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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9. 그때의 지금인 옛날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9. 그때의 지금인 옛날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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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관의 시는 옛날의 시가 아닌 지금의 시

 

 

자패가 말하였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의 시를 지음은. 옛 사람을 배웠다면서 그 비슷한 구석은 보이지를 않는구나. 터럭만큼도 비슷하지 않으니, 어찌 소리인들 방불하겠는가?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時俗의 잗단 것을 즐거워하니 지금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子佩曰: 陋哉! 懋官之爲詩也. 學古人而不見其似也. 曾毫髮之不類, 詎髣髴乎音聲. 安野人之鄙鄙, 樂時俗之瑣瑣, 乃今之詩也, 非古之詩也.

영처고이덕무가 젊은 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와 처녀處女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처녀처럼 순진한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자패子佩는 앞서본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도 나온 인물인데 누군지는 분명치 않다. 앞서는 말똥구리의 말똥 이야기가 좋다며 호들갑을 떨고 자기 시집의 제목으로 하겠다던 그가, 이덕무의 시집 영처고를 보고는 대뜸 왜 옛 사람을 배웠다면서 옛 사람과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느냐고 시비를 붙여온다. 그저 써 놓은 내용이라고는 오로지 촌사람의 비루함과 시속時俗의 자질구레한 것만 가득 들어있으니, 이를 어찌 옛 사람의 시와 한 자리에 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요컨대는 왜 옛날의 시를 쓰지 않고 지금의 시를 쓰느냐는 것이다.

 

 

내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볼만 하겠다. 옛날로 말미암아 지금 것을 보면 지금 것이 진실로 낮다. 그렇지만 옛 사람이 스스로를 보면서 반드시 스스로 옛스럽다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보던 자도 또한 하나의 지금으로 여겼을 뿐이리라. 그런 까닭에 세월은 도도히 흘러가고 노래는 자주 변하니, 아침에 술 마시던 자가 저녁엔 그 장막을 떠나간다. 천추만세는 지금으로부터가 옛날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이르는 것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저것과 견주어 하는 말이다. 대저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이요 저것은 저것일 뿐, 견주게 되면 저것은 아닌 것이니, 내가 그 저것이 됨을 보지 못하겠다. 종이가 이미 희고 보니 먹은 따라서 희어질 수가 없고, 초상화가 비록 닮기는 해도 그림은 말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余聞而大喜曰: 此可以觀. 由古視今, 今誠卑矣. 古人自視, 未必自古. 當時觀者, 亦一今耳. 故日月滔滔, 風謠屢變, 朝而飮酒者, 夕去其帷, 千秋萬世, 從此以古矣. 然則今者對古之謂也, 似者方彼之辭也. 夫云似也似也, 彼則彼也. 方則非彼也, 吾未見其爲彼也. 紙旣白矣, 墨不可以從白, 像雖肖矣, 畵不可以爲語.

그러자 그 말을 바로 받아 연암은 오히려 너스레를 떨고 나온다.

그래! 정말 자네의 말과 같다면 그거야 말로 볼만하겠군. , 한 번 따져나 보세. 옛날로 말미암아 지금 것을 본다면 지금 것이 보잘 것 없기야 하지. 그렇지만, 그 옛날도 당시에는 또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라네.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마땅히 보잘 것 없는 지금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오늘 우리가 아마득히 올려다 보듯 옛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세월은 쉬임 없이 흘러가 버리고, 노래도 변하고 문장도 변하고,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도 자꾸 바뀌게 마련일세. 오늘 아침에 역사의 무대 위에서 술 마시며 즐겁게 노닐던 자들도 저녁이 되면 그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나. 그럴진대, 진정한 의미의 옛날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보세. 지금 우리가 옛날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라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노래가 먼 훗날까지도 옛날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우리보다 앞선 옛날’, 박제화된 그때’ ‘거기를 맹목적으로 추수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는 것이 백번 옳지 않겠나? 그래야만 나의 지금은 또 훗날의 옛날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너무도 분명하고 간단한 이치건만,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니 안타깝단 말일세.

