 새긴 것을 볼 수 있었다.
輒發憤罵曰: “何物弘淵, 敢爾唐突耶?”
갑자기 화를 내며 “김홍연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감히 이처럼 당돌한가?”라고 말했다.
大凡好遊名山者, 非犯至危排衆難,
대체로 명산을 유람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위험한 것을 행하고 뭇 어려움을 맞닥뜨리지 않으면
亦不得搜奇探勝.
또한 기이한 곳을 찾고 명승지를 탐색할 수가 없다.
余平居追思往䠱,
나는 평소에 걸은 족적을 추억하며 생각해보면
未甞不慄然自悔也.
일찍이 겁이 나 스스로 뉘우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然而復當登臨, 猶忽宿戒,
그러나 다시 마땅히 오르게 되면 오히려 묵은 경계를 소홀히 하여
履巉巖, 俯幽深,
깎아지른 바위를 밟고 무척 깊은 곳을 굽어보며
側身于朽棧枯梯, 往往默禱神明,
몸을 썩은 잔도【잔도(棧道): 발을 붙일 수 없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하여 낸 길을 말한다】와 마른 사다리를 타며 이따금 묵묵히 신명에게 빌어
惴惴然尙恐其不能自還.
벌벌 떨며 오히려 스스로 돌아갈 수 없을까 걱정했다.
而大字硃塡, 如鹿脛之大,
그러나 붉은 색 큰 글자가 채워져 있으니 사슴의 큰 종아리 같아
隱約盤挐於老槎壽藤之間者, 必金弘淵也.
은밀하게 늙은 나무와 오래된 등나무 사이에 서려 있으니, 반드시 ‘김홍연’이었다.
乃反欣然如逢舊識於險阨危困之際,
이에 도리어 옛 지인을 위험하고 곤란한 지경에서 만난 듯 기뻐
爲之出力而扳援先後之也.
이 때문에 힘을 내어 잡거나 끌어당기며 앞서거니 뒤서기니 갈 수 있었다.
왈짜 김홍연의 내력
或有素知金行跡爲道, 金乃濶者,
혹자가 평소에 김홍연의 행적을 알아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홍연은 곧 왈짜【왈짜[濶者]: 허랑방탕한 짓을 일삼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거나, 각종 유흥으로 소일하거나, 협객으로 행세하면서 당시의 도시 공간에 독특한 존재 방식을 구축하였다. 조선 후기에 상업자본과 도시의 발달에 따라 유흥 공간이 생성ㆍ확장되면서 이런 유의 인간이 서식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왈짜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인 「왈짜타령」이 유명하다. 당시 무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자리를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을 ‘선달’이라고 불렀는데, 김홍연이 이에 해당된다. 김택영의 『소호당집(韶濩堂集)』에 실려 있는 「김홍연전(金弘淵傳)」에 의하면, 김홍연은 원래 개성의 부유한 양반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서보다는 기방(妓房)에 출입하는 걸 더 좋아했던 듯하고, 자식의 이런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의 부친은 그로 하여금 무과에 응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김홍연은 끝내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해 집안의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김홍연은 원래 출신은 양반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협객의 부류였다고 생각된다】인데,
葢閭里間浪蕩迂濶之稱,
왈짜란 대체로 마을에서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如所謂釖士俠客之流.
소위 검을 다루는 무사나 협객의 부류 같은 경우다.
方其少年時, 善騎射,
곧 어렸을 적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中武科, 能力扼虎,
무과에 급제했으며 힘은 호랑이를 잡을 만했고
挾兩妓, 超越數仞牆,
두 명의 기생을 끼고 몇 길이의 담장을 뛰어 넘을 수 있으며
不肯碌碌求仕進,
고집스레 벼슬자리 구해 나가는 걸 좋아하질 않았고
家本富厚, 用財如糞土,
집은 본래 부유하고 넉넉해 재물 쓰길 흔한 썩은 흙 쓰듯 했으며
傍蓄古今法書名畵, 劒琴彛器, 奇花異卉,
곁엔 고금의 법서【법서(法書): 습자의 본보기나 감상용으로 쓰기 위해 선인의 글씨를 그대로 베낀 책】와 명화, 검과 거문고와 청자, 기이한 꽃을 모았고
遇一可意, 不惜千金,
뜻에 괜찮은 물건을 만나면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며
駿馬名鷹, 動在左右.
