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당 - 신라에서 송 - 고려로 멤버를 교체한 중화세계는 어느새 강성해진 비중화세계의 거센 도전에 시달린다.
왕건의 모순에 찬 「훈요 10조」는 중화 대 비중화의 대결 구도를 예고한다. 하지만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세계의 만만한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장 모순된 출발
첫째 모순 중앙정부 vs 지방 호족
무혈 쿠데타로 고려를 세웠고, 평화롭게 신라 정권을 인수했으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후백제마저 접수해 후삼국 통일을 이룬 왕건은 정말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그러나 역시 공짜란 없는 걸까? 두꺼비한테도 헌 집을 줘야 새 집을 얻을 수 있듯이 대개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허무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됐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건국자 왕건은 죽을 때까지 승자의 행복한 삶을 누렸지만 그가 생전에 심어놓은 모순의 씨앗 때문에 이후 고려는 재건국이나 다름없는 진통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이다. 이제 고려는 한반도의 통일왕조가 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니 웬 말일까? 이 모순은 아직 후삼국시대가 한창이던 고려 건국 시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삼국이 대치한 형국이 옛 삼국시대와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후삼국 시대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이 시대는 오리지널 삼국시대와 무관하다. 우선 신라만 해도 7세기의 젊고 패기에 찬 왕국이 아니었고, 후백제와 고려는 이름만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했을 뿐 영토와 주민, 또는 왕실의 혈통으로 봐도 옛 두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견훤이 의자왕(義慈王)의 한을 풀겠다고 외친 것이나, 궁예가 고구려의 수도를 되찾겠다고 부르짖은 것은 처음부터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들이 그런 제스처를 취한 이유는 뭘까? 일단 신분상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견훤은 하급 무관 출신이고 궁예는 비록 왕의 서자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주장일 뿐 공인된 사실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 봉기했을 당시 그들이 거느린 군대는 도적떼나 다름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봉기에 성공하고 지역의 패자로 떠오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기세를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하려면 아무래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럴 때 화려했던 옛 왕조들의 이름은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구호를 외치는 자가 있다면 듣는 자도 있을 것이다. 견훤과 궁예는 누굴 향해 구호를 외쳤을까? 백성들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직 서양에서조차 일반 시민의 시대가 도래하려면 60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구호의 대상은 호족들이다. 대권후보로 나선 견훤과 궁예에게 대권을 안겨다 줄 ‘유권자’는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통일신라시대 내내 중앙정부는 경주 인근에만 지배력을 행사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종의 지방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국이 단일한 권력 하에 편제되어 있었지만, 각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호족들이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과 사병 조직까지 거느리고 토지제도, 조세제도, 군사제도, 관리 임용제도 등에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지지를 얻으면 그들이 지닌 영토와 주민, 군대를 모조리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누구보다 확실한 유권자가 아닌가?
왕건이 견훤과 궁예보다 앞선 점은 유권자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그는 카리스마의 허와 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궁예의 성장과 몰락에서 보듯이 잘 쓰면 약이 되지만 한 번만 삐끗해도 독이 되는 게 카리스마다. 어차피 권위에서는 궁예를 능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왕건은 휘하의 호족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기보다 차라리 그들을 회유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단을 구사했다. 사실 그가 즉위한 918년에 이미 측근들이 두 차례의 반역 음모를 꾸민 일이 있었으니 그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즉위한 뒤 곧바로 호족들에게 일일이 사신을 보내 이른바 중폐비사(重幣卑辭, 호족들을 후히 대우하고 자신은 낮춘다)의 저자세를 취했다. 935년 자신에게 투항해 온 견훤을 상부(上父)라고 부르며 받든 것은 그런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다(견훤은 그보다 불과 열 살 정도 위였으니 왕건의 저자세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칫 호족들이 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해지는데, 일단 그가 생각한 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其人)제도다. 그러나 지방 관리가 아닌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볼모 삼아 억류하는 것이므로 상수리보다는 강력하지만, 그것으로 호족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더 안전한 통제 메커니즘이 필요한데, 여기서 왕건은 아주 대단히 효과적인 방안을 구상해낸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과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면 된다.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들을 거느리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어 있으므로 논외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부인 스물셋)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왕건은 정주(개성 부근), 나주, 충주, 황주 등 신라 지역을 제외한 전국 요처를 지배하는 호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신라를 접수한 뒤에는 경순왕(敬順王)의 사촌누이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이 지역에도 튼튼한 혈연의 뿌리를 내렸다. 또한 경순왕에게는 사심관(事審官)이라는 직책을 내려 경주 지역을 관장하게 하는데, 이렇게 지역의 우두머리를 중앙에서 임명하는 제도는 나중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마땅히 시집보낼 딸이 없는 호족 가문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런 집안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걱정할 건 없다. 