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두 번째 보드 도전기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강습을 받으러 온 학생들을 본다. 먼저 강사가 시범을 보이면 그것에 따라 아이들은 하나씩 연습을 하며 내려가는 것이다. 강사는 아주 느린 속도로 양팔을 벌려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다가, 서서히 팔을 90도 가량 돌리며 보드의 방향을 전환하며 내려온다.
▲ 보드를 배우러 앉아 있는 사람들. 배우려는 마음이 예쁘다.
바보는 빠름을 추구하고, 실력자는 완급조절을 추구한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초급코스라 해도 경사가 꽤 되었기에 천천히 내려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강사는 꼭 슬로우비디오를 찍듯 아주 느린 속도로 자연스럽게 턴을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아주 느린 속도’라는 거였다. 어떻게 저 경사에서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는지 보는 것만으로 놀라울 정도였다. 내가 직접 해보니 힐엣지로 내려갈 땐 그래도 감속이 되지만, 턴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토엣지로 바꾸면 속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린 속도로 내려갈 수 있다는 건, 토엣지를 할 때도 스키의 흐름을 장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순간 스키를 잘 탄다는 건 그저 ‘경사면을 따라 빠르게 내려간다는 것’이 아닌, ‘경사가 어떻든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탄다는 건 ‘빠르게 달려 내려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깨진 것이다. 어제 처음 스키를 탔던 규빈이는 전속력으로 경사면을 내려간다. 하지만 문제는 방향전환도 할 수 없고, 멈추는 것도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빨리 달리게 된다는 거였다. 멈춤이 없는 달림처럼 위험한 게 없는데 바로 그런 모양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스키를 잘 탄다는 것은 자유자재로 방향전환도 할 수 있으며, 멈추는 것까지 잘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력자는 오히려 빠르게 내려오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으며 최대한 느리게 내려오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 어설프지만, 그래도 따라서 해본다. 잘 되진 않지만, 뭔가가 익숙해지곤 했다. 지민이가 찍어준 사진.
넘어지면서 배우고, 한계에 직면할 때 배운다
어젠 중급코스를 타고 내려올 때 외엔 넘어질 일이 거의 없었다. 탄 상태로 가장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힐엣지를 넣고 적당히 펜쥴럼을 하며 내려오면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해보지 않았던 토엣지를 넣어보기도 했고, 턴까지 하려고 하니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 토엣지를 넣자마자 뒤로 발라당 까지고 말았다. 힐엣지는 뒤꿈치에 힘을 실어야 하고, 토엣지는 발가락에 힘을 실어야 하는데, 그게 말만 쉽지 현실은 ‘시궁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발가락에 힘을 싣다보면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아, 살짝 무게 중심을 뒤로 주려 하는 순간 발라당 까지고 말았다. 거북이가 뒤로 맥아리 없이 넘어지듯이 나 또한 그랬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계속 연습하고 연습을 해보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을 대충 보고 하는지라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느 정도의 감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겨우 이틀 탔기에 완벽하게 구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무게중심을 이동하며 돌아야 하는지 몸으로 익혀지기 시작했다. 힐엣지에서 토엣지를 할 때는 아예 앞으로 넘어져야 한다는 각오로 휙 돌아버리면 넘어지지도 않고 중심도 잘 잡을 수 있더라. 중심이동엔 적당선이라는 건 없었다. 확 몸을 젖히던지, 앞으로 당기던지 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넘어지면서 배운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배울 때 주구장창 들었던 말이다. 안전하게 탄다며, 최대한 돌발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타기만 하면 그저 달리는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지 자전거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는 없다. 그러면 도로에서 탈 땐, 위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손으로도 타보고, 때론 두 손을 놓고 타보기도 한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주 넘어질 것이고, 때론 심하게 다치기도 할 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전거의 흐름을 몸으로 완전히 익혀 내 몸이 자전거이고, 자전거가 내 몸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스키도 안전하게만 타면 그 정도의 수준에서만 머물 뿐, 스키의 흐름을 몸으로 익힐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전하려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동작을 해보고 그 흐름을 알게 되면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이 날 원 없이 넘어지다 보니, 오히려 넘어지는 것의 두려움은 사라져 갔다.
나의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지만, 이틀 사이에 보드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부분들을 사용하는지를 몸으로 익힐 순 있었다. 다음에도 스키장에 간다면 꼭 보드를 타야겠다. 그리고 당연하게 토엣지로 내려오는 것을 연습하고 직선이 아닌, 낙엽이 떨어지듯 곡선으로 내려오는 펜쥴럼을 연습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눈바닥과 자주 마주치며 꽈당 꽈당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초급코스 한 켠에선 민석이와 현세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3번 정도 오르락내리락 했음에도 그들은 아직도 중간부분도 채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후기에서 상세히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 초급코스 정상에서 규빈이와 지민이와 함께. 난 넘어지면 부서질까봐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지민이는 폰을 가져왔다.
인용
1. 겨울방학에 받은 첫 번째 과제, 날 멸망시킬 태풍
7. 몸이란 타자와 소통하기
10. 치열한 토론의 순간, 우린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12. 두 번째 보드 도전기
13. 민석이의 도전
14. 현세의 도전
16. 여행이 끝나갈 땐 늘 아쉽다
'연재 > 여행 속에 답이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 개학 스키여행 - 14. 현세의 도전 (0) | 2019.12.19 |
---|---|
2016 개학 스키여행 - 13. 민석이의 도전 (0) | 2019.12.19 |
2016 개학 스키여행 - 11. 두 번째로 보드를 타는 이의 각오 (0) | 2019.12.19 |
2016 개학 스키여행 - 10. 치열한 토론의 순간, 우린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0) | 2019.12.19 |
2016 개학 스키여행 - 9. 4년 만에 다시 시작된 교사 없는 학교 (0) | 2019.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