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게(偈)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흑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변신하여 눈이 일천 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大深이 뭇사람과 다르다 보니, 이 때문에 의아히들 여기는 게지. 且爲之說偈曰: “烏信百鳥黑, 鷺訝他不白. 白黑各自是, 天應厭訟獄. 人皆兩目俱, 矉一目亦覩. 何必雙後明, 亦有一目國. 兩目猶嫌小, 還有眼添額. 復有觀音佛, 變相目千隻. 千目更何有, 瞽者亦觀黑. 金君廢疾人, 依佛以存身. 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 大深旣異衆, 以玆相訝惑.” |
기문記文이라는 양식에는 ‘게송’ 같은 것이 붙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기문이면서도 글 끝에 게송을 붙이고 있다. 파격적 글쓰기의 극치라 할 만하다. 이처럼 연암은 전통적 글쓰기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이른바 ‘장르혼성混成’을 통해 자신의 사유와 미학을 창의적이면서 자유롭게 펼쳐 나가고 있다.
이 ‘게’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 속에 장애인에 대한 연암의 깊은 숙고熟考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수년 전 「‘병신’에의 시선」(『고전문학연구』24, 2003, 12)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언급한 바 있는데, 이하의 서술은 그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으레 다 검은 줄로만 알고,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 의아해한다. 까마귀와 백로의 이 비유는 자기중심적인 판단, 자기중심적인 인식의 국한성 내지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흑黑이다 백白이다,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며 싸우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옳음도 그름도 정상도 비정상도 없이 다 똑같을 따름이다. 모든 인식과 판단은 상대적일 뿐, 절대적인 건 없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평등하되 다만 다를 뿐인 것이다. 박지원이 까마귀와 백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이 둘이다. 하지만 눈은 꼭 둘만은 아니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이 하나인 사람도 있고, 눈이 세 개인 사람, 눈이 천 개인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꼭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눈이 두 개인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할 경우 그런 사람만이 옳고 나머지는 다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눈이 두 개라고 해서 눈이 하나뿐인 사람보다 나은 건 아니다. 또한 눈이 세 개나 천 개나 된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도 그 나름대로 사물을 본다고 할 수 있다. 심안心眼(마음의 눈)을 갖고 있음으로써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의 눈이 보통 둘이라는 이유 때문에 눈이 하나인 사람이나 장님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거나 얕잡아보는 것은 정당한 일은 아니다. 눈이 둘인가, 하나인가, 장님인가는 다만 차이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또 반드시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박지원이 ‘눈’으로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박지원의 이 게는 병 때문에 ‘폐질인廢疾人(=장애인)’이 된 김홍연의 처지를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게가 보여주는 시선이 한갓 동정의 시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주 심하다. 박지원의 이 게에는 장애인을 보는 독특한 시선(오늘날의 우리가 경청해야 할)이 발견된다. 그건 곧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 설정을 허물어버리는 시선이다. 장애인을 보는 박지원의 시선에는 정상/비정상의 엄격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우/열로 위계화되지도 않는다. 그의 시선에 따르면 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비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요, 비장애인에 대한 긍정이 장애인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에 가치의 우열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선망하거나 경멸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배제하거나 억압할 근거도 없다. 이런 시선에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기’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공동의 사회적 이상이 된다. 따라서 장애를 보는 이런 시선에서는 폭력 혹은 폭력의 메타퍼metaphor가 원천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 박지원의 이런 시선은 장애인에 대한 부당하고도 ‘비정상적’인 억압과 경멸에 대한 논리적 시정이라는 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 내면의 뒤틀림과 폭력성 및 억압/피억압의 사회적 모순 관계에 따른 자기의식의 분열을 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장애를 보는 박지원의 이런 시선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해 박지원이 견지했던 저 도저한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의 관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이 상대주의적 인식 태도가 차별과 독선과 자기중심성에 기초해있던 당대 조선의 현실 주자학 및 문화 패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갖는다는 점, 그리고 불교와 장자 사상의 수용을 통해 다양성을 긍정하면서 편견이나 차별심을 넘어서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우리는 장애인을 보는 시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박지원의 남다른 비판적 통찰과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많던 돈을 다 탕진하고 비참한 처지에 빠진 협객 김홍연에 대한 세간의 평이 그리 좋았을 리는 없다. 이 게는 그런 점을 의식한 듯 끝 부분에서 김홍연의 삶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대신 그 삶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리하여 “돈을 쌓아 두고 쓰지 않으면 /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積錢若不用, 何異丐者貧. 衆生各自得, 不必强相學)”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대로(즉 자신의 조건과 처지와 방식에 따라) 살아가면 되지, 굳이 남을 기준이나 모범으로 삼아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누구의 삶은 옳고 누구의 삶은 틀렸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게에는 삶과 인간에 대한 중년기 연암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개개의 생을 편견 없이 긍정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 전문
인용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4. 총평
- 게偈: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송頌’이라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 ‘게송偈頌’이라고도 한다. 부처를 찬양하거나 깨달음을 읊은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연암이 김홍연을 위로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이 ‘게’의 형식을 끌어다 썼다. ‘게’의 창조적 전용轉用이라 이를 만하다. [본문으로]
-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 새를 의아해하네: 까마귀는 자기가 검으므로 다른 새들도 다 검다고 믿으며 백로는 자기가 희므로 희지 않은 새들을 보면 의아해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눈이 하나뿐인 사람들만 사는 일목국一目國이라는 나라가 있다. 연암은 중국 고대의 책인 『산해경山海經』을 읽은 바 있다. [본문으로]
-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는 삼안인三眼人이 나온다. [본문으로]
- 관음보살: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이름이다. 그는 여러 중생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화신化身의 하나인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손이 천 개이고 눈이 천 개인 관세음보살)을 지칭한다. 천 개의 눈(千眼)은 모든 세상을 비추는 것을 상징하고, 천 개의 손(千手)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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