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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의 수용 양상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영주 -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의 수용 양상

건방진방랑자 2022. 10. 22.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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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에 나타난 이속(俚俗) 수용 양상

속언(俗諺)을 중심으로

 

김영주(金英珠)

*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부교수 / 전자우편 : kyjkyj333@hanmail.net

 

 

국문초록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이속의 수용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한문학의 특화된 양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전시기에 걸치는 한문학의 다양한 양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주제어 : 俚俗, 俗諺, 실용성, 교훈성, 해학, 유희, 문학, 변증

 

 

1. 문제의 제기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속문학(俗文學)’의 개념을 대아지당(大雅之堂)에 오르지 못하고 학사대부들에게 중시되지 못한 채 민간에서 유행되며 대중에 의해 애호되던 문학으로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속문학에 광범위하게 시가(詩歌)民歌民謠初期詞曲, 희곡(戱曲), 소설(小說), 강창(講唱)變文諸宮調寶卷彈詞鼓詞 등을 포함시켰다. 이것은 구어와 문언의 간극이 심각하지 않은 중국의 언어적 특성에 기반하여 구어체를 주로 활용한 원()ㆍ명대(明代)의 희곡이나 소설, 강창 등을 주로 지칭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鄭篤(1965), 中國俗文學史 (), 臺灣 商務印書館, 1~2.

 

 

 

문단에 세속이 개입되는 걸 꺼려하는 풍조

 

우리나라는 민담, 전설, 설화, 속요, 속언, 속담 등을 한문으로 기록하였지만 그것들은 당대의 가치관에 근거한 선별의 과정을 거쳤다. 우리의 한문학은 그 형식이 그러하였듯이 내용면에서도 비교적 보수적이었고 폐쇄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초의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는 신라 때에 수사지업(修辭之業)이 생겼고 고려 말에 의리지학(義理之學)이 등장하였으며, 조선조의 홍유석학(鴻儒碩學)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서야 비로소 의리(義理)로 글을 지어 학문과 문장이 일치하는 문장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견지에서 수사나 의리의 일방에 경도되는 창작 경향을 비판하여 문장의 화려함을 추구하면 내실이 부족해지고 훈고(訓詁)와 어록(語錄)에 집중하면 글이 되지 못하여 마침내 서로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金允植, 雲養集卷10, 素山遺稿序, 395. 我東人文之闢, 才千餘年耳. 修辭之業, 始於羅季, 義理之學, 昉於麗末. 至于本朝, 聲明休彰, 鴻碩相望, 始以義理爲辭令, 學問文章粹然出于一道. 若專治詞章者, 雖工不齒也. 及其弊也, 尙文辭者, 長於雕繪紛澤而實不掩華, 主學問者習於訓詁 語錄而言之不文, 互相訾謷, 分爲二道.. 이와 같이 20세기까지도 한문을 매체로 하는 대다수의 문인지식인들의 문학에서는 여전히 도리(道理)와 문사(文辭)의 관계가 관건이었으며 ()’의 수용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조 때의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불리던 강세황(姜世晃, 1713~1791)도 대중적인 유행에 대해서는 몹시 천박한 일 즉 속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산수를 좋아하는 벽()보다 더하다고 할 정도로 세속적으로 전락한 산수유람의 실태를 비난하였다姜世晃, 豹菴稿卷4, 遊金剛山記, 373. 遊山是人間第一雅事, 而遊金剛, 爲第一俗惡事, 何也? 非謂金剛之不足遊也, 而金剛獨以海山仙區, 靈眞窟宅, 大擅一邦之名, 童兒婦女, 莫不自齠齔 而慣於耳而騰於舌. …… 今之販夫庸丐野婆村嫗, 踵相躡於東峽者, 彼惡知山之爲何物? …… 亦只隨衆逐隊, 以平生一遊爲能事, 向人誇張, 有若上淸都遊帝鄕, 其未曾遊者則歉愧如恐不能齒於恒人. 余之所憎厭謂之第一俗惡事者. 此也. 余於中歲, 或有人要偕遊此山者, 至於備糧費 而懇請不已者, 而余不欲一往, 盖憎俗之心, 有以勝於愛山之癖也. 사대부의 심신 수양 방법의 하나인 산수유람이 세속화, 대중화되는 것에도 증오심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던 것을 보면 문사에 ()’을 개입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우뚝하게 솟아난 홍길주의 논의

 

그러나 문장에 세속적인 것 즉 이속(俚俗) 또는 비속(鄙俗)한 것을 수용하자는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저작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속담(俗談) 중에 문장에 쓰일 만한 것이 매우 많은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문장에서 시속의 비리한 풍속이나 속언, 방언들을 수용하여 작품에 반영함으로써 절기(絶奇)한 문장을 창작하는 재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잡저의 문장에 속담을 사용한 적이 있으며, 속담은 이해력을 증진시키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洪吉周, 睡餘瀾筆58. 東諺可入文詞者甚多, 而無用之者. 如別人荳瓣大, 別人屍不如我微恙, 先喫後鬱鬱, 笞先受爲快, 胡桃殼蔫液不肯予人之類, 俱不害爲絶奇文料. 又如別人唱歌胡不聽, 到餘音而徑議其失腔, 好歌曲罕聆方好之類, 尤大有助於應世接人之際, 不獨可入文詞而已. 縛線 針腰, 驅牛鼠穴, 余嘗取用於雜著述中, 此等說, 古人書中, 非不具有, 而悟人之易, 諺勝於古書..

 

 

 

기존 연구서의 방향

 

그렇다면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문학의 이속(俚俗) 수용 양상에 대해 어떻게 분석하고 이해하였는가?

 

임형택은 이조 후기의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영락한 지식인들이 그들의 불평한 심사를 풀어낸 것이 배해체(俳諧體), 언문풍월(諺文風月) 등의 희작화(戱作化)이며 이러한 대중적ㆍ통속적 지향은 한문학 전통에 있어 이질적ㆍ이단적인 발전이라고 분석하였다임형택(1985), 李朝末 知識人分化와 문학(文學)戱作化 傾向金笠 硏究 序說 ,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비평사, 42~52. 참조..

 

심경호는 19세기의 한시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의 민요취향의 한시는 지배계급의 일부가 서민의 의식을 한시에 끌어들인 것으로 이해하였다심경호(2000), 19세기의 한시의 전개에 대한 일고찰, 한국문학연구1,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236. 참조.. 또 유희(柳僖)의 문학세계를 검토하여 문학의 소재, 정돈되지 않은 구법과 행문, 비함축적이며 비의론적인 유기(遊記) 등을 토대로 통속으로 요약하고 이를 19세기 중간 지식인들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로 제안하였다심경호(2009), 柳僖의 한문문학에 나타난 통속성, 고전문학연구 35, 한국고전문학회..

