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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의 수용 양상 - 2. 조선조 제가의 속언 인식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영주, 한문학에 나타난 이속의 수용 양상 - 2. 조선조 제가의 속언 인식

건방진방랑자 2022. 10. 2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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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조선조 제가(諸家)의 속언 인식

 

 

조선 초기 문헌이 인용된 속언

 

조선 최초로 문형을 잡았던 권근(權近, 1352~1409)동국사략(東國史略)의 서문에서, 김부식삼국사기에서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를 다 없애지 못하고 잡다하게 수록하였기에 그 문장이 ()’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였다權近, 陽村集19, 三國史略序, 197. 逮新羅氏, 與高句麗百濟鼎立, 各置國史, 掌記時事. 然而傳聞失眞, 多涉荒怪, 錄其時事, 未克詳明, 且多雜以方言, 辭不能雅. 前朝文臣金富軾, 輯而 修之, 爲三國史, 乃倣遷史, 國別爲書, 有本紀, 有列傳, 有志, 有表, 凡五十卷. 以一歲而分紀, 以一事而再書, 方言俚語, 未能盡革, 筆削凡例, 未盡合宜, 簡秩繁多, 辭語重複. 觀者病其記此遺彼 而難於參究也..

 

이십여 년 동안 문형으로서 사문(斯文)의 맹주를 맡았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 방언과 이어에 대해 권근과의 시각차를 보였다. 그는 신라가 자체적인 연호를 쓴 사실이나 중국의 관직제도를 모방한 것은 도를 지나치는 외람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과거 역사를 임의로 경솔히 고칠 수는 없으며 풍속과 세도의 순박함이나 역사적 사실의 미추를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록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황당하거나 괴이한 일을 제외하고 방언과 이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徐居正, 四佳集4, 三國史節要序, 241. 新羅自用年號, 抑而不書, 黜其僭也. 三國稱君, 或名或號或諡, 存其實也. 王妃或稱夫人或稱王后, 世子或稱太子或稱元子. 其官職或冒擬中國, 其名號或因循舊俗, 據事直書, 而美惡自見, 至如荒怪之事, 方言俚語, 去其太甚, 存其太略者, 不 可輕改舊史, 而且以著風俗世道之淳厖爾..

 

김종직(金宗直, 1431~1492)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고 쓴 발문에서, 동국여지승람이 속언(俗諺)과 보고 들은 것들을 주워 모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취사하거나 산정한 것이 비록 모두 타당함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강토 안의 고금에 걸쳐 드러난 자취들이 책을 펴면 일목요연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도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명나라 때 간행한 대명일통지의 호한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였다金宗直, 畢齋集2, 輿地勝覽跋, 418. 今是編之成, 出於俗諺見聞采摭之餘, 而去取芟定, 又未得其當. 然幅員之內, 古今已然之迹, 精粗巨細, 一開卷而了然在目, 雖不敢擬一統志, 而較諸方輿勝覽, 則實無愧焉. 以之嘉惠于四方後世, 未必無小補云.. 그가 속언을 관찬 문헌의 자료로서 활용한 것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지만, 속언의 가치를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

 

 

중종 무렵의 속언에 대한 생각들

 

중종 무렵의 어숙권(魚叔權)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우리나라의 속언 중에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것으로 초헌에 말채찍ㆍ짚신에 징ㆍ거적문에 쇠지도리ㆍ사모에 갓끈ㆍ삿갓에 털이개ㆍ중 재() 올리는데 무당 춤추기등을 나열한 뒤 그 말은 비록 비루하고 저속하지만 한 번의 웃음거리로 삼기에는 충분하다魚叔權, 稗官雜記4. 本國諺語, 謂事之不相稱者曰, 軺軒馬鞭藁履丁粉薦門鐵樞紗帽纓子蒯笠刷子僧齋胡舞, 言雖鄙俚, 亦足以資一笑也.고 함으로써 일상을 유쾌하게 만드는 속언의 해학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어숙권보다 조금 뒤진 시기의 정구(鄭逑, 1543~1620)는 함안(咸安)의 군수로 부임하여 그 곳의 산천과 풍속에 관한 여러 자료를 수집하며 직무의 수행에 충실함을 더하고자 하였다. 당시 함안 향교의 제독(提督)으로 있던 오운(吳澐)은 정구가 수집한 자료를 열람한 뒤, 군지(郡志)로 편찬하기를 권하였고 결국 책으로 완성되었다. 정구는 이 책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썼다.