어쨌거나 가족으로 만들면 되니까. 왕건은 통혼으로 직접 연결할 수 없는 호족 가문(주로 세력이 작은 호족)에게는 자신의 성인 왕씨를 하사해서 어거지로라도 친족관계로 만들었다【통혼도 그렇지만 사성(賜姓, 성씨를 하사함)도 왕건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다. 기원전 3세기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은 군국제(郡國制)를 전국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인 유(劉)씨를 지방 수장들에게 하사했다(심지어 그는 오랑캐인 흉노의 족장들에게도 유씨 성을 내렸다).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나 촉한을 세운 유비도 한나라 초기에 유씨를 남발한 덕분에 황실의 성을 가지게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그런데 유방 역시 사성의 원조는 아니다. 진짜 원조는 주나라 시대의 종법제도(宗法制度)다. 주나라는 지배집단을 대종(본가)과 소종(분가)으로 나누어 끈끈한 혈연관계로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것을 종법봉건제라고 부른다. 이것에서도 역시 주나라가 중국인들의 영원한 고향이자 모든 동양식 질서의 근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든 조치들이 왕건 본인에게는 확실한 안전 장치로 작용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왕이 아닌 신분이라면, 즉 새 왕조의 건국자라면 누구나 건국 초기에는 왕권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새 왕조를 건국하기 전에는 전 왕조의 신하(혹은 전 왕조의 반란자)라는 신분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으로 고속 상승하는 셈이므로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건 불을 보듯 뻔하다. 비록 왕건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았고 신민들의 지지를 얻었다지만, 지방 호족들이 왕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오로지 충정의 마음만 가득 담겨 있지는 않다. 그래도 왕건은 건국자였으므로 비교적 권위와 카리스마가 인정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건국의 당사자가 아닌 그의 아들들에게도 그런 권위가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은 알려진 자들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다. 이 왕자들이 고려 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 송악에서 개성으로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개성의 지도다. 고려의 도읍지가 되기 전까지 이곳은 송악(松岳)으로 불리다가 919년에 왕건이 수도로 삼으면서 개주(開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비롯되어 고려시대에는 주로 개성이나 개경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도 대체로 개성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까지 일반에서는 송악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킹메이커들의 내전
왕건이 각지에 뿌려놓은 혈연의 씨앗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불화의 씨앗으로 변한다. 많은 아내를 두고 많은 아들을 얻은 것까지야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보면 복 받았다 하겠지만, 그 때문에 상속자가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된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이인 무(武)가 혜종(惠宗, 재위 943~945)으로 즉위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비록 맏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더구나 그는 그 왕자들의 실제적 서열을 가르는 기준에서 결격 사유가 있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이므로 진짜 킹메이커는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혜종의 어머니는 나주 오씨, 그러니까 910년에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나주를 점령했을 때 인연을 맺은 집안인데, 당시에는 지방의 큰 토호였지만 전국이 통일된 지금은 미약한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왕건은 사실상 자신의 첫 아내이자(실제 첫 아내인 개성의 유씨는 왕건에게서 버림을 받고 절에 들어갔다) 첫 번째 세력 기반이었던 만큼 생전에 오씨와 맏이인 무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베풀었다. 아마 자신이 죽고 나서 복잡해질 왕위계승 문제를 미리 짐작한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무에게 자신의 심복이었던 개국공신 박술희(朴述熙, ?~945)를 후견인으로 붙여주었다. 사실 무가 태자로 책봉된 데는 박술희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으므로 그때부터 박술희는 무를 간판으로 삼아 왕위계승전에 출전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혜종이 즉위한 것으로 박술희는 야망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랐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도전보다 방어가 어려운 게 타이틀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자는 한 체급쯤 위인 강펀치의 소유자, 바로 경기도 광주(廣州)의 호족인 왕규(王規, ?~945)다. 왕건에게 두 딸을 왕비로 들인 그는 외손주인 광주 원군을 왕으로 밀기 위해 혜종을 두 차례나 암살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혜종은 자신의 침실에까지 자객을 보낸 자가 바로 왕규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했으니, 왕규의 위세가 어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사실 혜종은 왕규의 야망을 달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그의 아내 중에 왕규의 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도 역시 아버지 왕건처럼 정략결혼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듯하다(혜종이 왕규를 응징하지 못한 데는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도 있었을까?). 그 덕분에 혜종은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면서 동서간이라는 묘한 사이가 되었는데, 중국의 당나라 황실(측천무후와 양귀비의 경우)이나 신라의 왕실 도 그랬듯이 고려 왕실에서도 근친혼은 일반적이었으므로 욕 먹을 일은 못 된다. 오히려 왕건은 미약한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바 있었다(근친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유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시대부터다)】. 결국 혜종은 재위 2년 만인 945년에 병으로 죽었는데, 당시 서른셋의 한창 나이였음을 감안하면 과연 진짜 병사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혜종에게는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왕위계승은커녕 제 목숨이나 걱정해야 할 팔자다. 건국자인 왕건의 체면을 봐서 1라운드를 탐색전으로 넘겼던 호족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챔피언 결정전에 나선다.