 

박무영은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의 한문학을 여성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저변화/속화그리고 고도의 지적 수련 경험에 바탕하는 놀이화를 나타내는 속화/고급화로 분석하였다박무영(2008), 19세기 한문학의 계열과 논점, 한국한문학연구 41..

 

 

 

조선 전시기 속어의 양상 연구의 미비

 

앞서 살펴본 문헌기록이나 기존 연구에서 조선후기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조선 전시기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며 그것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구체적인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고찰한 연구는 없다.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한문학의 이속(俚俗) 수용 양상을 고찰하는 방법의 하나로 문장에서의 속언(俗諺)오늘날 俗談의 사전적인 개념은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言俗, 속된 이야기. 世諺俗說등이다(국립국어원(1999), 표준국어대사전). 이 가운데 학술적인 용어로는 의 개념이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조희웅의 연구에 의하면, 20세기 이전에는 속담이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대개 을 비롯하여 과 결합한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 한국고전번역원과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의 고전문헌 검색 기능을 이용하여 관련 어휘를 찾아본 결과를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에서도 의 사용이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에 현재의 속담개념이 일부로서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과 같이 전폭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傳說俗信語또는 우리말 따위의 의미 등이 폭넓게 내재되어 있었다(조희웅(2008), 俗談 , 어문학논총vol.27, 국민대학교 어문학연구소, 1~6면 참조). 뿐만 아니라 필자가 조희웅의 조사방법을 참조하여 한국문집총간을 대상으로 東諺鄙諺俗談俗語俗言俗諺諺所謂諺曰諺有之俚言俚諺里諺常談의 사용빈도를 확인해 본 결과 계열의 사용 횟수가 가장 많았고 俗談이 사용된 경우는 30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속담에 가까운 문장의 활용도 계열에서 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본고에서는 오늘날의 속담개념과 구분하여 전설ㆍ속어ㆍ속담ㆍ속신어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서 俗諺을 정의하여 본고에서 사용하기로 한다.) 수용에 대한 제가의 견해와 구체적인 활용의 양상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조선조 제가(諸家)의 속언 인식

 

 

조선 초기 문헌이 인용된 속언

 

조선 최초로 문형을 잡았던 권근(權近, 1352~1409)동국사략(東國史略)의 서문에서, 김부식삼국사기에서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를 다 없애지 못하고 잡다하게 수록하였기에 그 문장이 ()’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權近, 陽村集19, 三國史略序, 197. 逮新羅氏, 與高句麗百濟鼎立, 各置國史, 掌記時事. 然而傳聞失眞, 多涉荒怪, 錄其時事, 未克詳明, 且多雜以方言, 辭不能雅. 前朝文臣金富軾, 輯而 修之, 爲三國史, 乃倣遷史, 國別爲書, 有本紀, 有列傳, 有志, 有表, 凡五十卷. 以一歲而分紀, 以一事而再書, 方言俚語, 未能盡革, 筆削凡例, 未盡合宜, 簡秩繁多, 辭語重複. 觀者病其記此遺彼 而難於參究也..

 

이십여 년 동안 문형으로서 사문(斯文)의 맹주를 맡았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 방언과 이어에 대해 권근과의 시각차를 보였다. 그는 신라가 자체적인 연호를 쓴 사실이나 중국의 관직제도를 모방한 것은 도를 지나치는 외람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과거 역사를 임의로 경솔히 고칠 수는 없으며 풍속과 세도의 순박함이나 역사적 사실의 미추를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록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황당하거나 괴이한 일을 제외하고 방언과 이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徐居正, 四佳集4, 三國史節要序, 241. 新羅自用年號, 抑而不書, 黜其僭也. 三國稱君, 或名或號或諡, 存其實也. 王妃或稱夫人或稱王后, 世子或稱太子或稱元子. 其官職或冒擬中國, 其名號或因循舊俗, 據事直書, 而美惡自見, 至如荒怪之事, 方言俚語, 去其太甚, 存其太略者, 不 可輕改舊史, 而且以著風俗世道之淳厖爾..

 

김종직(金宗直, 1431~1492)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고 쓴 발문에서, 동국여지승람이 속언(俗諺)과 보고 들은 것들을 주워 모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취사하거나 산정한 것이 비록 모두 타당함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강토 안의 고금에 걸쳐 드러난 자취들이 책을 펴면 일목요연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도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 때 간행한 대명일통지의 호한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였다金宗直, 畢齋集2, 輿地勝覽跋, 418. 今是編之成, 出於俗諺見聞采摭之餘, 而去取芟定, 又未得其當. 然幅員之內, 古今已然之迹, 精粗巨細, 一開卷而了然在目, 雖不敢擬一統志, 而較諸方輿勝覽, 則實無愧焉. 以之嘉惠于四方後世, 未必無小補云.. 그가 속언을 관찬 문헌의 자료로서 활용한 것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지만, 속언의 가치를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종 무렵의 속언에 대한 생각들

 

중종 무렵의 어숙권(魚叔權)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우리나라의 속언 중에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것으로 초헌에 말채찍ㆍ짚신에 징ㆍ거적문에 쇠지도리ㆍ사모에 갓끈ㆍ삿갓에 털이개ㆍ중 재() 올리는데 무당 춤추기등을 나열한 뒤 그 말은 비록 비루하고 저속하지만 한 번의 웃음거리로 삼기에는 충분하다魚叔權, 稗官雜記4. 本國諺語, 謂事之不相稱者曰, 軺軒馬鞭藁履丁粉薦門鐵樞紗帽纓子蒯笠刷子僧齋胡舞, 言雖鄙俚, 亦足以資一笑也.고 함으로써 일상을 유쾌하게 만드는 속언의 해학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어숙권보다 조금 뒤진 시기의 정구(鄭逑, 1543~1620)는 함안(咸安)의 군수로 부임하여 그 곳의 산천과 풍속에 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며 직무의 수행에 충실함을 더하고자 하였다. 당시 함안 향교의 제독(提督)으로 있던 오운(吳澐)은 정구가 수집한 자료를 열람한 뒤, 군지(郡志)로 편찬하기를 권하였고 결국 책으로 완성되었다. 정구는 이 책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썼다.