 

 

고을 안에서 전후 시대에 걸쳐 일어난 어떤 기록할 만한 일이거나 증명해 둘 만한 유적에 관해서는 비록 굳이 후세에 전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또 전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언(俚諺)과 속담(俗談)은 오히려 세상의 교화(敎化)에 관계될 수 있는 것이기에 감히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못하고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뒷부분에 보충해 넣었다. 이리하여 본 고을에 관한 것으로서 알아볼 만한 것, 기록할 만한 것, 거울삼아 따르거나 경계할 만한 모든 일들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게 되었으며, 제군이 군지를 만들자고 한 소원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至於郡中前後有事可錄, 有迹可徵, 雖不必爲可傳, 而 亦不可以不傳. 俚諺俗談, 尙可爲世敎所關, 則不敢遂爲之泯沒也. 裒錄叢話, 以足其後. 於是, 凡郡之可考可述可鑑可戒者, 無復有餘蘊, 而諸君之所以爲志者, 其斯畢矣. -鄭逑, 寒岡集10, 咸州志序, 285.

 

 

정구는 이언(俚諺)과 속담(俗談)의 교화적 가치에 더욱 비중을 두고 별도로 많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덧붙여 둠으로써 후세에 본보기와 경계가 되기를 바랐다.

 

한편 홍만종(洪萬宗, 1643~1725)순오지(旬五志)에도 상당수의 방언과 속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자서(自敍)와 속언 뒷부분에 붙인 후기에서 방언(方言)과 이어(俚語)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서에서는 순오지(旬五志)의 간행이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독자를 의식한 것이기보다는 와병 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평소의 보고 들은 문장가들의 잡설(雜說)이나 여항의 이어(俚語)들을 모은 것이기에 체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을 시켜 짧은 시간에 쓰도록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후기에서는 수록한 방언과 속언의 출처를 밝히는 한편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속언의 사용 여부를 통해 속언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징표일 수 있으며 또 사람이 자기의 행동을 삼가고 반성할 수 있는 기제로서의 이어(俚語)의 가치를 인정하였다洪萬宗, 旬五志卷下. 右方言數十百條, 皆今世之恒用者, 雜取京鄕遠近方言, 俱收而幷錄之. 第觀前輩所記文字中, 有今未曉之方言, 若此類想必古好用而今不用者, 亦安知余之所錄, 必皆見用於後之人, 而後之視今, 亦猶今之昔耶? …… 愼吾身之類, 深有意味, 不可以俚語忽之. 覽者如能反隅而知所處, 則亦未必無少補云爾..

 

 

이익, 속언의 가치를 알아채다

 

()이란 조속(粗俗)한 말이다. 부녀자나 어린아이의 입에서 만들어져 항간에 유행되고 있으나, 인정(人情)을 살피고 사리(事理)에 징험함으로써 뼛속 깊이 들어가 털끝처럼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점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처럼 널리 유포되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諺者, 粗俗之談也. 成於婦孺之吻, 行於委巷之間, 察之人情, 驗之事理, 有刺骨入髓, 覈究乎毫芒之細者. 不然其何能流而布之, 傳久而不泯若是哉?

 

시경에서는 나무꾼에게도 물어보라[詢于芻蕘]”고 하였다. 나무꾼이 하는 말은 본래 경전의 뜻을 인용하거나 화려하게 꾸며대어 듣기 좋게 하거나 기분 좋게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그 말을 채용하였으니, 어쩌면 실제 일어나는 일들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詩曰 詢于芻蕘, 芻蕘之爲言, 固無據典引義, 增華飾彩, 可以悅耳而賞心者. 然且採之, 豈非蹈于實而適 乎務哉?