자네는 무관의 시를 두고 옛날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으니, 이것은 지금에 끝날 뿐 결코 옛날은 될 수 없다고 했지? ‘지금이란 것이 무언가? ‘옛날과 상대하여 하는 말일세. 비슷하다는 것은 무언가? ‘저것이것을 견주어 하는 말일세. ‘지금이 없고서야 옛날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마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필요한 것이지. 이미 비슷하다는 말 속에는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비슷해지려고만 해서는 끝내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이야. 자네가 생각하는 그 옛날이란 것이 또 다른 어떤 옛날과 닮은 것이었던가? 자네가 그 옛날을 높이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도 자신보다 앞선 옛날을 잘 흉내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을 걸세. 두보 이전에 두보와 같은 시인이 있었던가? 한유韓愈의 문장은 어떤 옛날을 본받았더란 말인가? 구양수歐陽脩는 한유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지금 보면 두 사람의 글은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네. 그렇다면 구양수가 한유에게서 배운 것은 무어란 말인가?

내 눈에 저것이 좋게 보인다 해서 내게 있는 이것을 버려두고 저것만 뒤쫓다 보면 결국 저것도 될 수 없고 이것마저 잃게 되고 말 걸세. 종이가 희니까 먹은 검은 것을 쓰게 되는 것이야. 만약 종이가 검다고 한다면 흰 먹을 써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이 바뀌면 표현도 달라지게 마련이고, 내용이 달라지면 그것을 담는 그릇도 변화해야 하는 것이네. 그렇지 않고 무작정 옛날만 좋다고 외쳐대고 지금 것은 유치하다고만 한다면, 흰 종이 위에 흰 먹으로 글씨를 쓰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 사람과 꼭 같이 닮게 그린 초상화도 결국 그 사람처럼 말하거나 생각할 수는 없단 말일세. 지금 사람이 옛 사람과 꼭 같이 닮겠다고 설쳐대는 것은 결국 그림더러 말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나? 무관의 시가 옛날의 시가 아니라 지금의 시라 한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지금 사람의 할 일이 옛 사람의 그림자만 따라다니는데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네.”

 

 

 

 

 

2. 동심으로 돌아가자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座床 아래에 들여놓는데,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 파도 꿈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수박의 겉을 핥는 자나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맛을 이야기할 수가 없고,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 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함께 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형상을 꾸미고 의관을 입혀 놓더라도 어린 아이의 진솔함을 속일 수는 없다.
雩祀壇之下, 桃渚之衕, 靑甍而廟, 貌之渥丹而鬚, 儼然關公也. 士女患瘧, 納其床下, 𢥠神褫魄, 遁寒祟也. 孺子不嚴, 瀆冒威尊, 爬瞳不瞬, 觸鼻不啑, 塊然泥塑也. 由是觀之, 外舐水匏, 全呑胡椒者, 不可與語味也, 羨隣人之貂裘, 借衣於盛夏者, 不可與語時也. 假像衣冠, 不足以欺孺子之眞率矣.

남산 아래 도저동에 가면 관운장의 사당이 있다. 관운장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관제신앙關帝信仰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되었던 명나라 군인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되어, 비교적 널리 숭신되었다. 남산 아래 있던 관운장 사당을 남묘南廟라 했고, 지금 신설동 길가에 꽤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동묘東廟라 했다.

도성의 남녀들은 학질에 걸리면 으레 관운장의 사당을 찾는다. 학질 걸린 환자가 관운장의 소상 앞에 서게 되면 그 무섭고 엄위한 관운장의 기상에 질려 정신이 다 나가고 넋이 빠져 그만 학질 기운이 간데없이 쑥 빠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한테는 이렇듯 영험 있는 관운장의 소상이 꼬맹이들 앞에서는 영 맥을 못춘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어른들처럼 무서워 벌벌 떨기는커녕, 그 위로 기어 올라가 눈동자를 찔러도 보고 콧구멍도 쑤셔 보지만, 그것은 눈도 껌뻑이지 못하고 재채기도 하지 못하는 그저 진흙으로 빚어놓은 소상일 뿐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보는데, 어른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관념을 덧씌워 두려움의 대상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나서도 연암은 예의 장광설을 계속 늘어놓는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수박이야 달고 시원한 것이지만, 겉만 핥고 있는데서야 그 맛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후추를 통째로 삼킬진대 그 맵고 톡 쏘는 맛을 무슨 수로 느낄 수 있겠나? 제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방법을 알아야 한단 말일세. 이와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좋은 것도 적재적소에 놓일 때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웃 사람의 담비 갖옷이 제 아무리 좋기로소니, 한 여름에 그것을 빌려 입는다면, 따뜻하기는커녕 온몸에 땀띠만 날 것이 아닌가? 옛 사람의 글이 제 아무리 좋다 해도, 지금 여기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읽는 이에게 괴로움만 안겨줄 뿐일 걸세. 형상을 꾸미고 그럴듯한 의관을 입혀 놓는다 해도 그것은 학질 걸린 어른들에게나 통할 뿐 어린아이들의 천진스런 안목마저 속일 수는 없다고 보네.”