천리마와 이름난 매는 움직일 때마다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今旣老白首, 則囊置錐鑿, 遍遊名山,
지금은 이미 늙고 흰 머리가 나 주머니에 송곳과 정을 넣고 명산을 두루 다니니,
已一入漢挐, 再登長白,
이미 한라산엔 한 번 올랐고 두 번 백두산(장백산)에 올라
輒手自刻石,
갑자기 손으로 스스로 바위에 새겨
使後世知有是人云.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게 하려 한다고 하더라.
바위에 이름 새긴 것의 허망함
余問: “是人爲誰?” 曰: “金弘淵.”
내가 “이 사람은 누군가?”라고 물으니 “김홍연”이라 대답했다.
“所謂金弘淵爲誰?” 曰: “字大深.”
내가 “소위 김홍연이란 누구를 말하는가?”라고 물으니 “자(字)가 대심(大深)이오.”라고 대답했다.
曰: “大深者誰歟?” 曰: “是自號髮僧菴.”
내가 “대심이란 사람은 누군가?”라고 물으니, “이 사람은 ‘발승암(髮僧菴)’이라 자호했다.”라고 대답했다.
“所謂髮僧菴誰歟?” 談者無以應,
내가 “소위 발승암이란 누군가?”라고 말하니 말하던 사람이 응답하질 않아,
則余笑曰:
내가 웃으며 말했다.
“昔長卿設無是公烏有先生以相難,
“옛날에 장경 사마상여가 ‘무시(無是, 없다)’공과 ‘오유(烏有, 어찌 있으랴)’선생을 설정해 서로 논란케 했는데【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 한(漢)나라 초기의 저명한 문장가다. 특히 ‘부(賦)’라는 장르의 글을 잘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무제(武帝)에게 「사냥[游獵賦]」이라는 제목의 ‘부’를 바친 적이 있다. 이 글은 허구적인 인물인 ‘없다’라는 님과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의 문답을 통해, 임금이 동산을 화려하게 꾸며 거기서 사냥을 즐기는 일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없다’라는 님이 ‘무시공(無是公)’으로 되어 있고, ‘있을 리가 있나’라는 선생이 ‘오유선생(烏有先生)’으로 되어 있다. ‘무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뜻이며, ‘오유’는 ‘어찌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今吾與子, 偶然相遇於古壁流水之間,
이제 나와 그대가 우연히 서로 옛 절벽의 흐르는 물가 사이에서 만나
相答問焉.
서로 묻고 답하고 있네.
他日相思, 皆烏有先生也,
다른 날 생각해보면 모두가 오유선생일 테니
安有所謂髮僧菴者乎?”
어찌 소위 발승암이란 사람이 있겠는가?”
客勃然怒於色曰: “吾豈謊辭而假設哉?
나그네가 발끈하며 얼굴에 노기를 띠더니 말했다. “내가 어찌 허무맹랑한 말을 하고 거짓말 하리오.
果眞有是人也.”
과연 진짜로 이 사람은 있다네.”
余大笑曰: “君太執拗.
내가 크게 웃고서 말했다. “그대가 너무 집요하구만.