 

경전에 보이는 것으로는 제 밭의 곡식 싹이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와 같은 속언이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고 후세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으니, 이것이 나무꾼에게 물어본 증거라 하겠다. 이 말에 따라 집안일을 처리하고 국정을 처리하였으니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其見於經則莫知苗碩之類, 卽尊之丌上, 播之後人, 此爲詢之之證案. 以之處家事措國政, 要不可廢也.

 

만약 그 말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말한 시대의 고금(古今)과 말한 사람의 성우(聖愚)에 구별을 두겠는가? 따라서 언()은 틀림없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苟使言而裨益, 何有於古今聖愚之別? 諺之不可沒也明矣. - 李瀷, 星湖集56, 百諺解跋, 542.

 

 

위는 이익(李瀷, 1681~1763)백언해(百諺解)에 붙인 발문이다. 이익은 속언[]이 거칠고 비속한 말이라고 정의하는 한편 속언의 작자들이 대부분 여항의 부녀자와 아이들이지만 그것이 인정세태를 관찰하고 사리를 징험할 수 있으며 사람을 일깨우는 교훈적 기능이 있기에 오랜 동안 생명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시경에 나무꾼에게도 물어보라는 구절이 채록된 의미가 비천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그것이 실제와 관련이 있고 사업에 들어맞는 적합성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비천한 속언일지라도 사실적인 교훈성 또는 사리에 알맞은 적합성에 입각하여 집안일을 처리하거나 국정을 조처하는 데 활용하기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속언이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속언 같은 천근 한 것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된다면 시대의 고금이나 말한 사람의 성우에 차별을 둘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바로 이와 같은 특성이 속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속언의 장단점을 수록한 신후담

 

이익을 뒤이어 50여 조목의 속언을 모아 찰이록(察邇錄)으로 명명한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책의 제목을 설명하며 그가 아이 적에 들은 이속(俚俗)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모은 것이지만 이따금 사리에 근접한 것이 있기도 하고 경전에서 ()’이라 일컬은 것 역시 그와 같은 뜻이라고 하였다. 그는 속언의 장점을 이야기 했을 뿐 아니라 의리(義理)를 순화하지 못한 점과 비속한 말이 뒤섞인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愼後聃(2006), 河濱先生全集, 察邇錄, 아세아문화사. 右察邇錄五十餘條者, 卽余童幼時所記也. 以其記俚俗淺近之言, 故名曰察邇. 盖俚俗之言, 往往有近理者, 是故君子之所不廢, 如經典之稱諺, 是也. 乃其不馴義理, 雜以鄙俗之說, 則其害亦不細..

 

 

비루한 속언에 활발발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챈 유한준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주역ㆍ시경ㆍ춘추 등의 경전에서 비유를 통해 길흉(吉凶)과 성정(性情) 그리고 포폄(褒貶)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속언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용ㆍ불ㆍ바람ㆍ천둥이 길흉의 연고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주역은 이로써 상()을 삼았고, ()ㆍ목()ㆍ조()ㆍ수()가 성정의 표출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시경은 이로써 을 일으켰고, ()ㆍ간()ㆍ귀()ㆍ괴()가 포폄의 뜻을 붙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춘추는 이로써 활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물에 견주어 유사한 것끼리 연계하는 것[比物連類]을 성인이 폐하지 않았고,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비유하는 것[推小喩大]들은 고훈(古訓)에도 기록된 바이다.

龍火風雷, 何與於吉凶之故而易以之象, 草木鳥 獸, 何與於性情之出而詩以之興, 神姦鬼怪, 何與於褒刺之寓而春秋以之用. 故比物連類, 聖人不廢, 推小喩大, 古訓攸記.

 

우리나라에는 속언이 많다. 길거리나 여항의 사람들에게 흩어져 있어서 지극히 비리하지만 신()이 유행하지 않은 적이 없고, 지극히 촌스럽지만 기()가 유동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묘리(妙理)에 가깝고 사정(事情)에 절실하며 상도(常道)를 짝하고 물칙(物則)에 의지하니 기미를 의탁하는 군자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그 말들을 모아서 책에 갖추어 드러내고 諺記라고 명명하였다.