만약 왕규가 혜종을 암살했다면 그건 죽 쒀서 개 준 격일 것이다. 광주원군은 단독 대권후보가 아니었고 또 다른 막강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 호족인 유씨를 외가로 둔 왕자 요(堯)는 외가만이 아니라 장인도 든든한 ‘빽’이다(그의 장인은 바로 견훤의 사위로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박영규였는데, 왕건도 박영규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적이 있으니 왕요도 배다른 형인 혜종처럼 아버지 왕건과 부자간이자 동서간이 된다). 게다가 그는 혜종에 이어 왕건의 차남이므로 형식상의 서열로 봐도 광주원군보다 앞선다. 사실 혜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왕규가 진정한 적수로 여겼던 것은 혜종이나 박술희가 아니라 바로 충주 세력이었다. 과연 왕규가 걱정한 것처럼 혜종이 남긴 왕위는 광주원군이 아니라 요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정종(定宗, 재위 946~949)으로 즉위한다. 아마 이 과정에는 혜종의 사후에도 킹메이커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던 박술희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왕규가 맨먼저 살해한 인물도 바로 박술희였다. 하지만 충주 세력은 작은 ‘갱단’이 아니라 이미 서경(평양) 세력과도 연계되어 있는 ‘빅패밀리’였다. 왕규의 반란이 일어나자 왕건의 종제이자 서경의 실력자였던 왕식렴(王式廉, ?~949)은 즉각 군대를 몰고 개경(개성)으로 내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왕규 일당 300여 명을 대거 처형한다.
왕식렴의 충성에 감격한 탓일까? 아니면 중부 지방의 호족들이 판치는 개경에 신물이 난 탓일까? 아무튼 정종은 내친 김에 왕식렴의 의견을 좇아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개경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서경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즉위한 왕답게 그는 개경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지만, 오히려 그게 화근이 되어 결국 재위 3년 만에 친아우인 소(昭)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죽는다(정종에게도 경춘원군이라는 왕자가 있었으나 혜종의 아들들처럼 그도 역시 왕위계승을 주장할 입장은 못되었다). 소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고려의 왕권은 안정을 찾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4대 왕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다.
앞서 왕건이 뿌린 모순의 씨앗이 초기의 혼란을 빚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이처럼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된 데는 왕건의 책임이 크다. 943년 그가 죽으면서 유언 삼아 자신의 후손들, 즉 후대의 왕들에게 남긴 「훈요 10조」에는 왕위계승에 관해 충분히 논란을 부를 만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도리지만, 맏아들이 어리석을 경우에는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고,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가 왕이 되게 한다.’ 이것이 훈요 10조의 제 3항인데, 개국 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권력 승계의 원칙이 이렇듯 무원칙할 수 있을까? 도대체 스스로 어리석다거나 불초하다고 인정할 만큼 어리석고 불초한 왕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보면 왕위계승 분쟁은 이미 왕건 자신이 자초한 셈이다.
그러나 왕건이 남긴 모순된 유훈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훈요 10조의 첫 항에서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한다’면서 불교 장려를 촉구하는가 하면, 마지막 항에서는 “옛 경전과 역사서를 많이 읽어 나라 다스리는 일에 거울로 삼으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권장한다. 이 엇갈린 가르침은 이후 고려 사회의 성격을 귀족제와 관료제가 뒤섞인 잡탕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데, 이것이 광종(光宗) 때 나타난 둘째 모순이다.
▲ 모순에 찬 유훈 왕건이 남긴 훈요 10조는 고려의 건국 이념을 담고 있으나, 실상은 고려가 처한 대내외적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면이 많았다. 고려 왕조는 그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오히려 혼란을 자초한 인상이 짙다. 위의 그림에는 「훈요 10조」를 받아 적게 한 박술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희(熙)’ 자 대신 ‘희(希)’ 자를 쓴 게 이채롭다. 아마 발음이 같아서 그랬겠지만 이처럼 공식 문서에 이름을 달리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이두를 많이 썼음을 말해준다. 아래 그림에는 「훈요 10조」의 1항부터 5항까지의 내용이 있다.
둘째 모순 관료 vs 귀족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즉위한 처지였으니 광종(光宗)은 당연히 은인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배다른 형 혜종은 불과 2년, 친형인 정종은 겨우 3년간 재위했고, 둘 다 한창 젊은 나이에 죽었다. 왕권을 능가하는 호족들의 권력, 광종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왕위는커녕 목숨조차 위협받을지 모른다. 그가 즉위 후 7년간이나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광종(光宗)은 결코 왕위 유지에만 급급한 쭉정이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이 즉위하는 데도 호족의 도움을 입기는 했지만 호족들의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고려는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형들의 재위 기간을 훌쩍 뛰어넘고 어느 정도 왕권이 공고해지자 이윽고 광종은 서서히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착수한다. 호족들을 제어하려면 먼저 그들의 물리력을 빼앗아야 한다. 그들이 왕위계승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종(光宗)은 호족들의 사병 조직이 기본적으로 노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노비란 주인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까 농사를 짓게 하든 군대로 편성하는 남이 뭐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원래 찾으면 보이는 게 빈틈이다. 호족들의 노비는 거의 대부분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멋대로 토지를 병합하면서 토지에 딸린 일반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은 결과다. 당시는 비정상적인 혼란기였으니까 이제 와서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고려가 개국한 지 벌써 40년이 지났고 삼국통일을 이룬 지도 20년이나 지났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게 정상화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노비였던 자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강제로 노비가 된 백성들은 다시 양민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논리에서 950년 광종(光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다. 일종의 때이른 노예해방인 셈이지만 실제 목적은 근대적 노예해방과 달리 인도주의적인 데 있지 않고 호족들의 무장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다. 호족들은 당연히 반발했으나 감히 광종의 드라이브에 노골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한다. 7년간의 침묵이 효력을 본 것이다. 그동안 왕권이 공고화되었으니까. 게다가 광종은 짭짤한 부수입도 얻었다. 노비로 신분상승한 양민은 이제 호족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 기반도 약해졌고 중앙재정은 그만큼 튼실해졌다.