 

 

고을 안에서 전후 시대에 걸쳐 일어난 어떤 기록할 만한 일이거나 증명해 둘 만한 유적에 관해서는 비록 굳이 후세에 전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또 전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언(俚諺)과 속담(俗談)은 오히려 세상의 교화(敎化)에 관계될 수 있는 것이기에 감히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못하고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뒷부분에 보충해 넣었다. 이리하여 본 고을에 관한 것으로서 알아볼 만한 것, 기록할 만한 것, 거울삼아 따르거나 경계할 만한 모든 일들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게 되었으며, 제군이 군지를 만들자고 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至於郡中前後有事可錄, 有迹可徵, 雖不必爲可傳, 而 亦不可以不傳. 俚諺俗談, 尙可爲世敎所關, 則不敢遂爲之泯沒也. 裒錄叢話, 以足其後. 於是, 凡郡之可考可述可鑑可戒者, 無復有餘蘊, 而諸君之所以爲志者, 其斯畢矣. -鄭逑, 寒岡集10, 咸州志序, 285.

 

 

정구는 이언(俚諺)과 속담(俗談)의 교화적 가치에 더욱 비중을 두고 별도로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덧붙여 둠으로써 후세에 본보기와 경계가 되기를 바랐다.

 

한편 홍만종(洪萬宗, 1643~1725)순오지(旬五志)에도 상당수의 방언과 속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자서(自敍)와 속언 뒷부분에 붙인 후기에서 방언(方言)과 이어(俚語)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서에서는 순오지(旬五志)의 간행이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독자를 의식한 것이기보다는 와병 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평소의 보고 들은 문장가들의 잡설(雜說)이나 여항의 이어(俚語)들을 모은 것이기에 체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짧은 시간에 쓰도록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후기에서는 수록한 방언과 속언의 출처를 밝히는 한편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속언의 사용 여부를 통해 속언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징표일 수 있으며 또 사람이 자기의 행동을 삼가고 반성할 수 있는 기제로서의 이어(俚語)의 가치를 인정하였다洪萬宗, 旬五志卷下. 右方言數十百條, 皆今世之恒用者, 雜取京鄕遠近方言, 俱收而幷錄之. 第觀前輩所記文字中, 有今未曉之方言, 若此類想必古好用而今不用者, 亦安知余之所錄, 必皆見用於後之人, 而後之視今, 亦猶今之昔耶? …… 愼吾身之類, 深有意味, 不可以俚語忽之. 覽者如能反隅而知所處, 則亦未必無少補云爾..

 

 

이익, 속언의 가치를 알아채다

 

()이란 조속(粗俗)한 말이다. 부녀자나 어린아이의 입에서 만들어져 항간에 유행되고 있으나, 인정(人情)을 살피고 사리(事理)에 징험함으로써 뼛속 깊이 들어가 털끝처럼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처럼 널리 유포되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諺者, 粗俗之談也. 成於婦孺之吻, 行於委巷之間, 察之人情, 驗之事理, 有刺骨入髓, 覈究乎毫芒之細者. 不然其何能流而布之, 傳久而不泯若是哉?

 

시경에서는 나무꾼에게도 물어보라[詢于芻蕘]”고 하였다. 나무꾼이 하는 말은 본래 경전의 뜻을 인용하거나 화려하게 꾸며대어 듣기 좋게 하거나 기분 좋게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을 채용하였으니, 어쩌면 실제 일어나는 일들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詩曰 詢于芻蕘, 芻蕘之爲言, 固無據典引義, 增華飾彩, 可以悅耳而賞心者. 然且採之, 豈非蹈于實而適 乎務哉?

 

경전에 보이는 것으로는 제 밭의 곡식 싹이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와 같은 속언이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고 후세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으니, 이것이 나무꾼에게 물어본 증거라 하겠다. 이 말에 따라 집안일을 처리하고 국정을 처리하였으니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其見於經則莫知苗碩之類, 卽尊之丌上, 播之後人, 此爲詢之之證案. 以之處家事措國政, 要不可廢也.

 

만약 그 말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말한 시대의 고금(古今)과 말한 사람의 성우(聖愚)에 구별을 두겠는가? 따라서 언()은 틀림없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苟使言而裨益, 何有於古今聖愚之別? 諺之不可沒也明矣. - 李瀷, 星湖集56, 百諺解跋, 542.

 

 

위는 이익(李瀷, 1681~1763)백언해(百諺解)에 붙인 발문이다. 이익은 속언[]이 거칠고 비속한 말이라고 정의하는 한편 속언의 작자들이 대부분 여항의 부녀자와 아이들이지만 그것이 인정세태를 관찰하고 사리를 징험할 수 있으며 사람을 일깨우는 교훈적 기능이 있기에 오랜 동안 생명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시경에 나무꾼에게도 물어보라는 구절이 채록된 의미가 비천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것이 실제와 관련이 있고 사업에 들어맞는 적합성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비천한 속언일지라도 사실적인 교훈성 또는 사리에 알맞은 적합성에 입각하여 집안일을 처리하거나 국정을 조처하는 데 활용하기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속언이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속언 같은 천근 한 것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된다면 시대의 고금이나 말한 사람의 성우에 차별을 둘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바로 이와 같은 특성이 속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속언의 장단점을 수록한 신후담

 

이익을 뒤이어 50여 조목의 속언을 모아 찰이록(察邇錄)으로 명명한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책의 제목을 설명하며 그가 아이 적에 들은 이속(俚俗)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모은 것이지만 이따금 사리에 근접한 것이 있기도 하고 경전에서 ()’이라 일컬은 것 역시 그와 같은 뜻이라고 하였다. 그는 속언의 장점을 이야기 했을 뿐 아니라 의리(義理)를 순화하지 못한 점과 비속한 말이 뒤섞인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愼後聃(2006), 河濱先生全集, 察邇錄, 아세아문화사. 右察邇錄五十餘條者, 卽余童幼時所記也. 以其記俚俗淺近之言, 故名曰察邇. 盖俚俗之言, 往往有近理者, 是故君子之所不廢, 如經典之稱諺, 是也. 乃其不馴義理, 雜以鄙俗之說, 則其害亦不細..

 

 

비루한 속언에 활발발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챈 유한준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주역ㆍ시경ㆍ춘추 등의 경전에서 비유를 통해 길흉(吉凶)과 성정(性情) 그리고 포폄(褒貶)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속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용ㆍ불ㆍ바람ㆍ천둥이 길흉의 연고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주역은 이로써 상()을 삼았고, ()ㆍ목()ㆍ조()ㆍ수()가 성정의 표출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시경은 이로써 을 일으켰고, ()ㆍ간()ㆍ귀()ㆍ괴()가 포폄의 뜻을 붙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춘추는 이로써 활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물에 견주어 유사한 것끼리 연계하는 것[比物連類]을 성인이 폐하지 않았고,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비유하는 것[推小喩大]들은 고훈(古訓)에도 기록된 바이다.