東方之諺, 衆矣, 散在街衢閭巷之口, 至俚也而神未甞不流, 至野也而機未甞 不動, 逼理玅切事情, 配道常依物則, 托微之君子不能捨也. 余乃采其辭, 具著于篇, 名曰諺記. -兪漢雋, 自著 卷27, 諺記 幷序癸未, 435.

 

 

그에 의하면 경전에 수록된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속언이 비리하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에도 신기(神機)가 유동하여 오묘한 이치와 사정을 절실히 나타낼 수 있고 떳떳한 도리와 일상의 법칙을 기준 삼기에 일상적인 것에서 기미를 파악하려는 군자라면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풍속화을 인정한 이덕무

 

열상방언(冽上方言)을 편찬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속언에 대해 별도의 견해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영석의 풍속화를 품평하며 여러 작가들이 속언과 방언을 소재로 활용하여 생동감을 돋운 것에 대해 그림의 묘미를 자세히 다하였다고 평을 하며 그들의 작품을 이속하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말 것과 문사로서의 세속과의 소통에 대한 책임을 일깨웠다李德懋, 靑莊館全書52, 耳目口心書, 443.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俗, 凡七十 餘帖. 許烟客泌, 以俚諺評, 其題三女裁縫曰, 一女剪刀, 一女貼囊, 一女縫裳, 三女爲姦, 可反沙 碟. …… 文人才士, 不知通俗, 不可謂盡美之才也. 此數子者, 曲盡其妙, 若以俚俗斥之, 非人情也. 淸儒張潮有云, 文士能爲通俗之文, 而俗人不能爲文士之文, 且幷不能爲通俗之文, 儘知言也..

 

 

속언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지식인의 호기로움만 있던 정약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명나라 왕동궤(王同軌)이담(耳談)을 보충하여 이담속찬(耳談續纂)을 저술하였다.

 

 

왕동궤의 이담(耳談)은 고금의 비언(鄙諺)을 수집한 것이다. 그러나 경서와 사서에 실려 있는 것 중에도 누락된 것이 꽤 있어서 이제 다시 수록하였다. 승지 석천(石泉) 신작(申綽) 역시 십여 개를 채집하여 도와주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성호옹(星湖翁)백언해(百諺解)는 우리나라의 비언(鄙諺)을 모은 것이지만 모두 운()이 맞지 않기에, 지금 운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운을 붙이고 또 인하여 그 빠진 것들을 수록하였다. 돌아가신 둘째 형님께서도 바다 가운데의 자산(玆山)에 계시면서 역시 수십 개를 붙여 주셨다. 이제 모두 모아서 한 편을 만들고 이담속찬(耳談續纂)’이라 명명하였다.

王氏耳談, 古今鄙諺之 萃也. 經史所著, 頗有脫漏, 今復收錄. 石泉申承旨[]亦以十餘語採而助之. 因念星翁百諺, 卽吾東鄙諺, 而皆不叶韻, 今取可韻者韻之, 因又收其脫漏. 先仲氏在玆山海中, 亦以數十語寄之. 今會通爲編, 名之曰耳談續纂.

-丁若鏞, 與猶堂全書第一集雜纂集第二十四卷, 耳談續纂序, 531.

 

 

이담속찬은 민간의 속언을 수집한 왕동궤의 이담과는 달리 경전과 사서에 실려 있는 속언을 발췌하여 수록함으로써 교훈의 자료로 만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익백언해가 우리나라의 비언을 모았지만 운율미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며 운을 붙일 만한 것에 운을 붙였다. 또 지인들이 채집해 속언까지 더하여 이담속찬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이 민간의 속언이 갖는 순수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하려는 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지적 기호를 맞추려는 의도를 더 크게 가졌던 것이라고 하겠다.

