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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승암 기문 -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본문

책/한문(漢文)

발승암 기문 -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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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어느 날 그는 나의 우거寓居에 찾아와 이런 부탁을 했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 마음인즉슨 진작 죽었고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며, 거주하는 곳은 모두 중들의 암자입니다. 바라건대 선생의 문장에 의탁해서 후세에 이름을 전했으면 합니다.”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 나는 마침내 그 옛날 함께 산에 노닐던 객과 주고받았던 말을 글로 써서 보내주면서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이 단락에서 연암은 이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거란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잠시 유숙하고 있던 평양의 어떤 집을 가리킬 터이다. 김택영의 김홍연전金弘淵傳에 의하면, 당시 김홍연은 평양의 영명사永明寺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연암이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연암의 거처로 찾아와 자신의 기문記文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가 이제 늙어 머잖아 죽을 터인데(吾今老且死)”로 시작되는 김홍연의 말은 너무나 처량하다. 한때 협객으로 날리며 멋지게 살던 그가 어찌 이리 됐나 싶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름에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집착이다. 그런데 이 집착은 김홍연의 비참한 처지와 관련이 있다. 4에서 우리는 김홍연이 산에 다니며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일을 늙어서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즉 김홍연은 몰락한 이후부터 자기 이름을 후세에 전해야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리 되었을까? 회한과 자기 보상에의 욕구 때문이이었을 것이다. 김홍연은 뜻이 크고 호방한 사내였으나 이 세상에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게다가 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은 장애인이 되고 말았으며, 절집에 기식寄食해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회한이 가득할 수밖에 없고, 회한이 가득하면 할수록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져 갔을 터이다. 이런 심리가 자기 이름만큼은 후세에 꼭 전해야겠다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과도한 집착을 낳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집착은 급기야 대문장가 연암에게 글을 부탁하도록 만들고 있다.

김홍연의 요청에 대해 연암은 나는 그가 늙어서도 그 뜻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슬펐다(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라고 적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저토록 이름에 집착하는 김홍연의 심리를 안쓰러워하는 연암의 마음이 담겨 있다. 연암은 왜 김홍연이 저리도 이름에 집착하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에게 연민을 느끼며 슬퍼하는 마음이 되었을 터이다. 또한 그래서 그에게 글을 써주었으리라. 이처럼 연암의 이 글은 연민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연민의 감정 위에 축조되고 있음을 각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는 하나 이름에의 집착은 결국 헛된 것이며, 김홍연 자신도 이점을 깨달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연암은 어떤 객과 주고받은 문답을 이 글의 한 부분으로 넣었을 터이다.

 

앞의 8에서 보았듯이 연암은 문장을 통해 후세에 이름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회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보다는 오래 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연암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김홍연의 부탁에 선선히 글을 써 줬다. 이런 게 바로 연민이다. 김홍연은 연암의 가슴속에 피어오른 이 연민에 힘입어 오늘날까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집착한 바대로. 그렇다면 김홍연의 집착이 옳았던 것일까? 그렇게 묻는 것은 우문愚問일 것이다. 또한 문장에 대한 연암의 회의가 저 긴 우주적 시간 속에서 볼 때 꼭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토록 빼어난 문장을 쓸 수 있으면서도 문장에 대해 이렇게 회의할 수 있는 것, 어쩌면 그 점이 여느 문장가와 다른 연암의 독특한 면모이고, 아이러니가 번뜩이는 연암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 대목은 문학의 역할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글은 적어도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는 듯하다. 잊혀버릴 인간에 대해, 그 운명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망각되지 않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잊혀 버릴 인간이란 대개 역사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일 터이다. 이런 소수자들이 망각되지 않아서 누가 좋을까? 소수자일까, 우리 자신일까? 결국 우리 자신이지 않을까. 그로부터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므로.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부질없는 짓

2. 가는 산마다 보이는 그 이름

3.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4. 가뭄의 단비처럼 제공된 김홍연의 개인정보

5. 왠지 남 같지 않다 했더니

6. 왈짜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7. 이름이 곧 존재라는 착각

8. 이름이 남길 바라는 허망함에 대해

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10. 김홍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백동수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2. 늙어서도 이름에 집착하며 기문을 부탁하다

13. ()에 드러난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

14.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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