龍火風雷, 何與於吉凶之故而易以之象, 草木鳥 獸, 何與於性情之出而詩以之興, 神姦鬼怪, 何與於褒刺之寓而春秋以之用. 故比物連類, 聖人不廢, 推小喩大, 古訓攸記.

 

우리나라에는 속언이 많다. 길거리나 여항의 사람들에게 흩어져 있어서 지극히 비리하지만 신()이 유행하지 않은 적이 없고, 지극히 촌스럽지만 기()가 유동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묘리(妙理)에 가깝고 사정(事情)에 절실하며 상도(常道)를 짝하고 물칙(物則)에 의지하니 기미를 의탁하는 군자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그 말들을 모아서 책에 갖추어 드러내고 諺記라고 명명하였다.

東方之諺, 衆矣, 散在街衢閭巷之口, 至俚也而神未甞不流, 至野也而機未甞 不動, 逼理玅切事情, 配道常依物則, 托微之君子不能捨也. 余乃采其辭, 具著于篇, 名曰諺記. -兪漢雋, 自著 卷27, 諺記 幷序癸未, 435.

 

 

그에 의하면 경전에 수록된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속언이 비리하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신기(神機)가 유동하여 오묘한 이치와 사정을 절실히 나타낼 수 있고 떳떳한 도리와 일상의 법칙을 기준 삼기에 일상적인 것에서 기미를 파악하려는 군자라면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풍속화을 인정한 이덕무

 

열상방언(冽上方言)을 편찬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속언에 대해 별도의 견해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영석의 풍속화를 품평하며 여러 작가들이 속언과 방언을 소재로 활용하여 생동감을 돋운 것에 대해 그림의 묘미를 자세히 다하였다고 평을 하며 그들의 작품을 이속하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말 것과 문사로서의 세속과의 소통에 대한 책임을 일깨웠다李德懋, 靑莊館全書52, 耳目口心書, 443.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俗, 凡七十 餘帖. 許烟客泌, 以俚諺評, 其題三女裁縫曰, 一女剪刀, 一女貼囊, 一女縫裳, 三女爲姦, 可反沙 碟. …… 文人才士, 不知通俗, 不可謂盡美之才也. 此數子者, 曲盡其妙, 若以俚俗斥之, 非人情也. 淸儒張潮有云, 文士能爲通俗之文, 而俗人不能爲文士之文, 且幷不能爲通俗之文, 儘知言也..

 

 

속언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지식인의 호기로움만 있던 정약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명나라 왕동궤(王同軌)이담(耳談)을 보충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저술하였다.

 

 

왕동궤의 이담(耳談)은 고금의 비언(鄙諺)을 수집한 것이다. 그러나 경서와 사서에 실려 있는 것 중에도 누락된 것이 꽤 있어서 이제 다시 수록하였다. 승지 석천(石泉) 신작(申綽) 역시 십여 개를 채집하여 도와주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성호옹(星湖翁)백언해(百諺解)는 우리나라의 비언(鄙諺)을 모은 것이지만 모두 운()이 맞지 않기에, 지금 운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운을 붙이고 또 인하여 그 빠진 것들을 수록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님께서도 바다 가운데의 자산(玆山)에 계시면서 역시 수십 개를 붙여 주셨다. 이제 모두 모아서 한 편을 만들고 이담속찬(耳談續纂)’이라 명명하였다.

王氏耳談, 古今鄙諺之 萃也. 經史所著, 頗有脫漏, 今復收錄. 石泉申承旨[]亦以十餘語採而助之. 因念星翁百諺, 卽吾東鄙諺, 而皆不叶韻, 今取可韻者韻之, 因又收其脫漏. 先仲氏在玆山海中, 亦以數十語寄之. 今會通爲編, 名之曰耳談續纂.

-丁若鏞, 與猶堂全書第一集雜纂集第二十四卷, 耳談續纂序, 531.

 

 

이담속찬은 민간의 속언을 수집한 왕동궤의 이담과는 달리 경전과 사서에 실려 있는 속언을 발췌하여 수록함으로써 교훈의 자료로 만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익백언해가 우리나라의 비언을 모았지만 운율미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며 운을 붙일 만한 것에 운을 붙였다. 또 지인들이 채집해 속언까지 더하여 이담속찬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이 민간의 속언이 갖는 순수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지적 기호를 맞추려는 의도를 더 크게 가졌던 것이라고 하겠다.

 

 

속언의 가치 있다고 본 세 인물

 

홍길주(洪吉周, 1786~1841)정약용아언각비(雅言覺非)가 중국의 언어문자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바로 잡는 것에 대해 그 식견의 정밀함과 해박함, 변증과 논란의 상세함에 대해서는 칭찬하면서도 다른 논의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자세와 지나치게 중국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洪吉周, 睡餘瀾筆111. 丁茶山著書, 正東人言語文字之訛舛. [書名雅言覺非] 援据精博, 辨詰 詳鬯, 无容異議. 唯往往不免有太局者. 如云杜子美詩, 足踏宿昔跰, 跰與繭同, 足皮起也. 東人疏牘, 以再除前職爲重蹈宿跰, 是認跰爲跡也. 余則謂此固未必非誤認. 然曾所屢出入, 殆至繭足之地, 今又重蹈, 以此爲解, 亦未嘗不成文理. 其書中, 又往往論中國文字使用之轉訛於古昔者而輒云, 此自中國沿誤已久, 今不必改. 何其曲護中國而苛誅東俗耶? 恐東人不肯心服耳.. 아울러 홍길주는 속언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우리나라의 속담(俗談) 중에 문장에 쓰일 만한 것이 매우 많은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예컨대 남의 떡잎이 커 보인다’, ‘남의 죽음이 내 작은 병만 못하다’, ‘먼저 먹고 뒤에 걱정해라’,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호두껍질의 쉰내 나는 즙도 남 주기는 아깝다는 것들은 모두 빼어나고 특출한 문장의 재료가 되기에 손색없다. 남이 노래할 때 듣지 않다가 여음에 이르자 느닷없이 곡조가 틀렸다고 의논한다’, ‘좋은 노래도 가끔 들어야 좋다는 것들은 세상을 살며 사람과 접촉할 때 큰 도움이 되는데, 유독 문장에만 쓰이지 못할 뿐이다. ‘바늘허리에 실 묶기’, ‘쥐구멍으로 소 몰기라는 말은 내가 일찍이 잡저(雜著)에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옛 사람의 글 속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사람들을 쉽게 깨우치기로 속언이 옛글보다 낫다.