 

 

속언의 가치 있다고 본 세 인물

 

홍길주(洪吉周, 1786~1841)정약용아언각비(雅言覺非)가 중국의 언어문자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바로 잡는 것에 대해 그 식견의 정밀함과 해박함, 변증과 논란의 상세함에 대해서는 칭찬하면서도 다른 논의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자세와 지나치게 중국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洪吉周, 睡餘瀾筆111. 丁茶山著書, 正東人言語文字之訛舛. [書名雅言覺非] 援据精博, 辨詰 詳鬯, 无容異議. 唯往往不免有太局者. 如云杜子美詩, 足踏宿昔跰, 跰與繭同, 足皮起也. 東人疏牘, 以再除前職爲重蹈宿跰, 是認跰爲跡也. 余則謂此固未必非誤認. 然曾所屢出入, 殆至繭足之地, 今又重蹈, 以此爲解, 亦未嘗不成文理. 其書中, 又往往論中國文字使用之轉訛於古昔者而輒云, 此自中國沿誤已久, 今不必改. 何其曲護中國而苛誅東俗耶? 恐東人不肯心服耳.. 아울러 홍길주는 속언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우리나라의 속담(俗談) 중에 문장에 쓰일 만한 것이 매우 많은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예컨대 남의 떡잎이 커 보인다’, ‘남의 죽음이 내 작은 병만 못하다’, ‘먼저 먹고 뒤에 걱정해라’,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호두껍질의 쉰내 나는 즙도 남 주기는 아깝다는 것들은 모두 빼어나고 특출한 문장의 재료가 되기에 손색없다. 남이 노래할 때 듣지 않다가 여음에 이르자 느닷없이 곡조가 틀렸다고 의논한다’, ‘좋은 노래도 가끔 들어야 좋다는 것들은 세상을 살며 사람과 접촉할 때 큰 도움이 되는데, 유독 문장에만 쓰이지 못할 뿐이다. ‘바늘허리에 실 묶기’, ‘쥐구멍으로 소 몰기라는 말은 내가 일찍이 잡저(雜著)에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옛 사람의 글 속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사람들을 쉽게 깨우치기로 속언이 옛글보다 낫다.

東諺可入文詞者甚多, 而無用之者. 別人荳瓣大,’ ‘別人屍不如我微恙,’ ‘先喫後鬱鬱,’ ‘笞先受爲快,’ ‘胡桃殼蔫液不肯予人之類, 俱不害爲絶奇文料. 又如別人唱歌胡不聽, 到餘音而徑議其失腔,’ ‘好歌曲罕聆方好之類, 尤大有助於應世接人之際, 不獨可入文詞而已. ‘縛線針腰,’ ‘驅牛鼠穴,’ 余嘗取用於雜著述中, 此等說, 古人書中, 非不具有, 而悟人之易, 諺勝於古書. -洪吉周, 睡餘瀾筆58.

 

 

위의 말은 우리 속언의 가치에 대한 홍길주의 인식이 얼마만큼 긍정적이고 구체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 속언이 특출한 문장의 재료로서 손색이 없고 세상사에 부응하고 사람들과 접촉할 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영조 때의 장령 신응삼(辛應三)은 왕의 앞에서 속언을 입에 올리면서 그것이 비록 비리하지만 나름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承政院日記(탈초본)75, 영조 49(1773) 56(甲子). 近來春雨則或過, 而當夏劇農之節, 反有靳澤之歎. 臣以俗談仰達, 殊涉猥屑, 而竊嘗聞俗談曰, 春雨之頻數, 婦女之手闊, 蓋謂過費而還縮也. 此雖俚諺, 其理則然..

 

홍길주의 속언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속언은 시문 창작의 긴요한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홍길주는 문장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기에 느닷없이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한두 단락의 문장이나 사물과 마주하여 문사에 쓸 만하다고 여겨지는 절묘한 비유나 아름다운 말을 얻게 되면 작은 쪽지에 써서 보자기나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책자로 만들어 문료(文料)라고 제목을 붙여놓고 글쓰기의 재료로 삼고 미처 다 쓰지 못한 것을 남겨 두었다가 뒷사람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였다洪吉周, 睡餘放筆59. 少時志專於文詞, 胸中或驀然成奇文一二段, 或遇事物, 得奇喩環語之可 用於文辭者, 往往錄于片楮, 寘巾篋中, 後當作文, 鎔琢而用之. 然其未及錄而忘之者, 與錄寘巾篋 而亡去者, 甚多. 其遇題而見用, 盖厪一二止耳. 恒欲作一冊子, 題曰文料, 有所思, 輒雜記之, 其見用者, 隨卽句之, 未見用者, 留以貽后人竟卒, 卒未果而今老矣. 文逕日蕪, 胸中殆空, 空然可恨.. 그와 같이 문학 창작의 재료를 갈구하던 그에게 속언은 문장을 빼어나게 만들어 줄 좋은 재료였던 것이다.

