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이다.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의 등록(謄錄) 그리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였고, 문집ㆍ일기ㆍ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편찬 과정은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한 자료를 뽑아 작성하는 초초(初草), 그리고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하는 중초(中草),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ㆍ첨삭을 하여 완성하는 정초(正草)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복잡하고 엄정한 절차로 만들어진 『실록』에 흥미롭게도 임금들의 속언 사용이 빈번히 보인다.
연산군실록의 속언
『연산군실록』에 기록된 속언은 모두 9건인데, 그것들은 모두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을 깰까 못한다[投鼠忌器]’라는 중국 기원의 속언을 사용한 것이었다. 또 4건이 기록된 세종도 ‘투서기기(投鼠忌器)’가 2회, ‘우리나라의 법은 삼일이면 없었던 것으로 된다[我國之法, 三日而廢]’는 속언이 1회, ‘임금은 항상 깊은 궁 안에 있으므로 바깥사람과 서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 만약 대낮에 밖에 나오면 그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人君長在深宮, 不令外人相見可矣. 若於白日出外, 則其國有凶.]’는 고언(古諺)이 1회 사용되었다.
영조의 파격적인 언어생활
조선의 임금 가운데 52년의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영조가 가장 많은 속언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됨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가 사용한 속언 가운데는 일국의 지존으로서 입에 담기 어려운 비속한 것, 예를 들어 ‘네 똥을 먹고 천 년을 사느냐[食汝糞而生千年乎]’와 같은 속언을 신하들 앞에서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니 똥 먹고 천년 사나 내 똥 먹고 만년 산다’가 원형이다. 그가 이 속언을 쓴 배경은, 당시의 사직(司直) 조영순(趙榮順)이 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 등에게 관작을 회복시킨 일에 대하여 인의(引義)하고 스스로 고귀(告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보던 영조가 조영순을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지우게 하자 신하들이 그를 옹호한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고 탕제의 복용을 간청하자 영조가 위의 속언을 인용하며 불편한 심사와 노골적인 비아냥을 속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承政院日記』, 영조 48년 11월 22일(癸丑) ; 영조실록 卷119, 48년(1772) 11월 19일(경술)3번째 기사 참조.】.
또 영조는 탕평정치가 주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붕당을 이루어 서로 파괴적인 비방과 무고를 일삼는 신하들에게 그러한 행태를 중지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종용할 때도 속언을 활용하였다.
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문(斯文)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더니, 지금에는 한편의 사람을 모조리 역당(逆黨)으로 몰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역시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한편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을 리가 있겠는가? 각박하고 또 심각해져서 유배되었다가 다시 찬축(竄逐)되었으니, 그 가운데 어찌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가?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어도 5월에 서리가 내리는데, 더구나 한편의 여러 신하들을 모조리 제도(諸道)에 물리치는 일이겠는가?
朋黨之弊, 未有甚於近日. 初以斯文 起鬧, 今則一邊之人, 盡驅之於逆黨. 三人行亦有賢、不肖, 豈有一邊人同一套之理? 刻而又深, 流而復竄, 其中豈無抱冤之人乎? 一婦含冤, 五月飛霜. 況一邊諸臣, 盡逬於諸道者耶?
…… 피차가 서로를 공격하여 공언(公言)이 막히고 역당으로 지목하면 옥석이 구분되지 않을 것이니, 저들이 나를 공격하는 데 장차 가려서 하겠는가,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 충직한 사람을 뒤섞어 거론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는 나의 말이다. 이는 바로 속언에서 말하는 ‘입에서 나간 것이 귀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정이 언제 안정되며 공의(公議)가 언제 들리겠는가?
…… 彼攻此擊, 公言枳塞, 目以逆黨, 玉石不辨, 彼所攻我, 其將擇乎? 不擇乎? 混擧忠直之人, 幷驅罔測之科, 非彼之創也, 是我之言也. 此正諺所謂‘出乎口, 反乎耳’者也. 如此而朝著何時乎定, 公議何時乎聞? -『英祖實錄』 卷3, 영조 1년(1725) 1월 3일(壬寅) 2번째 기사.
영조는 숙종조에 있었던 사문난적의 시비에서부터 당색에 따라 충역을 구분하는 당시의 상황으로 억울한 신하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소모적인 당쟁의 폐해는 그것을 야기한 이들에게 결국 되돌아올 것이라는 훈계를 속언을 빌어 나타냈다.
속언으로 함경감사를 경계한 철종
철종도 함경감사 조득림(趙得林)이 하직 인사를 하자 그에게 “수령의 선악은 전적으로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다. 속언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이 흐리다.’ 했으니, 위에 있는 자가 정직하게 자신을 단속하면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며 속언을 인용하여 감사로서 모범적인 처신을 하도록 일깨웠다【『國朝寶鑑』 卷90, 철종조 4】.
정조, 옥사를 심사하며 속언을 쓰다
정조는 살인에 관한 옥사를 심사하여 판부할 때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실제 증거를 가지고 도둑을 잡아서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훈계를 속언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노장이 재물을 잃어버리고는 김남원금(金南原金)을 의심하여 밧줄로 묶고 주리를 틀었는데, 김남원금의 어미 황녀인(黃女人)이 와서 구하다가 떠밀려 21일 만에 죽었다.