東諺可入文詞者甚多, 而無用之者. 別人荳瓣大,’ ‘別人屍不如我微恙,’ ‘先喫後鬱鬱,’ ‘笞先受爲快,’ ‘胡桃殼蔫液不肯予人之類, 俱不害爲絶奇文料. 又如別人唱歌胡不聽, 到餘音而徑議其失腔,’ ‘好歌曲罕聆方好之類, 尤大有助於應世接人之際, 不獨可入文詞而已. ‘縛線針腰,’ ‘驅牛鼠穴,’ 余嘗取用於雜著述中, 此等說, 古人書中, 非不具有, 而悟人之易, 諺勝於古書. -洪吉周, 睡餘瀾筆58.

 

 

위의 말은 우리 속언의 가치에 대한 홍길주의 인식이 얼마만큼 긍정적이고 구체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 속언이 특출한 문장의 재료로서 손색이 없고 세상사에 부응하고 사람들과 접촉할 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영조 때의 장령 신응삼(辛應三)은 왕의 앞에서 속언을 입에 올리면서 그것이 비록 비리하지만 나름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承政院日記(탈초본)75, 영조 49(1773) 56(甲子). 近來春雨則或過, 而當夏劇農之節, 反有靳澤之歎. 臣以俗談仰達, 殊涉猥屑, 而竊嘗聞俗談曰, 春雨之頻數, 婦女之手闊, 蓋謂過費而還縮也. 此雖俚諺, 其理則然..

 

홍길주의 속언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속언은 시문 창작의 긴요한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홍길주는 문장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기에 느닷없이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한두 단락의 문장이나 사물과 마주하여 문사에 쓸 만하다고 여겨지는 절묘한 비유나 아름다운 말을 얻게 되면 작은 쪽지에 써서 보자기나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책자로 만들어 문료(文料)라고 제목을 붙여놓고 글쓰기의 재료로 삼고 미처 다 쓰지 못한 것을 남겨 두었다가 뒷사람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였다洪吉周, 睡餘放筆59. 少時志專於文詞, 胸中或驀然成奇文一二段, 或遇事物, 得奇喩環語之可 用於文辭者, 往往錄于片楮, 寘巾篋中, 後當作文, 鎔琢而用之. 然其未及錄而忘之者, 與錄寘巾篋 而亡去者, 甚多. 其遇題而見用, 盖厪一二止耳. 恒欲作一冊子, 題曰文料, 有所思, 輒雜記之, 其見用者, 隨卽句之, 未見用者, 留以貽后人竟卒, 卒未果而今老矣. 文逕日蕪, 胸中殆空, 空然可恨.. 그와 같이 문학 창작의 재료를 갈구하던 그에게 속언은 문장을 빼어나게 만들어 줄 좋은 재료였던 것이다.

둘째, 속언은 세상에 부응하고 사람과 접촉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등 사회교제적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대화의 기술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과 대화할 때의 주의점을 이십여 가지로 정리하여 객좌담계(客座談戒)’라고 제목을 붙이고 벽에 써 붙여 두었다고 한다洪吉周, 睡餘放筆36.. 그 예를 들자면,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하지 말 것, 남의 말을 함부로 비난하지 말 것,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시정에 회자되는 이야기는 이미 서로가 반복적으로 들어 지겨우므로 말하지 말 것 등이다洪吉周, 睡餘演筆33. 逢人於久別之餘, 不須道時事中膾炙經久者. 吾與彼雖初相酬酌, 彼之與別人言此事, 宜已至幾十百, 遭我之言, 亦太不新矣. 當事, 人與我交厚, 我固不可不竭其所知, 以裨其不逮, 如或我認以自得之獨見而告彼, 彼業已以此說, 屢與人講劘, 便屬陳腐, 則當奈何, 此又不可不慮及.. 여기에 쉽고 간략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 속언을 적절히 활용할 것이 추가될 수 있겠다.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변증을 통한 박물고증학의 세계를 구성하였다. 그는 벽()이 있다고 할 만큼 변증에 몰두하였는데, 참된 지식과 적확한 견해가 아니면 한갓 가담항설(街談巷說)에 불과하기에 군자는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변증의 자료가 된다면 비록 이언(俚諺)이나 야담(野談)까지도 수집했다고 하였다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燕銜石辨證說. 凡事物之辨證者, 若非眞知的見, 則其所辨者, 無非街譚巷說, 故君子不取也. 予於事物, 援古證今, 每欲發明其原委, 所聞者謏, 所見者寡, 故雖俚諺野談, 罔不搜羅. 或有一斑之窺, 則暖姝之紀載不已, 了無裁度, 每受大方之譏笑, 而不自恤焉. 甚矣, 其好辨之癖也..

 

조재삼(趙在三, 1808~1866)송남잡식(松南雜識)의 방언류(方言類)에 우리 속언을 150여개 정도 수록하고 필요할 때는 그 의미를 밝혀주었다趙在三, 松南雜識(林氏本) 枇卷.

 

 

조선의 속언에 대한 문인들의 인식 정리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 살펴본 문인들의 속언에 대한 인식과 관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권근과 대다수의 문인지식인들의 인식으로서, 우리말이나 속언을 문장으로 쓰기에는 번다하고 비리하여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둘째, 서거정김종직ㆍ정구ㆍ홍만종이익정약용과 같은 지식인의 인식으로서, 교훈성ㆍ실용성과 함께 세교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한편 유한준은 그들과 의식의 층위를 조금 달리 하지만 넓은 차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는 속언이 비리하고 촌스러운 반면 신기(神機)가 유동하고 오묘한 이치에 핍진하고 사정에 절실하며 상도에 배합되고 사물의 법칙에 들어맞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셋째, 어숙권과 같이 속언의 유희성ㆍ해학성에 주목하는 유형이 있다.

넷째, 홍길주와 같이 문학 창작의 재료로 인식한 유형이 있다.

다섯째, 이규경이나 조재삼과 같이 유서를 구성하는 주요 지식 중 하나로 인식한 유형이 있다.

아래에서 이러한 속언 인식 유형에 따른 실제 문장에서의 활용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조선왕조실록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 별로 기록한 편년체 사서이다.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의 등록(謄錄) 그리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였고, 문집ㆍ일기ㆍ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일성록도 사용되었다. 편찬 과정은 각방의 당상과 낭청(郎廳)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한 자료를 뽑아 작성하는 초초(初草), 그리고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ㆍ보완하는 중초(中草), 마지막으로 총재관과 도청의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ㆍ첨삭을 하여 완성하는 정초(正草)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복잡하고 엄정한 절차로 만들어진 실록에 흥미롭게도 임금들의 속언 사용이 빈번히 보인다.

