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③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
筆下隨人世豈傳 | 앞 사람을 흉내 내면 그 누가 알아주리. |
好句眼前吟不盡 | 좋은 시구 눈앞에서 끝없이 읊조려도 |
痴人猶自管窺天 | 어리석은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라. |
예전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임제(臨濟)는 할(喝)로, 덕산(德山)은 몽둥이로 대답하였다. 선가(禪家)의 화두(話頭)도 송대(宋代) 이후로 오면 아포리즘의 어조를 띄게 되어 영동(靈動)하는 활법(活法)으로서가 아닌 어정쩡한 흉내가 되고 만다. 자가(自家)의 체인(體認) 없는 흉내만으로는 무문(無門)의 관문도 소용이 없다. 시(詩)의 법도 이와 같다. 눈앞에 놓인 좋은 시구들을 백날 읊조려 본들, 미묘한 깨달음과 만나지 못하면 종내 한 소식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서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생기(生機)를 느낄 일이지, 어투를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니 그 하늘이 온전히 보일 턱이 없다.
예전 사명당이 금강산 유점사로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어디서 왔는고?” “어디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만보계를 달고 온 것도 아니니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도 대개 오늘 내가 걸은 시간이 몇 시간이니 한 시간에 몇 걸음을 걸을까. 뭐 이런 궁리를 하고 앉았다가는 할(喝)이나 몽둥이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사명당은 즉시 벌떡 일어난다. 양 팔을 활짝 펴들고 한 바퀴 빙 돈다. “이렇게 왔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어느 길로 왔는고?” “옛 길을 따라 왔습니다.” 스승은 벌컥 소리 지른다. “옛 길을 따르지 말라.” 제법 근사한 대답을 했다고 득의하던 사명당이 이번엔 한방 제대로 맞았다. 이른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逢佛殺佛]’는 심법(心法)의 전수이다.
옛 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禪)에 도달하고 시(詩)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추사(秋史)는 한 사람만으로 족하다. 추사(秋史)와 방불한 조희룡(趙熙龍)은 오히려 그로 인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 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그렇다면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증기(曾幾)가 “시를 배움은 참선(參禪)함과 같나니, 삼가하여 죽은 시구일랑은 거들떠보지 말라[學詩如參禪, 愼勿參死句].”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이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 배움 같거니 |
語要驚人不在聯 | 말이 사람 놀라게 해야지 꾸밈만으론 안 되지. |
但寫眞情幷實境 | 단지 진정(眞情)과 실경(實境)만을 그려낼 뿐 |
任他埋沒與流傳 | 묻히고 전함은 내 맡겨 둘 일이다. |
말이 사람을 놀래키려면 어떠해야 할까? 낡고 정체된 인식을 깨부수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자구를 탁련(琢聯)하는 기교로 성취될 수 없다. 절묘기발한 수사도 능사가 아니다. 시인은 거짓 없는 진정(眞情)을 꾸밈없는 실경(實境)에 담아 그려낼 뿐이다. 내 시가 뒷세상에 잊혀질까, 길이 기억될까 하는 것은 내 간여할 바 아니다.
인용
1. 산은 산, 물은 물①
2. 산은 산, 물은 물②
3. 산은 산, 물은 물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