昔王介甫辨「劇秦美新」,
옛날에 왕개보【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송나라 신종(神宗)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문장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신법(新法)을 통해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확보 등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는 기존의 유학자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양웅(揚雄)에 대해서도 보통의 유학자들과 달리 그 행위와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가 「진나라를 비판하고 신나라를 찬미하다」【「진(秦)나라를 비판하고 신(新)나라를 찬미함[劇秦美新]」: 진나라를 비판하고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찬미한 글인데, 양웅이 신나라를 세운 왕망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양웅이 지은 것이 아니고 양웅과 동시대의 인물인 곡자운(谷子雲)이 지었다고 한다】라는 글을 변론하며
必谷子雲所著, 非楊子雲,
반드시 곡자운【곡자운(谷子雲): 곡영(谷永)을 말한다. ‘자운(子雲)’은 그 자다.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 등 겅젼 해석과 관련된 저작 외에 성제의 사치를 풍자한 부(賦)를 남기기도 하였다. 왕망이 정권을 찬탈해 신나라를 세우자 이를 찬미하는 문장을 써서 후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문장을 쓴 적이 없다는 설도 있다】이 저술한 것이지 양자운이 저술한 건 아니라고 했고
蘇子瞻曰: ‘未知西京果有楊子雲否也.’
소자첨【소동파(蘇東坡)는 소식(蘇軾, 1036~1101)을 말한다. ‘동파’는 그 호다. 소순(蘇洵)의 아들이자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린다. 촉(蜀) 사람으로,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으로 지목되어 지방관으로 전출되었고, 나중에는 해남도(海南島)로 유배되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며,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했다】은 ‘서경【서경(西京): 서한(西漢)의 수도인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한편 동한(東漢) 때의 도읍인 낙양(洛陽)은 동경(東京)이라고 부른다】에 과연 양자운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했네.
夫二子之文章, 烟蔚當世, 流名史傳,
대저 곡자운과 양자운의 문장은 당세에 훤히 빛나 사전(史傳)에 이름이 전해지나
而後之尙論者, 猶有此疑,
후대에 옛 사람을 평론한【상론(尙論): 옛사람의 일을 평론함】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의심이 있는데
而况寄空名於深山窮壑之中,
하물며 부질없는 이름을 깊은 산과 외진 골짜기 속에 새겨
而風消雨泐, 不百年而磨滅者乎?”
바람에 사라지고 비에 깎여 100년도 안 되어 사라져 없어질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客亦大笑而去.
나그네는 또한 크게 웃으며 떠났다.
노쇠한 김홍연은 여전히 이름이 후세에 남겨지길 바라네
其後九年, 余遇金平壤,
그 후 9년이 흘러【앞 단락의 명산 유람시기를 고려하면 1779년경이 된다. 연암은 1778년 홍국영을 피해 연암협으로 이거(移去)했다. 그리고 1780년 5월에 연행을 떠나 같은 해 10월에 귀국한 후 서울과 연암협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열하일기』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김홍연을 평양에서 만났는데
有背指者, 此金弘淵也.
등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김홍연이예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余字呼曰: “大深, 君豈非髮僧菴耶?”
내가 자(字)를 부르며 “대심! 그대는 아마 발승암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金君回顧熟視曰: “子何以知我?”
김군은 고개를 돌려 노려보다가 “그대는 어찌 저를 아십니까?”라고 말했다.
余應之曰: “舊已識君於萬瀑洞中矣.
내가 응답했다. “옛날에 이미 그대를 만폭동에서 알게 됐습니다.
君家何在? 頗存舊時所蓄否?”
그대의 집은 어디입니까? 매우 옛날에 모은 것들이 그대로 있습니까?”
金君憮然曰: “家貧賣之盡矣.”
김군이 무안해하며 “집이 가난하여 다 팔았지요.”라고 말했다.
“何謂髮僧菴?”
내가 “무엇 때문에 발승암이라 합니까?”라고 물었다.
曰: “不幸殘疾形毁, 年老無妻,
대답했다. “불행히 지병으로 몸이 아프고 늙었는데도【김홍연은 노년에 이르러 한쪽 눈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던 듯하다. 김홍연은 혹 천연두를 앓았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천연두에 걸리면, 죽지 않고 살아난다 할지라도 얼굴이 몹시 얽게 되고 또 실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실명한 사람의 대부분은 바로 이 천연두 때문이었다】 아내는 없어
居止常依佛舍, 故稱焉.”
