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까마귀의 날갯빛 - 2. 하나의 꼴 속에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본문

책/한문(漢文)

까마귀의 날갯빛 - 2. 하나의 꼴 속에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12:50
728x90
반응형

2. 하나의 꼴 속에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까마귀의 날갯빛은 정말 검을까? 아니 그보다 검은 것은 정말 나쁜 것일까? 가만히 보면 까마귀의 날개 속에는 갖가지의 빛깔이 감춰져 있다. 유금빛으로 무리지다가 석록빛으로 반짝이고, 햇빛 속에서는 자줏빛도 떠오른다. 자세히 보면 비췻빛도 있구나. 우리가 검다고만 믿어온 그 깃털 속에 이렇듯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었구나. 비췻빛 까마귀였다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푸른 까마귀라면 그렇게 경멸했을까? 햇살의 프리즘에 따라 바뀌는 까마귀의 날갯빛을 우리는 거부하고 있었구나. 까마귀는 검다. 까마귀는 검다. 검은 것은 더럽다. 더러운 것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것은 음험하다. 까마귀는 지저분하다. 까마귀는 음험하다. 가까이 가면 물드니 백로야 가지마라.

한 스킨 스쿠버가 깊은 바다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피가 초록빛이었다. 하도 신기해 자랑하려고 서둘러 물 위로 올라오니 그저 보통의 붉은 피였다. 햇빛의 장난에 깜빡 속은 것이리라. 물고기의 피는 붉은 색인가? 아니면 초록색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언제나 불변인가?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가? 피는 붉다. 까마귀는 더럽다. 속인은 모든 판단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깊은 바다 속에서 초록색으로 보이는 피의 빛깔이 신기하고, 검은 빛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석록빛을 인정할 수가 없다. 까마귀는 저대로 자유로운데 공연히 제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온 세상 사람들을 해오라비로 만들어야만 제 사명이 다할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못살게 굴고, 비난하고 강요한다.

 

 

!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 가운데 깃든 빛[]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은 검은[]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 있는 것에 태가 없는 것은 없다.

! 錮烏於黑足矣, 迺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竝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그리고 나서 연암은 비로소 본론을 꺼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색과 광, 과 태의 관계이다.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속인과 달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속인은 색과 형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러나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편에서 괴이쩍은 일이 저쪽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고, 이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저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 된다.

검다는 것만 가지고 다시 살펴보자. 검은 색에도 여러 가지 광이 깃들어 있다. 검다는 것이 환기하는 의미에는 어둡다, 시커멓다, 더럽다, 음험하다, 현묘하다, 마음씨가 나쁘다 등등의 다양한 층위가 있다. 까마귀는 더럽다고 할 수 있다면, 까마귀는 현묘하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인은 그럴 수가 없다. 다시 연암은 검다는 말을 흑··· 등으로 분절한다. 검다고 사물을 다 비추지는 못한다. 옻칠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고, 수면의 검은[] 빛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다. 검은 옷은 사물을 비추지 못하고, 어둠도 사물을 비추지는 못한다. 단지 검다는 말 속에도 뜻밖에 이렇듯 다양한 의미망이 존재하고 있다. ‘검다라는 단어를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아라. 그 색에 현혹되지 말고, 그 빛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꼴 속에는 다양한 태가 깃들어 있다. 나는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기쁠 때 웃는 나와 분노로 성내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가? 아버지로서 근엄하게 야단치는 내가 있고, 자식으로서 공손히 순종하는 내가 있다. 교실에서 강의할 때의 나와, 스승 앞에서 가르침을 청할 때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판이하다. 이럴 때 나는 나인가? 그 다양한 태를 나는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융은 퍼소나persona라 이름 짓고, 시인은 시적 화자라 부른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좀 전과 지금이 같지 않은 나, 그 많은 나들을 나는 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속인은 싸늘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단 하나의 나, 나다운 나, 완성된 나를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한시미학산책

1. 달사와 속인의 차이

2. 하나의 꼴 속에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3. 겉모습에만 현혹되는 사람들

4. 달사는 적고 속인만 많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