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질 원량 신잠이 영동군에 부임할 때 헤어지며 주다
증별당질원량잠지임영동군(贈別堂姪元亮潛之任嶺東郡)
신광한(申光漢)
楓岳東來嶺隔天 古城牢落海雲邊
永郞遺跡丹書在 應結三千作地仙
一萬峯巒又二千 海雲開盡玉嬋姸
少時多病今傷老 終負名山此百年
追惟勝跡發長嗟 三十年來夢一過
疏雨落霞鳴玉路 馬蹄曾踏海棠花
山齋寒夜燭熒熒 坐覺風來竹有聲
一作天涯知己別 春光空入洛陽城
平居不作尋常會 頭白還悲送別筵
落羽遠分驚到骨 政成唯待召歸年 『企齋別集』 卷之一
해석
楓岳東來嶺隔天 풍악동래령격천 | 풍악에 동쪽으로부터 오는 산고개는 하늘과 동떨어져 |
古城牢落海雲邊 고성뢰락해운변 | 옛 성은 바다 구름 곁에서 쓸쓸하네. |
永郞遺跡丹書在 영랑유적단서재 | 영랑호의 유적엔 일편단심의 편지 있으니 |
應結三千作地仙 응결삼천작지선 | 응당 3000개가 맺어져 땅의 신선이 되었지. 영동엔 예전에 3000명의 무리가 있었으니 영랑이 곧 그 하나이다[嶺東, 舊有三千徒, 永郞乃其一也.] |
一萬峯巒又二千 일만봉만우이천 | 일만 봉우리에 또 이천 봉우리. |
海雲開盡玉嬋姸 해운개진옥선연 | 바다구름 개자 옥 같은 봉우리들 선연해. |
少時多病今傷老 소시다병금상로 | 어려선 병이 많았고 지금은 늙음에 속상하여 |
終負名山此百年 종부명산차백년 | 마침내 명산을 저버린 나의 삶 백년. 풍악에 유람하고자 했으나 못했다[欲遊楓岳而不得] |
追惟勝跡發長嗟 추유승적발장차 | 되돌아보면 오직 명승지의 유적이 긴 탄식을 내쏟게 하니 |
三十年來夢一過 삼십년래몽일과 | 30년 이래에 한 번 꿈 꾼 듯하여라. |
疏雨落霞鳴玉路 소우락하명옥로 | 가랑비와 지는 노을이 옥 같은 길을 울리니 |
馬蹄曾踏海棠花 마제증답해당화 | 말은 울며 일찍이 해당화를 밟고 있구나 일찍이 영동을 풍자하며 기억을 추억한 것이다[曾刺嶺東, 追記] |
山齋寒夜燭熒熒 산재한야촉형형 | 산에 있는 서재의 추운 밤에 등불만 가물가물 |
坐覺風來竹有聲 좌각풍래죽유성 | 앉아 바람이 불어 대나무 소리 있는 걸 알게 됐네. |
一作天涯知己別 일작천애지기별 | 한 번 하늘가에서 지기와 이별하였는데 |
春光空入洛陽城 춘광공입낙양성 | 봄빛은 부질없이 낙양성으로 드는구나 밤에 산에 있는 서재에서 이별했던 일[別夜山齋書事] |
平居不作尋常會 평거부작심상회 | 평상시엔 보통 모일 계획조차 없었는데 |
頭白還悲送別筵 두백환비송별연 | 머리 세자 도리어 송별연이 서글퍼지는 구나. |
落羽遠分驚到骨 락우원분경도골 | 떨어지던 깃이 멀리서 나누어져 놀래키듯 나에게 이르니 |
政成唯待召歸年 정성유대소귀년 | 정히 오직 부름 받아 돌아올 해만을 기다린다네. 『企齋別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당질 원량인 신잠(申潛)이 영동군의 임소로 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로,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일만 이천 봉우리인 금강산, 바다에 가득한 구름이 걷히자 옥빛처럼 곱디곱다. 젊은 시절에는 병이 많아 오르지 못했고 지금은 늙어서 찾지 못해 명산인 금강산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세주(細注)에 ‘풍악산에 놀러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欲遊楓岳而不得]’이라는 언급으로 보아, 신광한은 금강산에 오르고자 했으나 여건이 허락지 않아 오르지 못한 작가의 아쉬움을 읽을 수 있다.