행동거지를 항상 절에 의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察其言談擧止, 舊日習氣猶有存者.
말과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옛날의 습관이 아직 남이 있었다.
惜乎! 吾未見其少壯時也.
애석하구나! 내가 그가 젊고 건강할 때에 보지 못한 것이.
一日詣余寓邸而請曰:
하루는 내가 붙어 사는 집에 와서 요청했다.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저는 이제 노쇠하여 죽을 텐데 마음은 먼저 죽었고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다만 모발만 남아 있을 뿐이고 거처하는 곳은 절의 암자입니다.
願托子文而傳焉.”
원컨대 그대의 문장에 의탁하여 후세에 전해졌으면 합니다.”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나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뜻이 늙었음에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게 서글퍼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마침내 옛날에 함께 유람하던 나그네와 문답하던 것을 써서 보내줬고
且爲之說偈曰: “烏信百鳥黑, 鷺訝他不白. 白黑各自是, 天應厭訟獄. 人皆兩目俱, 矉一目亦覩. 何必雙後明, 亦有一目國. 兩目猶嫌小, 還有眼添額. 復有觀音佛, 變相目千隻. 千目更何有, 瞽者亦觀黑. 金君廢疾人, 依佛以存身. 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 大深旣異衆, 以玆相訝惑.” 『燕巖集』 卷之一
또한 그를 위해 게송【게(偈):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송(頌)’이라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 ‘게송(偈頌)’이라고도 한다. 부처를 찬양하거나 깨달음을 읊은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연암이 김홍연을 위로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이 ‘게’의 형식을 끌어다 썼다. ‘게’의 창조적 전용(轉用)이라 이를 만하다】을 말하니 다음과 같다.
烏信百鳥黑 鷺訝他不白 | 까마귀는 온 새가 검다고 믿고 해오라기는 다른 새가 희지 않다 의아해한다. |
白黑各自是 天應厭訟獄 | 흑백이 각각 스스로 옳다하는데 하늘은 응당 송사를 싫어한다네. |
人皆兩目俱 矉一目亦覩 | 사람은 모두 두 눈을 갖고 있으나 한 눈을 감아도 또한 보이지. |
何必雙後明 亦有一目國 | 하필 두 눈이 있어야 분명하랴? 또한 한 눈을 가진 나라도 있다지【『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눈이 하나뿐인 사람들만 사는 일목국(一目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연암은 중국 고대의 책인 『산해경(山海經)』을 읽은 바 있다】. |
兩目猶嫌小 還有眼添額 | 두 눈도 오히려 작다고 싫어하여 도리어 이마에 눈을 더하기도 하네【『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는 삼안인(三眼人)이 나온다】. |
復有觀音佛 變相目千隻 | 다시 관음보살【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이름이다. 그는 여러 중생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화신(化身)의 하나인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손이 천 개이고 눈이 천 개인 관세음보살)을 지칭한다. 천 개의 눈[千眼]은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을 상징하고, 천 개의 손[千手]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이 있어 모습을 변화시켜 눈이 1000개라지. |
千目更何有 瞽者亦觀黑 | 1000개의 눈은 다시 무엇하랴? 봉사도 또한 검은색 보는데. |
金君廢疾人 依佛以存身 | 김군은 병 걸린 사람으로 부타에 의지해 몸을 보존한다네. |
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 돈을 쌓고서 만약 쓰지 않는다면 어찌 거지로 가난한 것과 다르랴. |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 | 중생은 각각 자득하였으니 반드시 억지로 서로 배울 건 없네. |
大深旣異衆 以玆相訝惑 | 대심은 이미 다른 사람과 다르니 이 때문에 서로 의아해하고 미혹해하는 거지. |
인용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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