이쯤에서 우리는 하늘이 검다고 가르치는데 불만을 품고 천자문 읽기를 거부하던 꼬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동심으로 돌아가자! 동심의 진솔함을 되찾자! 이것은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 문화계의 풍토 위에 내던지는 연암의 일갈이다. 다시 연암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대저 시절을 근심하고 풍속을 병통으로 여기는 자에 굴원屈原 같은 이가 없었지만, 초나라의 습속이 귀신을 숭상하였으므로 그의 구가九歌에서는 귀신을 노래하였다. 나라가 진나라의 옛 것을 살펴, 그 땅과 집에서 임금 노릇하고, 그 성읍을 도읍으로 삼으며, 그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면서도 삼장三章의 간략함만은 그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제 무관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의 풍기風氣는 땅이 중국과 다르고, 언어와 노래의 습속은 그 시대가 한나라나 당나라가 아니다. 만약 그런데도 중국의 법을 본받고, 한나라나 당나라의 체재를 답습한다면, 나는 그 법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담긴 뜻은 실로 낮아지고, 체재가 비슷하면 할수록 말은 더욱 거짓이 될 뿐임을 알겠다.
夫愍時病俗者, 莫如屈原, 而楚俗尙鬼, 九歌是歌. 按秦之舊, 帝其土宇, 都其城邑, 民其黔首, 三章之約, 不襲其法. 今懋官朝鮮人也. 山川風氣, 地異中華, 言語謠俗, 世非漢唐. 若乃效法於中華, 襲體於漢唐, 則吾徒見其法益高而意實卑, 軆益似而言益僞耳.

굴원이야 말로 시대를 근심하고 시속時俗을 염려했던 충신이었는데도, 당시 초나라의 습속이 귀신을 널리 숭상하였기에 그는 구가九歌에서 귀신을 끌어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지 않았던가? 귀신의 일을 믿어서가 아니라, 당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터질 듯한 답답함을 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일세. 그런데도 그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였다하여 우리 유가儒家의 지취旨趣는 아니라고 무작정 비방만 할 터인가? 어디 그뿐인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진나라 땅에서 진나라 백성으로 새 왕조를 세웠으되, 다만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잔혹한 법만은 간략히 고쳐 약법삼장約法三章의 변혁을 시도하였네. 그리하여 한나라는 겉보기에는 진나라 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으나, 완전히 새로울 수가 있었다네.

그렇다면 이치는 분명하지 않은가? 귀신은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고 하면 굴원의 문학은 어디에다 발을 붙일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귀신을 노래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귀신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가 일세. 땅도 그대로요 도읍도 그대로며, 백성도 그 백성이로되, 법은 그 법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한나라가 장구히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라네.”

 

 

 

 

3. 지금ㆍ여기의 이야기를 담아낸 무관이 지은 시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하지만 또한 천승千乘 제후의 나라이고, 신라와 고려가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민간에는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그럴진대 그 방언을 글로 적고 그 민요를 노래한다면 절로 문장을 이루어 참된 마음이 발현될 것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답습함을 일삼지 않고 서로 빌려와 꾸지 않고, 지금 현재에 편안해 하며 삼라만상에 나아감은 오직 무관의 시가 그러함이 된다.
左海雖僻, 國亦千乘, 羅麗雖儉, 民多美俗, 則字其方言, 韻其民謠, 自然成章, 眞機發現. 不事沿襲, 無相假貸, 從容現在, 卽事森羅. 惟此詩爲然.