그러나 광종(光宗)의 개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호족들의 물리력은 제압했지만 지역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행정력은 여전하다. 사실 치열한 왕위계승전이 끝나고 나라가 정상화된 지금에 와서는 그들에게도 군사력은 부차적인 권력 기반일 뿐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광종은 958년에 2차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게 바로 과거제(科擧制)다【오늘날 우리는 시험을 통해 인력(공무원, 학생 등)을 선발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그래서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걸 철칙처럼 여기지만, 막상 과거가 처음 실시될 때는 얼마나 낯선 것이었을까? 사실 이런 방식은 국가권력이 강력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시행할 수도 없는 제도다. 관리(官吏)라는 말 자체가 ‘관(官)에서 일하는 벼슬아치[吏]’라는 뜻이니까 ‘관’이 없다면 관리도 있을 수 없다. 정치적 통일 권력이 늦게 발달한 서양의 역사에서는 관이 없었기에 동양식 관리와 같은 개념도 없었다. 따라서 과거 같은 제도가 필요도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서양의 경우에는 국민국가가 성립하는 17세기부터 관리와 관료제가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초기에는 주로 귀족들이 관직을 맡았으며, 18세기 시민 사회 시대에 들어서는 시민들의 ‘선출’에 의해 관리가 임명되는 방식이 자리잡는다. 그에 비해 동양 사회에서는 근대에 들어 중앙집권적 제국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과거가 가장 주요한 관리 임명제도로 기능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의 입시지옥과 각종 ‘국가고시’의 폐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광종은 중국의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그는 아마 처음부터 호족들이 분립하는 무질서를 타개할 장기적인 구상으로 중국적 질서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쌍기는 후주에서도 황제 세종의 황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병을 얻어 치료하던 중 고려인으로 귀화했다). 중국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질서의 축이 아니던가? 무릇 한반도 왕조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에 편입되는 게 안정이며 번영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요 혼란이었다. 광종(光宗)이 과거제를 도입한 목적은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중국적 질서에 편입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즉위 직후 광종은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제정하는 등 자주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시 중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스처를 보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광덕이라는 연호는 얼마 사용되지 못했고 곧 그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960년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후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세웠을 때도 광종(光宗)은 또 잠시 준풍(峻豊)이라는 별도의 연호를 쓴 적이 있으나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그 무렵 광종은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르고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으나 그건 신생제국인 송나라를 쉽게 인정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준풍을 끝으로 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19세기 말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되기까지 두 번 다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일이 없다】.
어쨌든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생겨 났으니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목이다. 과거(科擧)라는 말 자체가 과목으로 인재를 등용한다[擧]는 뜻이니까. 그럼 시험 과목은 무엇으로 할까? 전통적인 불교 사상? 아니면 왕건이 탐닉했던 도참설과 풍수지리설? 하지만 둘 다 관리를 뽑는다는 취지에는 걸맞지 않은 학문이다. 사실 광종(光宗)은 애초부터 과목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신흥 학문인 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옛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탄생할 때부터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수직적 질서(국왕을 정점으로 삼고 사대부들이 그를 보좌하는)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던가? 신라 말기 독서삼품과나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유학이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신라는 유학을 도입하기만 했을 뿐 현실에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대에 들어 왕권이 약해졌고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이다.