 

 

 

연산군실록의 속언

 

연산군실록에 기록된 속언은 모두 9건인데, 그것들은 모두 쥐를 때려잡고 싶어도 그릇을 깰까 못한다[投鼠忌器]’라는 중국 기원의 속언을 사용한 것이었다. 4건이 기록된 세종투서기기(投鼠忌器)’2, ‘우리나라의 법은 삼일이면 없었던 것으로 된다[我國之法, 三日而廢]’는 속언이 1, ‘임금은 항상 깊은 궁 안에 있으므로 바깥사람과 서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 만약 대낮에 밖에 나오면 그 나라에 흉한 일이 생긴다[人君長在深宮, 不令外人相見可矣. 若於白日出外, 則其國有凶.]’는 고언(古諺)1회 사용되었다.

 

 

 

영조의 파격적인 언어생활

 

조선의 임금 가운데 52년의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영조가 가장 많은 속언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됨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가 사용한 속언 가운데는 일국의 지존으로서 입에 담기 어려운 비속한 것, 예를 들어 네 똥을 먹고 천 년을 사느냐[食汝糞而生千年乎]’와 같은 속언을 신하들 앞에서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니 똥 먹고 천년 사나 내 똥 먹고 만년 산다가 원형이다. 그가 이 속언을 쓴 배경은, 당시의 사직(司直) 조영순(趙榮順)이 최석항(崔錫恒)ㆍ이광좌(李光佐) 등에게 관작을 회복시킨 일에 대하여 인의(引義)하고 스스로 고귀(告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보던 영조가 조영순을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지우게 하자 신하들이 그를 옹호한 것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다. 신하들이 물러가지 않고 탕제의 복용을 간청하자 영조가 위의 속언을 인용하며 불편한 심사와 노골적인 비아냥을 속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承政院日記, 영조 481122(癸丑) ; 영조실록 119, 48(1772) 1119(경술)3번째 기사 참조..

 

또 영조는 탕평정치가 주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붕당을 이루어 서로 파괴적인 비방과 무고를 일삼는 신하들에게 그러한 행태를 중지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종용할 때도 속언을 활용하였다.

 

 

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문(斯文)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더니, 지금에는 한편의 사람을 모조리 역당(逆黨)으로 몰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역시 어진 사람과 불초한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한편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을 리가 있겠는가? 각박하고 또 심각해져서 유배되었다가 다시 찬축(竄逐)되었으니, 그 가운데 어찌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가?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어도 5월에 서리가 내리는데, 더구나 한편의 여러 신하들을 모조리 제도(諸道)에 물리치는 일이겠는가?

朋黨之弊, 未有甚於近日. 初以斯文 起鬧, 今則一邊之人, 盡驅之於逆黨. 三人行亦有賢不肖, 豈有一邊人同一套之理? 刻而又深, 流而復竄, 其中豈無抱冤之人乎? 一婦含冤, 五月飛霜. 況一邊諸臣, 盡逬於諸道者耶?

 

…… 피차가 서로를 공격하여 공언(公言)이 막히고 역당으로 지목하면 옥석이 구분되지 않을 것이니, 저들이 나를 공격하는 데 장차 가려서 하겠는가,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 충직한 사람을 뒤섞어 거론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는 나의 말이다. 이는 바로 속언에서 말하는 입에서 나간 것이 귀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정이 언제 안정되며 공의(公議)가 언제 들리겠는가?

…… 彼攻此擊, 公言枳塞, 目以逆黨, 玉石不辨, 彼所攻我, 其將擇乎? 不擇乎? 混擧忠直之人, 幷驅罔測之科, 非彼之創也, 是我之言也. 此正諺所謂出乎口, 反乎耳者也. 如此而朝著何時乎定, 公議何時乎聞? -英祖實錄3, 영조 1(1725) 13(壬寅) 2번째 기사.

 

 

영조는 숙종조에 있었던 사문난적의 시비에서부터 당색에 따라 충역을 구분하는 당시의 상황으로 억울한 신하들의 희생이 뒤따르고 소모적인 당쟁의 폐해는 그것을 야기한 이들에게 결국 되돌아올 것이라는 훈계를 속언을 빌어 나타냈다.

 

 

속언으로 함경감사를 경계한 철종

 

철종도 함경감사 조득림(趙得林)이 하직 인사를 하자 그에게 수령의 선악은 전적으로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다. 속언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이 흐리다.’ 했으니, 위에 있는 자가 정직하게 자신을 단속하면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고 하며 속언을 인용하여 감사로서 모범적인 처신을 하도록 일깨웠다【『國朝寶鑑90, 철종조 4.

 

 

정조, 옥사를 심사하며 속언을 쓰다

 

정조는 살인에 관한 옥사를 심사하여 판부할 때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실제 증거를 가지고 도둑을 잡아서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훈계를 속언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노장이 재물을 잃어버리고는 김남원금(金南原金)을 의심하여 밧줄로 묶고 주리를 틀었는데, 김남원금의 어미 황녀인(黃女人)이 와서 구하다가 떠밀려 21일 만에 죽었다.

[상처] 왼쪽 늑골이 검고 굳었다.

[실인] 떠밀린 것이다. 을묘년(1795, 정조19) 9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본도의 계사] 훔친 사실을 추궁하면서 몹시 노여워 혹 떠밀기는 했으나, 다 죽어가는 늙은이의 실낱같은 목숨이 저절로 다한 것이지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증도 명확하지 않으니 실정이나 자취로 볼 때 참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형조의 계사] 옥사의 실정은 실로 정상 참작하여 용서하는 것이 합당하니, 도신의 계사에서 이미 참작하여 처결하였다고 했습니다.

[판부] 함양의 죄수 노장과 성주(星州)의 죄수 강육손(姜六孫) 등은 도백이 이미 가벼운 쪽으로 처결하여 보낸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억지로 트집을 잡아 말하겠는가마는, 노장의 행위는 죽여도 아깝지 않다고 말할 만하다. 속언에 뒤에 짊어진 짐을 보고 도적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감히 분명하지도 않은 떠도는 말을 듣고 평민을 함부로 의심하여 몇 명의 장정을 모아 한밤중에 명화적(明火賊)이 여염집에 들이치듯 쳐들어갔으며 사사로이 악형(惡刑)을 시행하여 흉포하고 패악하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다 죽어가는 노파가 이 일로 인해 죽고 말았다. …… 안타깝다! 도백과 수령은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한 도를 맡아 다스리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살리는 사람이 도로 사람을 죽인다는 의리를 완전히 소홀히 하여 도리어 절대로 살려 주어서는 안 될 옥사를 살려주는 쪽으로 처결하였으니, 이러한 도백과 수령을 어디에 쓰겠는가?

-審理錄30, 정사년(1797) 3, 咸陽 盧嶂의 옥사.