이상 살펴본 연암의 이야기는 이렇다. 배울 것을 배워라. 옛 것이라고 무작정 좋은 것은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옛 것은 도리어 지금 것에 치명적인 해악이 될 뿐이다. 조선은 산천 풍기가 중국과 다르고, 말과 노래가 한나라나 당나라와는 같지가 않다. 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데도 무조건 중국의 법만 따르고 한나라 당나라의 체제만을 고집한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무관의 참 모습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은 한 여름에 담비 갖옷을 입고 진땀을 흘리면서 그래도 멋있지 않느냐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후추를 통째로 삼키면서도 정작은 아무 맛도 모르는 꼴과 방불치 아니한가? 이는 마치 진흙 덩어리 앞에서 얼이 빠져 정신을 놓고 벌벌 떨고 있는 어른들의 우스꽝스런 꼴이 아닌가? 다르게는 진나라 땅에서 진나라 백성을 다스리려면 진나라의 법도대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격이요, 제 아무리 초나라 습속이 귀신을 숭상한다 해도 군자는 그렇게 영합하는 법이 아니라고 나무라는 격이나 진배없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런 가락이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기眞機이다. 조선이 비록 궁벽한 땅이라고는 해도 천승千乘의 나라요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니, 그 말과 노래가 또한 볼만한 점이 없지 않다. 공연히 제 것도 아닌 중국 것에 정신을 팔고, 지금 것 아닌 옛날 것에 마음이 쏠려 자연스러움도 잃고, 진기眞機마저 잃고 만다면 그것은 앵무새의 흉내일 뿐 시라 할 수가 없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여 눈앞의 삼라만상을 보일 듯이 그려낸 무관의 시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시가 아니겠는가?

 

 

 

 

 

 

4. 동심으로 돌아가자, 처녀로 돌아가자

 

 

아아! 시경3백편은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 아닌 것이 없고, 뒷골목 남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패 땅과 회 땅의 사이는 지역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위로는 백성의 풍속이 제각금이다. 그런 까닭에 시를 채집하는 자가 여러 나라의 노래로 그 성정을 살펴보고 그 노래의 습속을 징험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찌 무관의 시가 옛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만약 성인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노래를 살피게 한다면, 영처고를 살펴보아 삼한의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요, 강원도 사내와 제주도 아낙의 성정을 살펴볼 수 있을 터이니, 비록 이를 조선의 노래라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嗚呼! 三百之篇, 無非鳥獸草木之名, 不過閭巷男女之語. 則邶檜之間, 地不同風, 江漢之上, 民各其俗, 故采詩者以爲列國之風, 攷其性情, 驗其謠俗也. 復何疑乎此詩之不古耶? 若使聖人者, 作於諸夏, 而觀風於列國也, 攷諸嬰處之稿, 而三韓之鳥獸草木, 多識其名矣; 貊男濟婦之性情, 可以觀矣, 雖謂朝鮮之風, 可也.

오늘날 우리가 경전으로 받들어 마지않는 시경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당시 새 짐승의 이름, 풀 나무의 명칭을 적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 내용이란 것도 당시 일반 백성의 이런 저런 살아가는 애환을 노래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풍속에 따라 차이가 난다. 진솔한 감정의 유로流露였기에 이제 와 그 시를 보면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자리가 잡힐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무관이 지금 여기서 느끼는 삶의 애환을 거짓 없이 노래한 것이 비록 촌사람의 데데함에 편안해하고, 시속의 잗단 것을 즐거워한 듯 보인다 해도 그것은 굴원이 부득이 귀신을 자신의 시에 끌어들였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날 시경에 뒷골목 남녀의 사랑 노래가 담겨 있고, 하잘 것 없는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누가 탓한단 말인가? 시경에서 하면 문제가 안 되고, 굴원이 하면 괜찮은데, 조선의 이덕무가 그렇게 하면 촌스럽고 데데하다고 비방하는가?