더구나 유학은 불교나 도참설에 비해 훨씬 체계적이고 문헌에 의존하는 학문이므로 과거의 과목으로 채택하기에도 최고다. 모름지기 시험이라면 문제를 출제할 수 있어야 하고 교과서도 필요한 법인데, 유학은 마치 과거를 위해 태어난 학문인 듯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이렇게 해서 시행된 과거의 과목은 명경과(明經科), 제술과(製述科), 잡과(雜科)의 세 가지였다. 우선 명경과란 이른바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으로 대표되는 유학의 경전들을 달달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것이니, 오늘날 대학입시로 말하자면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한다. 또 제술과는 시(詩), 부(賦, 산문), 송(頌, 제문), 책(策, 시사) 등 여러 장르의 글을 짓는 것이니, 이를테면 논술고사다. 그리고 잡과는 말 그대로 기타 학문으로서 수학, 지리학, 의학, 법학, 점술학 등등인데, 유학 중심의 과거에서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사회를 유지하는 기능으로서 필요한 과목들이다(고려의 과거제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이는 송 태조 조광윤의 문치주의를 모방한 탓이다. 그러나 이후 고려는 무관을 차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으로 호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과거제로 그들의 행정력을 약화시키면서 광종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세를 몰아 그는 960년에 송나라의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를 본떠 관리들의 등급을 9품으로 구분하고 네 가지 색깔의 관복을 정했으며, 한반도 동북부와 서북부를 개척하는 등 국토 확장에도 힘을 쓸 수 있었다. 관리의 위계를 결정하고 영토를 확정했다면 새 나라의 건국이나 다름없다. 왕건이 고려라는 나라의 명패를 만들었다면 광종(光宗)은 사실상의 2대왕으로서 고려를 재건국한 셈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왕건이 「훈요 10조」에 남긴 또 하나의 모순, 즉 귀족과 관료의 모순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 두 번째 건국 왕건은 고려의 명패만 올렸을 뿐이고 실제로 고려가 나라꼴을 갖추게 된 것은 광종의 공로다. 광종의 양대 업적이라면 단연 과거제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들 수 있다. 위는 『고려사』에 나온 쌍기(雙冀)에 관한 기록이고, 아래는 고려의 노비문서다. 진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이 두 가지 성과도 역사적 업적을 쌓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다
과거제가 어울리지 않는 체제
과거의 핵심이 유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광종(光宗)이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데는 단순히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신흥 왕조인 고려를 유학 국가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요컨대 과거제의 ‘형식’은 (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 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 (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광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군주였으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아쉽게도 그의 성적표는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문제는 고려 사회 자체가 과거제와 어울리지 않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과거제의 기본 기능은 중앙정부에서 단일한 절차를 통해 행정 관료들을 충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여건은 그 취지에 부합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행정이 그렇다. 비록 광종(光宗)의 강력한 압박 전술로 호족들은 개국 초기처럼 왕권을 넘볼 만큼 위세를 떨치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자기 지역에서는 거의 독립적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아무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한다 해도 그 관리가 지역의 실세인 호족들을 무시하고서 중앙에서 위임받은 행정을 담당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중앙정부는 모든 현의 지방관, 최소한 지방 수령 하나만이라도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로 충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건 마음일 뿐이다. 호족의 힘이 약한 지역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지만 대호족이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지역에서는 좀처럼 중앙의 입김이 먹혀들지 않는다. 호족들은 예전처럼 왕권에 간섭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대신 지역의 지배자라는 신분만큼은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한다.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을 이룬다는 꿈은 이미 물건너 갔으니 결국 중앙정부는 호족들과 다시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속현(屬縣,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행정 구역)이다. 대호족의 근거지는 호족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서 주현(主縣)으로 삼고, 그 휘하에 있는 중소 호족들의 세력권은 속현으로 편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중앙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은 대호족의 ‘사랑방 손님’처럼 형식적인 수령의 지위만 유지하고, 주현 부근에 있는 속현들의 지방행정은 주현의 실제 주인인 호족이 알아서 관장하는 식이다. 모두 335개에 이르는 고려의 현 가운데 속현의 수는 무려 90퍼센트가 넘었으니 이것만으로 보면 고려 왕실은 사실상 한반도의 단독정권이라는 수준도 못 되는 셈이다(이후 속현은 조금씩 줄어갔으나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중앙집권화가 확실히 이루어지는 조선시대의 일이다).
과거제(科擧制)는 처음부터 실패였다. 하기야, 애초에 무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중앙집권을 과거제라는 제도로써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제는 처음부터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실 그런 한계는 과거제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고려의 과거제는 제도 자체로도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릇 국가고시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라면 모든 관리, 적어도 일정한 직위 이상의 관리는 반드시 과거를 통해서만 임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만이 고려 사회의 유일한 등용문은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적어도 가문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음서(蔭敍)라는 제도다. 말 그대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고시에 무시험으로 패스하는 경우다. 음서는 처음에 개국공신들의 자제만으로 한정했으므로 원칙적으로는 일회성에 그쳐야 했으나, 원래 특권이라는 게 근절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음서는 점차 그 폭이 확대되면서 과거와 더불어 정규 관리 임명제도로 자리잡게 되는데, 이것 역시 지방 호족들의 현실적 영향력을 배려한 결과임은 물론이다【사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음서로 관직에 오른 관리의 수는 과거를 거친 관리보다 훨씬 적었으므로 음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려사』 열전에 등장하는 650명의 관리들 중 과거에 합격한 자는 340명, 음서 출신은 40명이고, 기타가 270명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상의 음덕이라는, 편법으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한 등용문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과거제를 통해 관료제 사회를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합격자를 선발하는 데도 지공거(知貢擧, 고시관)의 입김이 컸을 뿐 아니라 과거에 합격해도 현직에 임용되거나 승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문벌이 중요했다. 앞에 말한 ‘기타 270명’ 역시 음서는 아니었어도 그와 비슷한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임용된 관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과거제(科擧制)는 분명히 고려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가 있었으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적, 즉 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고려 사회는 아직 유교보다는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이 지배하고 있으며, 정치 체제의 측면에서도 과거를 바탕으로 하는 관료제 사회라기보다는 전통의 호족들이 자기 지역을 관리하는 귀족제 사회다. 이렇듯 과거제(科擧制)가 시행되면서도 귀족 지배 체제에 머물러 있는 사회를 중국 역사에서는 바로 당나라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는 동시대에 중국을 지배했던 송나라보다는 전 시대의 당나라와 같은 위상이다. 일찍이 당나라는 과거제를 도입했지만 실제 행정권은 과거를 통해 임용된 관료들이 아니라 전통의 문벌귀족(관롱집단)들이 지니고 있었으며, 안사의 난 이후에는 변방의 절도사들이 사실상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지역에서 사병을 거느리며 자치권을 행사했으니 여러모로 고려 왕조와 닮은꼴이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과 한반도의 문명적 차이는 200~300년쯤 되었다고 할까【그럼 중국의 송나라에 해당하는 한반도 왕조는 뭘까? 말할 것도 없이 후대의 조선이다. 당나라에서 시행된 과거제(科擧制)가 송나라 때 꽃피웠다면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사회의 골간이 되었다. 송 나라가 완벽한 유교 제국이라면 조선은 완벽한 유교 왕국이다. 즉 송나라와 조선은 둘 다 유학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 체제의 완성태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지만 송나라와 조선에서 당쟁이 극에 달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학이 체제 내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면 그 다음에는 유학 내부의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일 테니까】?