신광한은 16세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도학적(道學的) 면모와 사장적(詞章的) 면모를 겸하였으며, 훈구파의 가계에다 사림적(士林的)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송풍(宋風)에서 당풍(唐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의 시(詩)성향에 대해서는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에서 박은(朴誾)ㆍ이행(李荇)ㆍ정사룡(鄭士龍)ㆍ노수신(盧守愼)ㆍ박상(朴祥)ㆍ성현(成俔)ㆍ신광한(申光漢)ㆍ황정욱(黃廷彧) 등을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 규정했으나, 이후 학자들에 따라 신광한을 제외하기도 한다.
『해동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한 생평(生平)이 실려 있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라 하며, 호는 낙봉이다.
중종 경오년에 급제하고 기묘년에 배척당하여 여주(驪州)에 우거하였다. 후에 이조 판서로 문형(文衡)을 맡았다. 명종 을사년에 다시 충순당(忠順堂)에 들어가 공신에 참여했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좋지 않게 여겼다.
벼슬은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기재집(企齋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高靈人 字漢之 一曰時晦 號駱峯 我中廟庚午登第 己卯被斥 寓居驪州 後以吏曹判書典文翰 我明廟乙巳 再入忠順堂參錄 人多少之 官至贊成 謚文簡 有企齋集行于世].”
문형(文衡)을 맡은 신광한이지만 글공부는 늦게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의 글공부와 재주에 대한 일화(逸話)가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실려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기재 신광한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늙은 여자 종의 손에서 길러졌다. 나이 18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이웃 아이와 냇물에서 장난하다가 이웃 아이가 공(公)을 발로 차서 물속에 엎어지게 하였다. 공이 성내어 꾸짖기를, ‘너는 종인데, 어찌 감히 공자(公子)를 업신여기느냐?’라고 하니, ‘그대처럼 글을 모르는 자도 공자란 말인가? 아마 무장공자(無腸公子, 게[蟹]의 별명)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크게 부끄럽게 여겨 비로소 마음을 고쳐먹고 글을 읽었는데, 문장이 물 솟아나듯 하였다. 다음 해에 「만리구(萬里鷗)」라는 부(賦)를 지어 예위(禮圍, 생원·진사의 覆試, 예조에서 試取하였기 때문에 예위라고 함)에서 장원하고, 얼마 안 가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문형(文衡, 大提學의 별칭)을 맡은 것이 20년이나 되었다. 기재는 비록 문장에는 능했으나 실무(實務)의 재주는 없었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송(訴訟)이 가득 차 있었으나 판결을 내리지 못하여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혹이 좁아서 수용할 수가 없었다. 공이 옥사(獄舍)를 더 짓기를 청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판서를 바꾸는 것만 못하다. 어찌 옥사를 증축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허자(許磁)로 대신 시켰는데, 허자가 당장에 다 처리하여 버리니 옥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申企齋光漢 少失父母 鞠於老婢 年十八猶不知書 與隣兒戱于川 隣兒踢公仆水中 公怒叱曰 汝隷奴何敢凌公子 如君不知書者 亦公子耶 是必無腸公子也 公大慚 始折節讀書 文藻水湧 明年以萬里鷗賦 魁禮圍 未幾登第 典文衡者二十年 企齋雖能文章 而無實才 嘗判刑部 訴訟塡委 不能決囚繫滿獄 獄不能容 公請加構獄舍 中廟曰不若易判書 何必改構 遂以許磁代之 許裁決立盡 囹圄遂空].”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236~23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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