이제 만약 다시 채시관採詩官의 제도가 부활하여 여러 나라의 국풍國風을 채집하게 한다면, 그가 조선에 와서 취할 것은 오직 이 영처고뿐일 것이다. 다른 것에는 지금 여기의 진솔한 목소리를 찾을 수 없는데 반해, 영처고에는 이곳의 새 짐승, 풀 나무의 이름과, 무뚝뚝한 강원도 사내와 억센 제주도 아낙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처고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의 노래가 아닐까?

이상 영처고서를 원문에 따라 읽어 보았다. 요컨대 이 글을 통해 연암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문학은 바로 지금’ ‘여기의 진실을 담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운장의 소상 앞에서 관념적으로 벌벌 떠는 어른들의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왜 하늘을 검다고 가르치느냐고 대드는 어린아이의 진솔한 안목으로 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글에서 연암이 동심을 끌어 들인 것은 문집의 제목이 영처고인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처녀처럼쓴 원고라고 자신의 문집 제목을 붙인 이덕무의 생각에서 글의 실마리를 연 것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3영처문고嬰處文稿1에는 영처고자서嬰處稿自序란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스스로 영처嬰處의 변을 이렇게 적었다.

 

 

즐거워 함의 지극한 것은 영아만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장난치는 것은 애연藹然한 천진天眞이다. 부끄러함의 지극한 것은 처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감춤은 순수한 진정眞情이다. 사람으로 문장을 좋아하여 즐거워 장난치고 부끄러워 감추기를 지극히 하는 것이 또한 나만한 이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원고를 영처嬰處라 하였다.
娛之至者, 莫如乎嬰兒. 故其弄也藹然天也. 羞之至者, 莫如乎處女. 故其藏也, 純然眞也. 人之嗜文章, 至娛弄至羞藏者, 亦莫如乎余, 故其藁曰嬰與處.

일체의 인위가 배제된 어린아이의 오락과도 같은 천진天眞, 부끄러워 감추는 처녀의 순수한 진정眞情’,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에서 추구하려한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슨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교훈주의가 아니라 천진天眞진정眞情의 토로일 뿐임을 천명한 것이다.

 

 

 

 

 

5. 동심의 중요성을 외친 이지

 

 

그런데 문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천진과 진정의 모델을 동심童心에서 찾고 있는 것은 연암이나 이덕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명나라 이지李贄(1527-1602)동심설童心說과 무관하지 않다. 이지李贄는 이탁오李卓吾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의 이단적인 사상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했다는 비난 끝에 탄압을 받아 옥중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그는 동심설을 바탕으로 위선적인 도학道學과 가식적인 문학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동심설은 당대에 워낙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글이기에 조금 길지만 자료 소개 삼아 여기에 전문을 옮겨 소개한다.

 

용동산농龍洞山農서상西廂을 쓰며 끝에다 말하기를, “아는 이가 내가 여태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龍洞山農敍西廂, 末語云: “知者勿謂我尙有童心可也.”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진심眞心이다. 만약 동심을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夫童心者, 眞心也. 若以童心爲不可, 是以眞心爲不可也.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거짓을 끊고 순수히 참된 최초에 지녔던 한 생각의 본마음인 것이다.
夫童心者, 絶假純眞, 最初一念之本心也.
 
만약 동심을 잃게 된다면 진심을 잃는 것이고, 진심을 잃는다면 참된 사람을 잃는 것이다.
若失却童心, 便失却眞心; 失却眞心, 便失却眞人.
 
사람이 참되지 않으면 온전히 처음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人而非眞, 全不復有初矣.
 
동자童子라는 것은 사람의 처음이요, 동심童心이라는 것은 마음의 시작이니, 대저 마음의 처음을 어찌 잃을 수 있겠는가?
童子者, 人之初也; 童心者, 心之初也. 夫心之初, 曷可失也,
 
그런데도 어찌하여 동심을 갑작스레 잃게 되는 것일까?
然童心胡然而遽失也?
 
대개 그 처음에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을 통해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고 만다.
盖方其始也, 有聞見從耳目而入, 而以爲主于其內而童心失.
 
자라서는 도리道理가 듣고 보는 것을 좇아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其長也, 有道理從聞見而入, 而以爲主于其內而童心失.
 