당나라가 그랬듯이 고려도 이념적으로는 유학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자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귀족(호족)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근본적으로 보면 왕건의 모순된 건국 이념(훈요 10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광종(光宗) 때까지는 아직 지배 체제의 문제일 뿐이니까 사회 전반에 대한 파급력은 별로 없다. 이를테면 지방행정을 지방관이 담당하는 호족이 담당하는 일반 백성들의 삶은 별반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순이 다음 왕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 대에 제정된 토지제도의 문제점으로 이어지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 입시지옥의 기원 시험을 통해 관리나 학생을 뽑는다는 발상이 지금 우리에게 낯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과거제(科擧制)의 역사를 오래 지녀왔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제도다. 인재를 보는 안목에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문제를 내고 그걸 풀게 했을까? 그림은 중국 송나라 때 과거 응시장의 풍경인데, 오늘날의 대학입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유권과 수조권
광종(光宗)은 왕위계승 문제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해결했다. 경종은 광종의 맏아들이니까 고려 왕실로서는 개국 이래 처음으로 평온한 왕위세습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갓 스물의 이 젊은이는 아버지와 같은 카리스마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추진한 개혁의 후유증에 심하게 시달려야 했다. 광종 대에 대대적으로 숙청된 호족 세력들이 자기들끼리 살벌한 복수극을 펼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한 목소리로 결집되어 왕을 탓하고 나서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그랬더라면 경종은 불과 6년밖에 안 되는 재위 기간마저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짧은 치세 동안 경종은 유일한 치적이자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업적 하나를 남기는데, 그게 바로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다. 통일왕조답지 않게 고려는 그 전까지 사실상 토지제도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하긴 그때까지는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제도를 정비할 만한 여유도 없었겠지만). 태조 왕건이 940년에 역분전(役分田)이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한 바 있으나 그건 개국공신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공로에 따라 토지를 분급한 것이었으므로 일회적인 ‘행사’였을 뿐 특별히 토지 제도라 부를 만한 것은 못 된다. 그 뒤 광종(光宗) 때에 이르러 나름대로 관제를 갖추었으니 이제 그에 따라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토지 분급제도가 필요해지는 건 당연하다.
전시과란 전지(田地, 경작지)와 시지(柴地, 땔감을 얻는 토지)를 합친 말이지만 용어의 유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근본적인 취지는 국가에서 임용하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줘야 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 봉급제도인 셈인데, 정치 권력만 비대하게 발달하고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동양 사회의 경우에는 토지제도가 늘 국가의 경제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관이 민을 어떻게 지배하느냐가 곧 국가 운영이었기 때문이다.
광종(光宗)이 정해놓은 관등의 차이에 따라 토지를 배분하면 되니까 전시과를 제정하는 일도 어려울 건 없다. 단, 그 관제가 완벽하다면 말이다. 만약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전국의 토지를 모두 국유화한 다음 관등에 따라 관리들에게 일제히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있을 리 없다. 실제로 고려 왕실은 전시과(田柴科)를 그렇게 운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는 중앙정부가 전국에 일사불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호족들이 각 지역을 장악한 분권 체제였다. 따라서 지방관조차도 파견하지 못하는 중앙정부가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토지제도를 구상하고 집행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제도도 그러한 현실을 감안해서 제정하고 운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전시과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기준에는 관품(官品)과 더불어 인품(人品)이라는 모호한 요소가 섞이게 된다.