[상처] 왼쪽 늑골이 검고 굳었다.
[실인] 떠밀린 것이다. 을묘년(1795, 정조19) 9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본도의 계사] 훔친 사실을 추궁하면서 몹시 노여워 혹 떠밀기는 했으나,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실낱같은 목숨이 저절로 다한 것이지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증도 명확하지 않으니 실정이나 자취로 볼 때 참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형조의 계사] 옥사의 실정은 실로 정상 참작하여 용서하는 것이 합당하니, 도신의 계사에서 이미 참작하여 처결하였다고 했습니다.
[판부] 함양의 죄수 노장과 성주(星州)의 죄수 강육손(姜六孫) 등은 도백이 이미 가벼운 쪽으로 처결하여 보낸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억지로 트집을 잡아 말하겠는가마는, 노장의 행위는 죽여도 아깝지 않다고 말할 만하다. 속언에 ‘뒤에 짊어진 짐을 보고 도적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감히 분명하지도 않은 떠도는 말을 듣고 평민을 함부로 의심하여 몇 명의 장정을 모아 한밤중에 명화적(明火賊)이 여염집에 들이치듯 쳐들어갔으며 사사로이 악형(惡刑)을 시행하여 흉포하고 패악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다 죽어가는 노파가 이 일로 인해 죽고 말았다. …… 안타깝다! 도백과 수령은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한 도를 맡아 다스리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살리는 사람이 도로 사람을 죽인다’는 의리를 완전히 소홀히 하여 도리어 절대로 살려 주어서는 안 될 옥사를 살려주는 쪽으로 처결하였으니, 이러한 도백과 수령을 어디에 쓰겠는가?
-『審理錄』 卷30, 정사년(1797) 3, 咸陽 盧嶂의 옥사.
정조는 『서경』에 나오는 성왕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정치적 재량권을 확대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왕은 ‘도덕적 모범자’이기보다는 정치와 외교는 물론 담력에 있어서도 비범한 정치가이자 적극적인 정치가였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정조는 “삼대 이후로 사도(師道)가 비록 땅에 떨어졌으나 예악과 형정은 군도(君道)가 비롯되는 바로서 다스리고 가르치는 뜻이 실로 같다. 그러니 오늘날 군사(君師)의 책임을 내가 감히 자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正祖, 『弘齋全書』 卷170, 日得錄 10.】”라고 하며 형정 역시 자신이 다스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심리록의 판부에서도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정순옥(2003), 정조의 법의식-심리록 판부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21권, 호남사학회, 56~58면. 참조】. 신민을 일깨우는 군사를 자처한 그였기에 어려운 용사보다는 민간에서 쓰이는 속언을 활용하여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그 의미를 일깨우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보고서에 속언을 사용한 허목
허목(許穆, 1595~1682)은 1650년에 정릉참봉으로 처음 출사하여 공조 정랑,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거쳐 장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상사 때 복상(服喪)의 잘못을 거론하는 상소를 올려 1660년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여에 걸친 그의 재직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는 기근이었다. 본래 다른 지역보다 척박하던 삼척 지역이 연이어 큰 흉년을 만났는데 허목이 부임하던 해에 심한 한재(旱災)를 입어 모내기를 반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모내기를 한 곳도 이삭이 패지 않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백성들의 참혹한 실정을 목도한 허목은 지방세를 감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민생구제에 힘을 기울였다【許穆, 記言 卷37, 乞山田免租狀 , 221면.】.
토지의 마땅함에 따라 생산되는 곡식이 같지 않으니, 예를 들면 중국의 청주(靑州)와 형주(荊州)에는 기장이 없고 기주(冀州) 북쪽에는 벼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없는 것을 요구하여 천하에 비축해 두는 곡물을 똑같게 한다면,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는 반드시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오곡을 기재해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두 곡물이 생산되지도 않으면서 백성의 병폐가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매년 원곡 이외에 비모(費耗)는 해마다 늘어나 원곡의 두 배, 다섯 배로 늘어나고, 천 배, 만 배로 늘어날 것이니, 곡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폐해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변통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는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유리걸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 것입니다. 비축된 것으로 말하면, 속언에 “쭉정이가 만 섬 가득해도 알곡 백 섬이나 열 섬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이 일이 바로 그 짝입니다.
土之所宜, 生穀不同, 如靑ㆍ荊無稷, 冀北無稻, 必責其所無以均天下之積儲, 則周官職方, 必不載九州五穀之所出, 今此二穀無產, 而爲民病者莫此之甚, 而年年元穀之外, 費耗歲增, 至於倍蓰, 至於千萬, 粟愈多而弊愈甚, 此不變通, 則其弊令民必至於流離, 以積儲言之, 諺曰: “虛殼滿萬, 不如實粒百十,” 與今日此事, 正相類也. -許穆, 記言 卷37, 陟州記事, 穄稷事申請粘移狀, 223면.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어 죽을 상황에서도 상평창에 비축된 기장을 대출받기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알곡이 적은 기장이 먹을 때는 실속이 없고 수확하여 갚을 때는 괴롭고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관련 속언을 예시하여 효과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민생 구제를 위한 보고서에도 속언이 사용되었다.
▲ 정조가원조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인용
1. 문제의 제기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2. 문학 창작의 재료로 활용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4) 변증 재료에의 활용
4.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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