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등장인물 캐리커처
장복과 창대, 그리고 말
연암의 수행인들, 장복은 하인이고, 창대는 마두(馬頭)다.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일자무식인 데다 고지식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환상의 커플’ 중화주의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종종 어이없는 해프닝을 저질러 연암을 질리게 한다. 갑작스럽게 열하행이 결정되면서 장복이만 연경에 남게 되자,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연암이 그걸 빌미로 ‘이별론’을 한바탕 늘어놓는다. 창대는 가는 도중 부상에, 몸살에 거의 죽을 고생을 한다. 덕분에 연암이 창대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이 고지식 커플에 비하면 말이 훨씬 더 지혜롭다. 이름은 없지만, 여행 내내 연암과 한몸이 되어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호곡장론(好哭場論)」ㆍ「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등 연암의 ‘불후의 명작’들은 모두 이 말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선지 연암의 ‘말 사랑’도 지극하다. 종마법(種馬法)에 대한 지식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고, 말고기 먹은 하인을 혼찌검을 내기도 한다.
득룡이
열네 살 때부터 중국을 드나든 ‘중국통’, 중국어에 능통한 데다 처세술도 능란하기 이를 데 없어 사행단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중국으로 귀화할까봐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놓을 정도로 수완이 좋다. 책문을 통과할 때 청나라 사람들을 기막힌 수법으로 멋지게 속여 넘긴다. 이름하여 ‘살위봉법(殺威棒法)!’
정진사
이름은 각(珏), 연암의 동행인 가운데 하나다. 식자층이긴 하나 별로 똑똑한 구석은 없는 인물이다. 『열하일기』에 아주 많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띨띨한’ 모습으로 나온다. 연암이 벽돌론을 설파할 때, 말 위에서 졸다가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잠꼬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걀을 특히 좋아해 ‘초란공’이란 별명이 붙었고, 한 점포에서 연암과 함께 「호질(虎叱)」을 베껴 쓰기도 했다. 물론 엉터리로 베껴서 연암이 다시 뜯어고쳤지만.
정사(正使) 박명원
사행단의 총지휘자, 연암의 삼종형이다. 연암 같은 무직자가 연행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형님의 빽’ 덕분이다. 근엄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다. 일정이 빡빡하자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행들을 재촉해 임무를 완수한다. 열하에선 판첸라마 덕분에 몇 번이나 곤경에 처한다. 연암에 대해서는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쌍림(雙林)
호행통관(護行通官), 형식적으로는 조선 사행단의 ‘보디가드’인 셈인데, 실제로는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시건방진 데다 덜떨어진 성품에 조선말도 서툴기 짝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암과 신경전을 벌인다. 이 장면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지만, 장복이는 중국말로, 쌍림은 조선말로 시시덕거리는 부분은 여지없이 ‘허무개그’의 원조다.
배생(裵生)과 그의 친구들
연암이 성경(盛京, 심양)에서 만난 장사치들 연암의 박식과 호방함에 홀딱 반해 아낌없는 정성을 베푼다. 연암 또한 그들과의 사귐에 빠져 온갖 속임수와 기지를 동원해 객관을 탈출한다. 달빛을 받으며 이들이 접선(?)하는 장면은 한편의 시트콤이다. 문자속은 연암에게 달리지만, 세상을 두루 떠돌아다닌 인물들답게 인생철학과 연륜이 만만찮다. 연암이 ‘유리창(琉璃廠)’에 가서 사기를 당할까봐 밤새워 ‘골동품 목록’을 상세히 적어주기도 한다. 「속재필담(粟齋筆談)」ㆍ「상루필담(商樓筆談)」이 그 생생한 보고서다.
왕민호
곡정이 그의 호다. 열하의 태학에서 만난 한족 선비. 뜻은 높으나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고 있다. 연암과 비슷한 처지인 셈. 연암과 의기투합하여 6일 동안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필담을 펼쳤다. 검열 때문에 필담 중간중간 종이를 먹어치우거나 태우곤 한다. 연암이 그 속내를 캐기 위해 다방면의 전략을 구사한다.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추사시(鄒舍是)
왕곡정 주변의 젊은 선비. 생긴 것도 멀쩡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속이 뒤틀려 있어 상대를 괴롭히는 게 취미다. 비분강개한 어조로 유불도를 넘나들며 궤변을 늘어놓는 광사(狂土). 연암도 그의 수법에 말려 곤경을 치른다.
판첸라마(Panchen Lama, 班禪額爾德尼)
서번(티베트)의 대보법왕, 원래는 달라이라마 다음의 2인자지만, 달라이라마 사후에 최고통치자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달라이라마에 해당하는 셈. 『열하일기』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주로 문헌과 구전을 바탕으로 묘사되어 있다. 영적 능력으로 수많은 이적을 행한다.
이 판첸라마로 인해 조선 사신단은 여러 가지 곤경에 봉착한다. 이름하여, 판첸라마 대소동! 그만큼 낯설고도 신비로운 존재였던 것. 지금의 달라이라마께서 그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강희제ㆍ옹정제·건륭제
청나라의 성군 트리오, 연암의 연행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명목으로 갔으니, 청왕조로선 절정을 구가하는 한편 노쇠의 징후가 엿보이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열하일기』에는 건륭제뿐 아니라, 강희제ㆍ옹정제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만큼 이 황제들이 남긴 치적과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건륭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하면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하나, 총명함과 정력은 세계제국의 중심을 이끄는 황제로서 손색이 없다. 조선 사행단에 대해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사행단이 ‘판첸라마 대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몹시 실망하기도 한다.
『강희제』(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이산, 2001)와 『옹정제』(미야자키 이치사다, 차혜원 옮김, 이산, 2001)를 읽으면, 『열하일기』에 나오는 이 세 황제들에 대해 좀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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