관품은 곧 관등을 뜻하니까 어렵지 않다. 관직의 고하에 따라 토지를 주면 된다. 그런데 인품이라면 뭘까? 물론 지금처럼 사람됨이나 도덕성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인품이란 바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뜻하는 용어다(실은 왕건이 역분전을 나누어줄 때도 인품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때는 고려의 건국에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가를 인품으로 계산했다). 관품과 더불어 인품이 전시과(田柴科)의 기준이라는 것은 곧 고려가 관료제를 지향하면서도 실은 귀족제에 머물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그러나 전시과의 결함은 또 있다. 전시과든 뭐든 무릇 토지제도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토지 소유권이 명확해야만 한다. 국가가 관리들에게 토지를 녹봉으로 내준다고 해서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건 아니다. 그렇게 토지 자체를 떼어주고 나면 토지를 받은 관리가 퇴직한 뒤 반납받을 수도 없어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재정(토지)이 바닥나서 새로 관리를 뽑을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토지의 원칙적인 소유권은 국가, 즉 고려의 국왕에게 있다(이것을 흔히 왕토王土 사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관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재임 기간 중 할당받은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이다【수조권을 기준으로 해서 토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수조권이 왕실이나 국가 기관에 주어져 있는 공전(公田)이 있다. 화폐가 통용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모든 경비는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로 충당해야 한다. 그래서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경비를 위해 별도의 토지가 필요한데, 이것이 공전이다. 물론 공전이라고 해서 왕족이나 공무원이 직접 경작한 것은 아니고 관노비들이 투입되었다. 알다시피 노비에게는 임금을 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공전 이외의 모든 토지는 사전(私田)인데, 이것이 전시과(田柴科)의 대상이 되는 토지다. 말 그대로라면 ‘사유지’인 셈이지만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재산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 그 세금이 곧 관리들의 녹봉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정부 기관이 세금을 총괄해서 거둔 다음 공무원들에게 봉급을 주지만 고려시대에는 공무원들이 주어진 토지에서 직접 봉급을 수취해간 것이라 보면 된다】.
문제는 여기서도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싹튼다는 점이다. 이념적으로 전국의 토지 소유권자는 국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각 수조권자(관리)가 자신에게 할당된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관리가 현직에 있을 경우에는 수조권과 소유권이 일치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관리가 퇴직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산관(散官, 퇴임한 관리)은 임기가 끝났으므로 원칙적으로는 토지의 수조권을 반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퇴직금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수조권을 반납하고 나면 관리와 그의 식솔들은 먹고 살 길이 없다. 그래서 관리가 퇴임한 뒤에도 사실상 수조권은 계속 유지된다. 이런 관행이 자리잡으면서 그 토지의 수조권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애초에 녹봉으로 받은 토지가 사실상 그 가문의 소유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면 당연히 토지 부족 현상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가 있기에 전시과(田柴科)는 976년에 처음 제정된 이후로 몇 차례나 개정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목종 때인 998년에 개정된 것을 개정 전시과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인품이라는 모호한 기준이 약화되고 관제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할당하며 현직 관리를 우선으로 하고 산관에게는 차별 대우를 하기로 한다. 전시과의 대상 토지가 부족해진 것을 명백히 드러내는 개정이다. 그러나 제도를 개정해도 사태는 근본적으로 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종 때인 1076년에 다시 한번 개정하는데, 이것을 경정전시과라 부른다. 여기서는 그때까지 무시되어왔던 무관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고 향직(鄕職,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정한 관직)에게도 토지가 분급되는 등 중요한 면에서 개정이 이루어지지만, 산관에 대한 대우는 완전히 철폐된다.
이것이 말해주는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산관까지 배려할 만큼 토지의 여유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고려의 국가재정이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둘째, 이미 권력을 지닌 산관들은 토지를 가질 만큼 가졌다는 뜻이다. 애초에 수조권으로 분급받은 토지의 상속이 대대로 이어진 결과 신흥 문벌들이 생겨났고 이들 가문은 사실상 토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토지 겸병에 나서게 되니, 고려 중기 이후 토지제도의 문란과 경제 혼란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혼란은 조선의 과전법(科田法)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문제가 많은 토지제도인 전시과(田柴科)는 그래도 고려가 초보적인 관료제 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제도였다. 그리고 그 관료제는 과거제(科擧制)라는 관리 임용제도가 만들어진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과거제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더불어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꾀하기 위한 조치였다.
마지막으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는 고려 왕조가 성립하기 위한 기본 전제였다. 이렇게 보면 그 일련의 과정은 고려 왕조가 개국한 이후 밟아나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료제를 지향하면서도 귀족제에 머물게 된 모순, 전통 사상을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유학을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으라고 권유한 훈요 10조의 모순은 결국 고려사회의 체제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 고려시대의 급료명세서 『고려사』에서 전시과(田柴科)에 관해 설명한 부분이다. 역분전(役分田)이라는 용어와 경종 원년에 시정전시과를 시행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화폐경제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관리들에게는 월급봉투 대신 토지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은 왕(국가)에게 둔 채 수조권만 준 데서 모든 폐단이 비롯된다(이는 조선시대의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도 마찬가지다).
셋째 모순 먼 친구 vs 가까운 적
또 하나의 모순이 없었다면 고려 왕조는 그런 대로 별탈 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첫째 모순 때문에 완벽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고 둘째 모순으로 인해 정상적인 관료제 사회조차 이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셋째 모순은 고려 사회 내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훨씬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훈요 10조」의 4항과 5항에서 왕건은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하고 배척하라고 가르치면서 서경을 중시하라고 한다. 거란이라면 당시 랴오둥을 장악하고 있던 북방 민족이므로 고려와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왕건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들을 적대시하고 그 적대감을 시위하듯이 서경을 전진기지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물론 왕건은 늘 고려가 옛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접경하고 있는 이웃을 굳이 배척하라고 가르친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국의 이민족 왕조인 북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린 왕조가 아니었던가?