둘째, 속언은 세상에 부응하고 사람과 접촉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등 사회교제적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대화의 기술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과 대화할 때의 주의점을 이십여 가지로 정리하여 객좌담계(客座談戒)’라고 제목을 붙이고 벽에 써 붙여 두었다고 한다洪吉周, 睡餘放筆36.. 그 예를 들자면,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하지 말 것, 남의 말을 함부로 비난하지 말 것,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시정에 회자되는 이야기는 이미 서로가 반복적으로 들어 지겨우므로 말하지 말 것 등이다洪吉周, 睡餘演筆33. 逢人於久別之餘, 不須道時事中膾炙經久者. 吾與彼雖初相酬酌, 彼之與別人言此事, 宜已至幾十百, 遭我之言, 亦太不新矣. 當事, 人與我交厚, 我固不可不竭其所知, 以裨其不逮, 如或我認以自得之獨見而告彼, 彼業已以此說, 屢與人講劘, 便屬陳腐, 則當奈何, 此又不可不慮及.. 여기에 쉽고 간략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효과를 지닌 속언을 적절히 활용할 것이 추가될 수 있겠다.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변증을 통한 박물고증학의 세계를 구성하였다. 그는 벽()이 있다고 할 만큼 변증에 몰두하였는데, 참된 지식과 적확한 견해가 아니면 한갓 가담항설(街談巷說)에 불과하기에 군자는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변증의 자료가 된다면 비록 이언(俚諺)이나 야담(野談)까지도 수집했다고 하였다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燕銜石辨證說. 凡事物之辨證者, 若非眞知的見, 則其所辨者, 無非街譚巷說, 故君子不取也. 予於事物, 援古證今, 每欲發明其原委, 所聞者謏, 所見者寡, 故雖俚諺野談, 罔不搜羅. 或有一斑之窺, 則暖姝之紀載不已, 了無裁度, 每受大方之譏笑, 而不自恤焉. 甚矣, 其好辨之癖也..

 

조재삼(趙在三, 1808~1866)송남잡식(松南雜識)의 방언류(方言類)에 우리 속언을 150여개 정도 수록하고 필요할 때는 그 의미를 밝혀주었다趙在三, 松南雜識(林氏本) 枇卷.

 

 

조선의 속언에 대한 문인들의 인식 정리

 

조선조 전시기를 통해 살펴본 문인들의 속언에 대한 인식과 관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권근과 대다수의 문인지식인들의 인식으로서, 우리말이나 속언을 문장으로 쓰기에는 번다하고 비리하여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둘째, 서거정김종직ㆍ정구ㆍ홍만종이익정약용과 같은 지식인의 인식으로서, 교훈성ㆍ실용성과 함께 세교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한편 유한준은 그들과 의식의 층위를 조금 달리 하지만 넓은 차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는 속언이 비리하고 촌스러운 반면 신기(神機)가 유동하고 오묘한 이치에 핍진하고 사정에 절실하며 상도에 배합되고 사물의 법칙에 들어맞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셋째, 어숙권과 같이 속언의 유희성ㆍ해학성에 주목하는 유형이 있다.

넷째, 홍길주와 같이 문학 창작의 재료로 인식한 유형이 있다.

다섯째, 이규경이나 조재삼과 같이 유서를 구성하는 주요 지식 중 하나로 인식한 유형이 있다.

아래에서 이러한 속언 인식 유형에 따른 실제 문장에서의 활용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용

목차

1. 문제의 제기

2. 조선조 제가의 속언 인식

3. 속언 활용의 제양상

1. 공식적 언어생활에의 활용

2. 문학 창작의 재료로 활용

1) 함축과 비유, 참신성의 조성

2) 한시의 소재로 활용

3) 해학과 조롱의 수단

4) 변증 재료에의 활용

4.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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