 

 

정조서경에 나오는 성왕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정치적 재량권을 확대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왕은 도덕적 모범자이기보다는 정치와 외교는 물론 담력에 있어서도 비범한 정치가이자 적극적인 정치가였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정조삼대 이후로 사도(師道)가 비록 땅에 떨어졌으나 예악과 형정은 군도(君道)가 비롯되는 바로서 다스리고 가르치는 뜻이 실로 같다. 그러니 오늘날 군사(君師)의 책임을 내가 감히 자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正祖, 弘齋全書170, 日得錄 10.라고 하며 형정 역시 자신이 다스리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심리록의 판부에서도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정순옥(2003), 정조의 법의식심리록 판부를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21, 호남사학회, 56~58. 참조. 신민을 일깨우는 군사를 자처한 그였기에 어려운 용사보다는 민간에서 쓰이는 속언을 활용하여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그 의미를 일깨우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보고서에 속언을 사용한 허목

 

허목(許穆, 1595~1682)1650년에 정릉참봉으로 처음 출사하여 공조 정랑,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거쳐 장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효종의 상사 때 복상(服喪)의 잘못을 거론하는 상소를 올려 1660년에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여에 걸친 그의 재직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는 기근이었다. 본래 다른 지역보다 척박하던 삼척 지역이 연이어 큰 흉년을 만났는데 허목이 부임하던 해에 심한 한재(旱災)를 입어 모내기를 반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모내기를 한 곳도 이삭이 패지 않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백성들의 참혹한 실정을 목도한 허목은 지방세를 감면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민생구제에 힘을 기울였다許穆, 記言 卷37, 乞山田免租狀 , 221..

 

 

토지의 마땅함에 따라 생산되는 곡식이 같지 않으니, 예를 들면 중국의 청주(靑州)와 형주(荊州)에는 기장이 없고 기주(冀州) 북쪽에는 벼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없는 것을 요구하여 천하에 비축해 두는 곡물을 똑같게 한다면,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는 반드시 구주(九州)에서 생산되는 오곡을 기재해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 두 곡물이 생산되지도 않으면서 백성의 병폐가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매년 원곡 이외에 비모(費耗)는 해마다 늘어나 원곡의 두 배, 다섯 배로 늘어나고, 천 배, 만 배로 늘어날 것이니, 곡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폐해는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변통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는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유리걸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 것입니다. 비축된 것으로 말하면, 속언에 쭉정이가 만 섬 가득해도 알곡 백 섬이나 열 섬만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이 일이 바로 그 짝입니다.

土之所宜, 生穀不同, 如靑荊無稷, 冀北無稻, 必責其所無以均天下之積儲, 則周官職方, 必不載九州五穀之所出, 今此二穀無產, 而爲民病者莫此之甚, 而年年元穀之外, 費耗歲增, 至於倍蓰, 至於千萬, 粟愈多而弊愈甚, 此不變通, 則其弊令民必至於流離, 以積儲言之, 諺曰: “虛殼滿萬, 不如實粒百十,與今日此事, 正相類也. -許穆, 記言 卷37, 陟州記事, 穄稷事申請粘移狀, 223.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어 죽을 상황에서도 상평창에 비축된 기장을 대출받기를 꺼리는 이유에 대해 알곡이 적은 기장이 먹을 때는 실속이 없고 수확하여 갚을 때는 괴롭고 힘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관련 속언을 예시하여 효과적으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민생 구제를 위한 보고서에도 속언이 사용되었다.

 

 

▲ 정조가원조시절에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속언 중에서 절묘한 것들은 가락이 착착 들어맞는다는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말을 인용하며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則生[잠자리야 잠자리야, 저리 가면 죽고 이리 오면 산다]’와 같은 속언은 아무런 이치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가락에 맞는 협운의 특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三尺髥, 食令監[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영감이다]’, ‘看新月, 坐自夕[새벽달 보자고 저녁부터 기다린다.]’, ‘久坐雀, 必帶鏃[오래 앉은 참새 화살 맞는다.]’ 등의 속언도 운어를 이룬다고 하였다成大中, 靑城雜記4, 醒言. 金坯窩曰, 俚語之妙者, 無不合韻. 蜻蛉蜻蛉, 往彼則死, 來此 則生, 此直無理俚謠, 而亦諧於韻. 如所謂三尺髥食令監, 看新月坐自夕, 久坐雀必帶鏃, 皆成韻語, 似此類者甚多..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한시의 소재로 속언을 직접 사용하였다. 그는 연속언(演俗言)이라는 제목으로 4개의 속언과 그에 관한 풀이를 5언 혹은 7언의 한시 형식으로 풀어냈다. 그 가운데 두 수를 제시한다.

 

가마 밑도 검고 솥 밑도 검어[釜底黑鼎底黑]

鼎底雖黑釜未白 솥 밑이 검다지만 가마도 희진 않으니
釜底莫笑鼎底黑 가마 밑아 솥 밑이 검다고 웃지 말거라
由來此醜誰所取 이 더러운 것을 본디 누가 취하였는가
摠爲將軍不負腹 다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은 격일세

 

 

말 가는데 소도 가니[馬亦行牛亦行]朴世堂, 西溪集, 石泉錄, 演俗言 四首, 51.

牛行雖遲馬行速 소걸음이 느리고 말걸음이 빠르다 한들
馬行百里牛亦得 말이 가는 백리 길을 소도 갈 수 있다네
牛言我後君且先 소가 내 뒤에 갈 테니 자네 앞서 가게
日暮期君店門前 저물녁 여관 문 앞에서 만나세나하네

 

 

위의 부저흑정저흑(釜底黑鼎底黑)’, ‘마역행우역행(馬亦行牛亦行)’열상방언(冽上方言)외에도 여러 속언집에 수록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속언이다. 이 시는 가마가 솥과 마찬가지로 배가 불룩한 것 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솥의 밑이 검다고 비웃는 것을 통하여 자신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전구와 결구에서는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의 일화를 활용하여 이러한 경계의 가르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중국 송나라의 대장군인 당진(黨進)이 어느 날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말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장군은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이 배는 장군을 저버리고 약간의 지략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일화를 활용하여 공연히 다른 것을 거론하여 비난을 자초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祝穆, 古今事文類聚後集卷20, 腹負將軍..

 

이처럼 널리 알려진 속언을 제목으로 먼저 제시하고 그 의미를 4구의 한시로 풀이한 이 작품은 속언을 소재로 활용하여 그 의미를 한시로 재미있게 풀이하였다는 의의 외에도 기층 대중의 삶에서 만들어진 속언을 상층 지식인의 문학 형식에 결합시키는 독특한 유형을 만들어냈다는 의의도 갖는다.

