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발승암 기문 -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본문

책/한문(漢文)

발승암 기문 -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건방진방랑자 2020. 4. 16. 15:14
728x90
반응형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지만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사기열전 중에 유협열전자객열전이 있다. ‘유협이란 협객을 말한다. 이 두 편의 열전에서 다룬 유협과 자객은 모두 유교적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부류로서, 질서와 예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불온시 되거나 비판받아야 할 인간들이다. 그렇건만 사마천은 이들의 미덕을 찬양하고 기리어 역사에 편입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학자들은 두고두고 사마천을 비난하였다. 불온한 인물들을 미화하고 역사에서 다루었다는 게 비난의 이유였다. 연암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사기열전의 이 두 편, 특히 유협열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바로 이런 독서 경험과 관련해 연암은 젊은 시절 여항의 협객적 인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사기』 「유협열전을 읽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협객에 호감을 갖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연암이 사기열전에 경도되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연암이 협객에 호감을 품게 된 또다른 이유는, 연암의 기질 내지 연암의 현실 인식에서 찾아야 하리라 본다. 연암은 철들기 시작하면서 당대 조선 사대부의 위선적 행태 및 약삭빠르게 권력과 이익을 붙좇는 태도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에 대해 몹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 보니 좀스럽고 위선적인 사대부와 대척적인 지점에 서 있는 인간 타입으로 여항의 협객이라는 존재에 호감을 느끼게 된 게 아닌가 한다. 연암의 불온성이 이런 데서도 확인된다.

 

연암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광문이라는 자의 전廣文子傳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광문廣文은 원래 거지 출신인데, 협객적 면모가 없지 않았다. 연암은 자기 시대의 인물인 이 광문의 전기를 씀으로써 이 인물이 지닌 미덕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광문이 조선 팔도에 명성이 높자 그 이름을 팔아 역모를 꾀하려는 자가 나타나 당시에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연암은 광문이라는 자의 전廣文子傳을 쓰고 난 다음의 어느 시점에 다시 광문이라는 자의 전 뒤에 적다書廣文傳後라는 글을 써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 가운데 당시 이름을 떨친 협객의 이름이 두엇 보인다. 가령 김군경이란 이는 미남자로서 기생을 끼고 담장을 뛰어넘을 정도로 용력이 출중했고 돈 쓰기를 물 쓰듯 했다고 했으며, 싸움꾼으로 유명한 표철주는 집에 돈이 많아 황금투구라고 불렸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광문의 친구들이었던 듯한데, 이제는 나이 들어 김군경은 용호영龍虎營에서 구실아치를 하고 있고, 표철주는 재산을 탕진해 가난하게 되어 집주름(부동산 중개업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연암은 이들을 자못 우호적인 눈길로 바라보며 그 삶을 운치 있게 그려놓고 있다.

이 단락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홍연의 삶은 김군경이나 표철주의 삶과 비슷한 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 편은 그 앞부분에서 김홍연의 호협豪俠한 삶을 말한 다음 뒷부분에서 그가 지금은 늙어 명산에 노닐며 바위에 손수 이름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뒷부분은, “하지만 지금은 늙어 머리가 세었으며(今旣老白首)”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김홍연이 바위에다 이름 새기는 일을 시작한 것은 그가 늙어서의 일인 셈이다. 이 글의 1단락에서 연암은 바위에 새겨진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보고 김홍연이란 자는 대체 누구기에 석공石工으로 하여금 다람쥐나 원숭이와 목숨을 다투게 한 걸까(彼題名者誰耶, 乃能令工與鼯猱爭性命也?)”라고 혼자 중얼거린 바 있다. 그런데 이 단락의 끝 부분을 보면 김홍연은 석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소 도구를 갖고 다니면서 자기가 직접 이름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김홍연은 왜 석공도 없이 스스로 그 위험한 곳에 올라가 이름을 새기는 짓을 한 걸까? 석공도 없이 그랬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하필 노년에 들어 그런 짓을 한 걸까? 혹시 김홍연은 표철주처럼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노년에 그만 쓸쓸한 신세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세심한 독자라면 이 단락의 끝부분에서 이런 의문을 품음 직하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13. ()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14. 총평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