만약 왕건이 중국에서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되는 것을 보고 죽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훈요 10조가 아니라 ‘훈요 11조’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송나라를 받들고 나라의 모범으로 삼으라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위 중에 이미 그는 중국의 5대 왕조에게 10여 차례나 사신을 보내면서 적극적인 사대외교를 펼친 바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북방의 거란을 배척하고자 한 이유는 명백하다. 친구의 적은 나의 적, 중국의 한족 왕조를 받들고자 노력한 그로서는 한족 왕조의 적인 북방의 이민족 국가를 적대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그가 겉으로 내세운 슬로건과는 달리 고구려보다는 오히려 신라를 계승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긴, 신라의 경주 정권을 인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힌 그로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주의 옛 신라 왕족과 6두품 세력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왕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궁예 시대부터 이어진 후고구려 세력을 제치고 고려의 최대 파벌로 떠올랐다(중기 이후 이른바 권문세족으로 발돋움하는 경주 김씨, 경주 최씨, 안동 권씨 등은 모두 신라계다). 경주 귀족이라면 모름지기 중국의 한족 왕조에 사대하는 게 기본 의무다【이런 점에서 보면 사실 고려는 굳이 생겨날 필요가 없는 왕조라고도 할 수 있다. 단지 왕실의 혈통만이 달라진 것 이외에는 제도로 보나, 지배 세력으로 보나, 지배 이념으로 보나 신라와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신라 역시 말기에 비록 왕실은 심하게 흔들렸지만 어차피 관료제 사회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유학 이념도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고려와 신라를 같은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 진화의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인 체제는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나중에 고려를 대체하는 조선도 고려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는 체제라고 보면 한반도 왕조들은 늘 내적인 필연성이 없이 교체된 셈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왕조 교체는 내적인 요인보다는 외적인 요인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할 때 중국이 당-송 교체기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할 때 중국이 원-명 교체기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중대한 판단미스였고, 더구나 고려가 신흥국임을 고려한다면 심각한 사태를 부를 수도 있었다. 927년에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북방의 패자로 발돋움한 거란은 대륙의 지배자인 송나라마저 위협하는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거란은 처음부터 랴오둥 진출을 포기했던 발해보다는 분명히 한 급 위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랴오둥을 터전으로 삼지 않으면 왕조를 존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나아가 랴오둥을 발판으로 대륙의 중심인 중원을 정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왕건이 궁예에게서 정권을 인수받기 2년 전인 916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요(遼)로 바꾸고 연호를 제정하고 황제를 칭한 것을 보면 그 야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중국 한족 왕조의 낙점만을 애타게 바라는 왕건의 눈에는 그런 거란의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 933년 왕건은 5대 왕조의 하나인 후당의 책봉을 받고 한반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예비고사를 통과했다고 기뻐했지만, 그 후당은 불과 3년 뒤에 요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아마도 당시에 「극동일보」가 있었다면 이 소식이 단연 1면 톱기사감, 그러나 왕건은 같은 해에 후백제를 접수하고 후삼국통일을 이룬 것에만 마냥 흡족해 할 따름이었다. 후당을 멸망시킨 부수입으로 요나라는 베이징 인근의 연운 16주를 얻었다(후당을 대체한 후진이 요나라의 힘을 빌린 대가로 제공한 땅이다). 이로써 거란은 자기네 역사상 처음으로 이 지역에 사는 한족 백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 다음 목표는 물론 중원이다.
그 뒤 요나라는 내부 권력다툼이 발생하면서 잠시 성장세가 주춤하는데, 사실 960년에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우고 대륙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 크다. 그러나 비록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지만 요나라에게도 그 기간은 아주 요긴했다. 권력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앞서 있는 한족 왕조에게서 선진 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71년 조광윤이 대장경을 만들게 한 것을 본받아 독자적인 대장경을 조판한 게 그런 예다(그에 대한 경쟁으로 고려도 나중에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온하던 송-요 관계에 먹구름이 끼이기 시작한 계기는 조광윤의 동생으로 제위를 물려받은 송 태종이 연운 16주를 아까워한 데서 비롯된다.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실지 수복을 위해 요나라를 침략했으나 그건 동전을 주우려다 지갑마저 떨어뜨린 꼴이 되고 만다(당시 태종은 고려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아직 대중국 사대관계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거절당했다). 오히려 그 전쟁에서 승리한 요나라는 중원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고려가 고래들의 싸움에서 새우가 될 가능성은 점점 짙어진다. 거란을 멀리 하라고 가르친 훈요 10조는 고려 왕조가 실은 새우의 처지임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찍이 진시황제는 원교근공(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이라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해서 대륙 통일을 이룬 바 있지만, 그건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나 쓰는 전략이다. 바깥으로 내세울 것 없고 안으로 보잘것없는 고려에게는 오히려 근교원공이 훨씬 타당한 대외정책이다. 가까운 요나라를 적대시하고 먼 송나라에게 사대하려 한 고려의 모순된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피바람을 부른다.
▲ 한족과 ‘금수’의 차이 왕건이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은 이유는 자신의 치세에 이미 중국의 한족 왕조가 네 차례나 흥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광윤(위 그림)이 건국한 송이 통일제국으로 자리잡는 것을 본 광종(光宗)은 송나라와의 수교가 아버지의 뜻에 부합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송과 사대관계를 맺었는데, 불행히도 그것은 ‘금수’인 거란의 분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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