나중에 도리와 듣고 보는 것이 날마다 더욱 많아지게 되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날마다 더 폭넓어져서,
其久也, 道理聞見日以益多, 則所知所覺日以益廣,
 
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좋아할만한 것임을 알게 되어 힘써 이름을 드날리고자하여 동심을 잃게 되고,
于是焉又知美名之可好也, 而務欲以揚之而童心失;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 추함을 알아 힘써 이를 덮어 가리려 하는데서 동심을 잃게 된다.
知不美之名之可醜也, 而務欲以掩之而童心失.
 
대저 도리道理와 문견聞見이란 모두 독서를 많이 하여 의리義理를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夫道理聞見, 皆自多讀書識義理而來也.
 
옛날의 성인이 어찌 일찍이 독서하지 않았겠는가?
古之聖人, 曷嘗不讀書哉!
 
그러나 설령 독서하지 않았더라도 동심은 진실로 절로 남아 있었을 것이요, 독서를 많이 했다손 치더라도 또한 이 동심을 지켜 잃지 않도록 했을 따름이니,
然縱不讀書, 童心固自在也, 縱多讀書, 亦以護此童心而使之勿失焉耳,
 
배우는 자가 도리어 독서를 많이 하고 의리를 아는 것이 동심에 장애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非若學者反以多讀書識義理而反障之也.
 
대저 배우는 자가 독서를 많이하여 의리를 알게 되면 동심에는 걸림돌이 되나니, 성인이 또 어찌 저서著書와 입언立言을 많이 하여 배우는 사람에게 장애가 됨을 하겠는가?
夫學者旣以多讀書識義理障其童心矣, 聖人又何用多著書立言以障學人爲耶?
 
동심이 막히고 보면 이에 있어 펼쳐 말을 해도, 언어가 마음속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게 되고,
童心旣障, 于是發而爲言語, 則言語不由衷;
 
드러나 정사政事가 되더라도 근저가 없게 되며, 저술하여 문사文辭가 되어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게 된다.
見而爲政事, 則政事無根柢; 著而爲文辭, 則文辭不能達.
 
안으로 머금어 아름다움이 드러나지도 아니하고, 도탑고도 알차 광휘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한 구절의 유덕有德한 말을 구하려 해도 마침내 얻을 수가 없다.
非內含以章美也, 非篤實生輝光也, 欲求一句有德之言, 卒不可得.
 
왜 그럴까? 동심이 막히고 보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문견聞見과 도리道理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以童心旣障, 而以從外入者聞見道理爲之心也.
 
대저 이미 문견聞見과 도리道理로 마음을 삼고 보면, 말하는 바의 것도 모두 문견과 도리의 말일 뿐 동심에서 절로 나온 말은 아니다.
夫旣以聞見道理爲心矣, 則所言者皆聞見道理之言, 非童心自出之言也.
 
그 말이 비록 공교하다 한들 내게 있어 무슨 상관이겠는가?
言雖工, 于我何與?
 
어찌 가짜 사람이 거짓말을 말하고 거짓 일을 일삼으며 거짓 글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豈非以假人言假言, 而事假事, 文假文乎?
 
대개 그 사람이 이미 가짜고 보면 거짓되지 않는 바가 없다.
盖其人旣假, 則無所不假矣.
 
이로 말미암아 거짓말을 가지고 가짜 사람과 말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하고,
由是而以假言與假人言, 則假人喜;
 
거짓 일로 가짜 사람과 말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 글로 가짜 사람과 이야기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한다.
以假事與假人道, 則假人喜; 以假文與假人談, 則假人喜.
 
어디를 가도 가짜 아닌 바가 없고 보면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無所不假, 則無所不喜.
 
온통 전부가 가짜고 보니 난장이가 어찌 진짜와 가짜를 변별할 수 있겠는가?
滿場是假, 矮人何辯也?
 
그렇다면 비롯 천하의 지극한 글이 있다 하더라도 가짜 사람에게 불태워져서 후세에 다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또 어찌 적다 하겠는가?
然則雖有天下之至文, 其湮滅于假人而不盡見于後世者, 又豈少哉!
 
왜 그럴까? 천하의 지극한 글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何也? 天下之至文, 未有不出于童心焉者也.
 