 

뿐만 아니라 박세당의 속언을 활용한 한시 작품은 권근(權近, 1352~1409)이 큰 비를 소재로 읊은 한시權近, 陽村集9, 癸未正月二十三日大雨, 107. 今年正月異他年, 隔日陰晴雨雪連, 久訝玉 峯浮地上, 忽驚銀箭滿雲邊, 詩懷竟夕難排悶, 病耳通霄耿不眠, 俚諺比方娘手大, 誰將理數問蒼天.에서 속언을 직접 노출하여 효과를 달성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거두고 있다.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해학(諧謔)은 예교(禮敎)를 앞세운 조선 지식인들에게 금기시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조선전기에 긴장된 관료생활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사대부의 심심파적으로 이용되던 골계류(滑稽類)의 찬집과 유행이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로 사라지게 된 것도 어쩌면 엄숙한 유교적 예교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이와 같이 엄숙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방달한 삶의 방식을 택하였고 이단으로 취급되던 도불(道佛)에 경도되었으며 서얼과 통교하였다. 한편 고문가로 자처하면서 옛사람의 글을 본뜨지 말고 평이하면서도 유창한 자신만의 글쓰기를 강조하였다許筠, 惺所覆瓿稿12, 文說, 238.. 그의 방달불기한 이단적 성향과 고문 지향의 창작의식은 문학적으로 어떻게 융합될 것인가?

 

 

자네의 애첩은 매우 깜찍하고 지혜로워 젊음이 잠깐임을 반드시 알 것인데, 그녀가 비구니가 되어서 끝까지 절개를 지킬 것인가? 속언에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을 나무가 없다고 했으니 잘해 보게나. 그녀가 비록 금빛 휘장과 맛좋은 고아주(羔兒酒)의 맛에 익었지만 눈 녹은 물에 끓인 차도 특별히 운치 있는 일이네.

君家文君甚警慧, 必知春色片時. 其肯爲沙吒利終守節乎? 諺曰, ‘十斫木無不顚,’ 君其圖之. 彼雖熟金帳羔兒之味, 雪水煎茶, 殊亦雅事.

 

만일 그녀가 나를 찾아온다면 반드시, 하마터면 인생을 헛되어 보낼 뻔했다고 말할 것이네. 자네가 그녀에게 나는 놈 위에 타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일 걸세.

使其過我, 必曰幾乎虛度此生也. 君語之曰, ‘飛者上有跨者’, 則必動於言矣. -許筠, 惺所覆瓿稿 卷21, 與李汝仁 戊申四月, 319.

 

 

위의 편지는 허균16084월에 절친한 벗인 이재영(李再榮, 1553~1623)에게 부친 편지인데, 애첩 때문에 애가 단 친구를 속언을 이용하여 놀리고 도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속언은 허균의 방달불기한 성향을 척독에 잘 융합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덕무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당시의 인정물태를 잘 형용한 예로써 유명한 풍속화가인 조영석의 동국풍속도에 대하여 허필(許佖, 1709~1761)許佖: 1735(영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과 시ㆍ서ㆍ화에 전념하여 당시에 三絶로 불렸다. 李用休가 쓴 허필의 誌銘에는 청빈하고 소탈한 성격과 文學古藝 術品을 사랑하는 태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書體에 능통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篆書隷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仙槎唱酬錄烟客遺稿客가 있다. 등이 시 형식으로 품평한 말을 수록하였다.

 

 

어떤 사람이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 그린 동국풍속도(東國風俗圖)를 수집하여 그대로 그린 것이 70여 첩이 되었다.

연객(煙客) 허필(許佖)이 이언(俚諺)으로 평을 했는데, 세 여자가 재봉하는 그림에 쓴 것은, 한 계집은 가위질 하고[一女剪刀] 한 계집은 주머니 접고[一女貼囊] 한 계집은 치마 기우니[一女縫裳] 세 계집이라 간()이 되어[三女爲姦] 접시를 뒤엎을 수 있겠군[可反沙碟]이라고 하였다.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俗, 凡七十 餘帖. 許烟客泌, 以俚諺評, 其題三女裁縫曰, 一女剪刀, 一女貼囊, 一女縫裳, 三女爲姦, 可反沙碟. -李德懋, 靑莊館全書52, 耳目口心書, 443.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이 그림을 보면, 세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재봉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에 대하여 허필(許佖)은 앞의 세 구절에서 차분히 재봉에 열중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각각 묘사하다가 끝의 두 구절에서 난데없는 여자가 셋 모이면 새 접시를 뒤집어 놓는다는 속언을 활용하여, 그림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아낙들이 지닌 고유의 유쾌한 속성을 드러내는 해학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4. 속언을 변증 재료로 활용하다

 

이규경(李圭景)은 조부인 이덕무에서부터 부친 이광규로 이어져 온 박학과 실용의 학문 성향을 계승하여 명물도수(名物度數)와 박물학(博物學)을 중시하였다. 그의 학술의 집대성으로 평가되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완성에는 사물의 시말을 밝히려는 벽()이라고 부를 정도의 열정적인 학문 자세와 박학다식을 열망하며 사소한 기록조차 소중히 간직하는 기록정신, 차기(箚記)와 변증(辨證)의 서술방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한 예가 충주 지역의 형세를 변증하기 위한 재료로 속언을 활용한 것이다.

 

 

속언에 전하기를,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으니 석다(石多)ㆍ인다(人多)ㆍ언다(言多)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충주는 고을에 돌무더기가 많고, 고을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른 고을에 비해 대단히 번성하다. 사람들이 많은 까닭에 허무맹랑한 말들이 만들어져 구설의 고장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니 속언이 근거 없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俗諺相傳曰, 忠邑有三多, 石多人多言多. 蓋邑中多磊磧, 村多人聚, 比他邑殷盛, 人多, 故作謊誕之說, 爲口舌場. 至今尙然, 則俗諺非誣傳矣.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天地篇, 地理類, 州郡 忠州形勝辨證說.

 

 

이규경은 충주에는 삼다(三多)가 있다는 속언을 이용하여 충주의 지리적 특성과 행정규모에 따른 인구의 다소를 차례로 짚어 가며 지세를 변증하였다. 이와 같은 속언 이용 방식은 다른 문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박물고증을 추구하는 이규경의 학문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4. 마무리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한문학에서의 이속(俚俗)의 수용 여부는 특정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 개인의 문학관 내지 창작관의 영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비리하고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속언으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조선 전기부터 작가들은 비리한 속언을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수용 의도 역시 실용성과 교훈성의 측면에서부터 유희적인 해학이나 조롱 그리고 문학의 효과적인 수사기교 그리고 대상을 직관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분석하려는 변증적 연구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고 있다.

 

이로 볼 때, 한문학에서의 이속의 수용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한문학의 특화된 양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전시기에 걸치는 한문학의 다양한 양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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