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름에 집착하는 유교, 그 너머
이상 살펴본 것처럼 이 단락은 그 필치가 경쾌하고 해학적이지만 그 속에 깊은 철리哲理가 담겨 있다. 한편 독자는 이 단락에 이르러 비로소 김흥연이 바로 발승이라는 사실을 고지告知 받는다. 그리하여 왜 이 글의 제목이 ‘발승암기髮僧菴記’인지를 간취하게 된다. 이 점 또한 묘미가 있다. 연암은 독자의 심리를 이리저리 저울질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대상 인물의 심리를 통찰하는 데 썩 뛰어날 뿐 아니라 독자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다 할 만하다. 천하의 문장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 그것은 허깨비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 이는 20대 중반 무렵에 연암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연암은 이런 깨달음을 「선귤당이라는 집의 기문蟬橘堂記」과 「관재라는 집의 기문觀齋記」 이 두 편의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름이 헛된 것이라는 데 대한 연암의 사유는 연암의 여러 글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문제는 연암이 평생에 걸쳐 씨름한 화두의 하나로, 연암의 사유를 구성하는 몇 가지 주요한 원리의 하나이다. 연암은 기본적으로 유자儒者다. 유교에서는 이름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공자도 『논어』에서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두려워할 게 없다(四十, 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일반적으로 유교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집착한다. ‘입신양명’이니 ‘불후’니 하는 말은 모두 유교에서 나온 말이다. 연암은 유자였던 만큼 유교의 이런 문화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을 터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름에 집착하는 이런 유교문화를 반성적으로 성찰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그다운 면모다. 이름에 대한 연암의 이런 반성적 사유는 불교 공부를 통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연암은 인륜적 측면에서는 불교를 비판했지만 불교가 지닌 어떤 교리들과 그 사유방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연암의 사유는 단순히 유교에 고착되지 않는 폭과 깊이를 확보할 수 있었다.
▲ 전문
인용
11. 9년 만에 실제로 만나게 되다
14.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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