진실로 동심을 항상 지닐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문견이 서지 않았다 해도 글되지 않을 때가 없고 글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苟童心常存, 則道理不行, 聞見不立, 無時不文, 無人不文,
 
한결 같이 체격과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도 문장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無一樣創制體格文字而非文者.
 
시를 어찌 반드시 옛 선집만 따를 것이며, 문을 어찌 반드시 선진先秦만 기필하겠는가?
詩何必古選, 文何必先秦.
 
내려와 육조六朝가 되고, 변하여 근체近體가 되며, 또 변하여 전기傳奇가 되는 것이다.
降而爲六朝, 變而爲近體, 又變而爲傳奇;
 
변화하게 되면 원본院本도 되고 잡극雜劇도 되고 서상곡西廂曲도 되고 수호전水滸傳도 되고, 지금의 과거 시험도 되는 것이니,
變則爲院本, 爲雜劇, 爲西廂曲, 爲水滸傳, 爲今之擧子業,
 
선현들이 성인의 도를 말한 것은 모두 고금의 지극한 글이라, 시세時勢의 선후만으로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大賢言聖人之道皆古今至文, 不可得而時勢先後論也.
 
그런 까닭에 내가 이를 인하여 동심을 지닌 사람이 절로 문장을 이루는 것에 느낌이 있었던 것이니, 다시금 무슨 육경六經을 말하며, 무슨 논어論語맹자孟子니를 말한단 말인가?
故吾因是而有感于童心者之自文也, 更說甚麽六經, 更說甚麽語孟乎?
 
대저 육경과 논어』『맹자는 사관史官이 지나치게 높여 기린 말이 아니면 신하된 자가 지극히 찬미한 말일 뿐이다.
夫六經語孟, 非其史官過爲褒崇之詞, 則其臣子極爲贊美之語.
 
또 그렇지 않으면 우활한 문도門徒들과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내되 처음은 있으되 끝이 없거나, 뒷부분만 얻고 앞은 빠뜨려 그 본 바에 따라 책에다 써놓은 것일 뿐이다.
又不然, 則其迂闊門徒, 懵懂弟子, 記憶師說, 有頭無尾, 得後遺前, 隨其所見, 筆之於書.
 
후학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문득 성인의 입에서 나왔다하여 아예 경전이 된다고 지목하여 결정했던 것이니, 그 누가 그 가운데 태반이 성인의 말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後學不察, 便謂出自聖人之口也, 決定目之爲經矣, 孰知其大半非聖人之言乎?
 
설령 성인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요컨대는 또한 그때그때마다 일이 있어 나온 말로,
縱出自聖人, 要亦有爲而發,
 
병통을 인하여 약을 주고 때에 따라 처방을 내려 이러한 어리석은 제자들과 우활한 문도門徒들을 구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不過因病發藥, 隨時處方, 以求此一等懵懂弟子, 迂闊門徒云耳.
 
약으로 거짓 병을 치료하고 처방으로 정해진 아집을 논난한 것이 어찌 갑자기 만세의 지론至論이 될 수 있단 말인가?
藥醫假病, 方難定執, 是豈可遽以爲萬世之至論乎?
 
그렇다면 육경과 논어맹자는 바로 도학道學의 구실이 되고, 가짜 사람들이 모여드는 연못인 셈이니, 결단코 동심의 말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然則六經語孟, 乃道學之口實, 假人之淵藪也, 斷斷乎其不可以語於童心之言明矣.
 
아아! 내가 또 어찌 동심을 일찍이 잃어본 적이 없는 진정한 큰 성인聖人과 만나 그와 더불어 한 번쯤 글에 대해 말해볼 것인가?
嗚呼! 吾又安得眞正大聖人童心未曾失者而與之一言文哉!

! 세상에는 이미 동심童心을 잃어버린 가짜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가짜 글과 가짜 생각을 가지고 경전經傳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말씀이라 하며 그리로만 따라오라 한다. 하여 거짓이 난무하고 위선이 판치며 옛 사람의 죽은 망령만이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동심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로 향한 촉수觸手가 싱싱하게 살아 있던, 모든 것이 바람이었고 풀잎이었던 동심의 세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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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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