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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 1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④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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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 1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④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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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南窓終日坐忘機 하루 종일 남창에서 마음 비워 앉았자니
庭院無人鳥學飛 뜨락에 사람 없어 새가 날기 배우네.
細草暗香難覔處 가는 풀의 여린 내음 찾기가 어려운데
淡烟殘照雨霏霏 엷은 안개 지는 해에 비는 부슬부슬.

 

강희맹병여음(病餘吟)이다. 큰 병을 앓은 뒤라서인지 눈빛이 더없이 투명하다. 볕 좋은 남창에 기대 해바라기를 하고 앉았는데, 발길 끊긴 마당에선 어린 새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첫 비상을 시작하려 푸드득거리는 어린 새의 날갯짓에서 시인은 뜨거운 생명력을 느낀다. 그 생명력은 가는 풀의 여린 향기로 전이되어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두리번거리는 눈길에 희뿌연 안개와 저녁노을,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선취(禪趣)가 물씬하다.

 

흔히 선시를 말하는 것을 보면, 앞에서 본 언어도단의 세계를 선시의 정수로 보아 다다이즘이나 쉬르리얼리즘의 시정신에 견주기도 한다. 겉만 보면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같지가 않다. 언어의 충격적 배열이나 일상성의 파괴는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설명하려는 무도함을 한 폭 풍경으로 읊는다면 이쯤 될 것이라는 비유이다. 오해가 깊다 보니 말장난도 모두 선시가 된다.

 

한편에선 승려가 쓴 시면 모두 선시라고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시집이나 관련 연구서들에서 선시의 기준은 더욱 혼란스럽다. 불리(佛理)의 교조적 외침도 다 선시라 한다. 선시는 결코 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시는 언어도단을 즐기는 파괴적 취미도 아니고, 승려라는 신분으로 묶어 둘 수도 없다. 선시는 관성을 거부하고, 투명한 정신으로 사물과 만날 것을 요구한다. 선시는 자아를 버리고 사물과 하나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과 아()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존재 차원의 변환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 수도 없겠다. 고려 때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버림은 어떨꼬?” 통쾌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새로 시작한다. 담배 한 갑을 사면 스무 번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운운한 것은 예전 어느 시인의 당선 소감이다. 상쾌하지 않은가. 시와 선은 이렇게도 만난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산은 산, 물은 물

2. 산은 산, 물은 물

3. 산은 산, 물은 물

4.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5. 선기(禪機)(詩趣)

6.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7.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8.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9.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10.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11.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12.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13.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1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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